***라이브도어 vs. 후지테레비**
최근 일본에서는 그동안 상상하기 힘들었던 적대적 기업인수 전쟁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인터넷 포털기업 라이브도어를 이끄는 32세의 청년, 호리에 타카후미가 시청률 1위 후지TV를 거느린 닛폰방송의 주식을 과반수가 넘게 인수하여 후지 미디어그룹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무후무한 사건은 어른들에게는 일견 당돌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개혁을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통쾌한 모습으로까지 비치는 듯하다. 호리에는 관료화된 경영자가 지배하는 일본의 기업들은 복잡한 주식소유로 뚜렷한 주인도 없고 주주의 목소리도 무시되어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어서 화끈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패기 넘치게 외친다. 이런 주장이야 흔히 들었던 이야기지만 웬만해선 꿈쩍도 않는 일본 사회도 무지막지한 자본과 시장의 힘을 앞세운 그의 도발에는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한 일본인 교수는, 일본인들은 불황과 구조조정으로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팍팍해졌지만 정작 정부나 고위경영자들은 고통을 분담하지 않아 불만이며 기업인수와 같은 소용돌이가 이 무책임의 관행을 흔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걸 보면 파산한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눈물 흘리며 용서를 비는 것도 국민들에게는 일종의 쇼로 보이는 모양이다. 자본시장이 꼭 효율적으로 기업을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장기적인 투자는 저해할 지 모르며 오랜 일본의 시스템과 삐걱거리며 잘 맞지 않을 수 있음도 알지만, 그래도 정체된 일본의 현실에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닛폰방송은 증자를 통해 후지 테레비에 주식을 몰아주려는 꼼수가 실패하자 손정의로 유명한 소프트방크에 주식을 빌려주며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극우파 산케이 신문과 역사왜곡을 일삼는 교과서를 만든 후소샤도 포함된 후지산케이 그룹이 휘청대는 것은 우리에겐 오히려 통쾌한 일일까.
일본의 온 언론과 방송은 신이 난 듯 호리에의 의도와 심지어는 그의 미인 여비서에 관해서도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한국의 중앙일보도 오너의 힘이 센 재벌과 자본시장의 힘이 강력한 한국의 변화를 찬양하는 듯한 호리에와의 독점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언론의 호들갑이야 그러려니 하더라도, 이 사건은 일본 경제시스템의 미래와 관련해서 일본사회에 일파만파를 던지고 있다.
***철옹성 일본과 외국자본**
호리에의 기업인수전에 대해서는 판만 깔리면 가장 큰 힘을 쓸 수 있다고 믿는 외국자본들이 특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본경제가 은행이나 기업들이 서로 주식을 보유하고 서로를 보호하며 경제거인으로 성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일본에 관한 특집에서 미국의 유명한 기업사냥꾼 분(Boone)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그는 1989년 도요타 그룹에 속하는 코이토 산업의 지분을 20%나 사들이며 일본기업의 인수를 선언했지만, 일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외국인 이사 임명에 대한 거부와 안보 명목의 온갖 규제 등으로 실의에 빠진 그는 결국 지분을 정리하며 1991년 워싱턴 포스트에 “OK, 도요타, OK, 코이토, 내가 포기하지”라고 글을 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위기 이후 90년대 후반부터는 상호주식보유도 상당히 약화되고 일본정부의 외국인투자 촉진정책과 함께 외국자본의 유입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일본 주식시장의 주식가치에서 차지하는 외국인의 비중은 1990년대 초 5% 정도에서 1990년대 말 20%에 이를 정도로 높아졌고 금융기관 등 일본기업들의 외국인 인수로 인해 FDI 유입도 최근에는 크게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003년 누적 FDI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를 겨우 넘는 수준으로 이는 방글라데시와 비슷한 전세계 130위권이다. 이 비중이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의 경우 30%에 이르는 것을 고려하면 일본경제가 얼마나 폐쇄적인가를 알 수 있다. 이는 역시 주주의 역할이 극도로 제한된 독특한 기업과 금융시스템 때문이다. 일본경제는 여전히 미국식과 거리가 먼 ‘공동체’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고 산업과 금융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국가의 철통같은 결합이 외국자본의 침투를 막아내 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나온 이번 사건은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금융자본에게 성공적인 일본 공략의 기대를 갖게 해주는 것이다. 호리에는 이들에게는 ‘내부의 반란자’로 반갑게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을 지켜라**
그러나 아직 일본식을 지키겠다는 목소리는 무척 강력하며 외국자본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이웃동네 한국이 위기로 무너진 이후 너무 많이 미국식으로 변해버린 반면, 여전히 일본의 움직임은 고질라처럼 조심스럽고 굼뜬 모습이다.
어느 사회나 기득권을 대변하고 변화에 저항하는 보수파의 이해가 강력하기 마련 아니던가. 자민당에서는 외국자본의 과도한 유입과 영향력 강화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이미 외국인의 인수합병을 촉진하는 상법 개정을 연기했고 외국인이 일본 기업의 전 주식을 인수하는 거래를 2007년 초까지 금지하는 방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통상산업성은, 적대적 합병과 관련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불타오르는 인수합병 논쟁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게다가 일본 금융청은 최근 외국의 사모펀드들에게 매기는 세금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강화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현재의 법규는 각각의 투자자를 과세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일본에 투자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자금을 모아 함께 투자를 할 때 지분이 5%가 넘지 않으면 세금을 지불하지 않고 투자를 회수할 수가 있다. 그러나 최근 제출된 개혁안은 전체 파트너쉽을 과세의 단위로 삼도록 하여, 참여한 모든 투자자들에게 자본이득세(capital gain tax)를 매기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의 현재 논쟁은 아쉽게도 구체제의 옹호 대 개방과 자유화의 구도로만 나타나, 노동자들에 미칠 영향이나 대안적인 개혁에 관한 목소리는 한국보다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논란은, 변화와 현실의 고수 사이에서 고민하는, 개방으로 활력을 불어넣더라도 국민경제를 무방비상태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일본 관료들의 고민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다.
***외국자본의 불만과 외곽 때리기**
일본 정부는 과세개혁안이 외국자본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탈세의 구멍을 메우는 노력이라 항변하지만 열받은 외국자본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에 대한 투자를 줄여 경제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고, FDI 누적액을 2배로 늘이겠다는 고이즈미 정부의 입장과도 배치되며 국제 자본시장에서 일본의 위치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할 처지가 된 카알라일이나 제이피모건 등은 공개편지를 통해, 이 조치는 심지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한 일본의 노력에도 해가 될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파이낸셜 타임스는 일본의 이러한 조치가 외국투자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고 3월 30일자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본 특집 바로 다음날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는 한국정부의 조치에 대해 국수주의적이며 미치광이짓이라는 비난기사를 실었는데, 한국의 조치는 국제기준에도 전혀 배치되지 않는 것이어서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원래 힘없고 위기로 한방 크게 먹은 나라라 한국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신경질적인 반응은 이해할 만도 하다. 미국의 금융자본들은 경제위기를 기회로 철옹성같았던 동아시아 경제에 쉽게 진출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들의 투기적 행태에 대한 우려와 섣부른 금융개방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이 학계와 정책결정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들에게서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 보수적인 금융언론이 민족주의적 변화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요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곽을 때리는 모습으로 보인다.
***일본경제는 어디로**
10여년이 넘게 지속된 장기불황 그리고 세계화 등을 배경으로 일본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유행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최근 떠들썩해지는 일본의 변화는 한참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주 외에, 종업원과 경영자 그리고 협력업체와 고객 나아가 사회까지 생각하는 일본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삐걱거리면서도 무척 천천히 변해갈 전망이다. 위계에 너무 익숙하고 좀처럼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이번의 사건도 몇 년 전 손정의의 소트프방크가 그랬듯 그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가능성도 크다.
후지테레비 인수전을 보도하며 한 텔레비전 방송은 “회사는 누구의 것”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특집을 내보냈는데 여론조사는 여전히 국민의 반 정도가 기업은 종업원의 것이며 고객 등이 주인이라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막 출근을 시작한, 군기가 바짝 든 신입사원들 대부분이 “회사는 고객의 것”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신선하기조차 했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생각은 일본사회에서는 여전히 도발적이며 선뜻 받아들여지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일본경제가 개방된 주주자본주의로 얼마나 빨리 달려갈지는 속내를 보이지 않는 일본인만큼이나 확실하지 않지만, 이제 개방과 외국자본의 부작용을 걱정하고 있는 한국과는 여러모로 비교가 되는 듯하다. 미국식으로 달려간 한국을 칭찬한 호리에 사장도, 외국자본의 압박으로 한국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고 막대한 차익을 남긴 이들의 투기적 행태에 대해 한국인들의 불만이 높아가고 있다는 것은 잘 모를 것이다. 변화를 너무 거부하고 기득권에 매달리는 태도가 일본의 문제라면, 한국의 문제는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나가버린 폭주는 아니었을까.
닛폰방송의 인수전에서 어느 편이 승리하든간에, 바야흐로 호리에가 촉발한 일본의 변화는 개방과 주주자본주의의 도입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어느 정도로 실정에 맞게 도입되어야 하는가에 관해 흥미로운 관전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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