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지하철 방화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삼 주가 지났다. 참사가 일어난 직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혼자 죽기 싫어서’ 불을 질렀다는 방화 동기가 을씨년스럽게 다가오더니, 조종실과 사령실 간의 뒤죽박죽된 교신 내용으로 드러난 담당자들의 무책임한 대응과 그것을 은폐하려고 했던 책임자들의 처신은 국민들에게 씁쓸함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유골을 찾느라 뒤늦게 쓰레기더미를 뒤진 일이라든지,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수출용에는 사용한 절연 지하철 시트를 내수용에는 사용하지 않은 사실, 사고 후 1주일 동안 폭파ㆍ방화 협박이 11건이나 되었다는 사실 등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도대체 이 땅에서 사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착잡할 뿐이다.
사실 언제부턴가 이런 참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일이 되었다. 승객 2백92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3년 위도 페리호 침몰 사고,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32명이 목숨을 잃은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백1명의 평범한 시민들이 졸지에 운명한 1995년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사고, 그 붕괴 장면과 붕괴 후 아수라장이 아직도 눈에 선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 적게는 수십여 명, 많게는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만 해도 9건이나 90년대에 일어났다.
대형 참사와 그 성격은 다르지만 국가 경제 시스템이 일순간에 붕괴한 97년의 외환 위기도 전 국민에게 정신적 공황과 큰 피해를 줬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대형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 탓인지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직후 여론 조사에서 국민의 87.6%는 “나도 언제나 (이런 사고를) 당할 수 있다.”라고 답했다. 대형 사고를 감수하는 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자격 조건이라고 국민 대다수가 인식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한다.
미국 출신의 정치학자로서 일본에서 활발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더글러스 러미스는 최근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녹색평론사)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빙하로 돌진하고 있는 타이타닉 호’에 비유하고 있다. 빙하에 부딪쳐 모두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방향을 틀지 못하는 타이타닉호와 그 배 안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승객들의 모양새. 이 비유는 산업사회 일반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일상화된 위험을 인지하면서도 결코 그것을 바꾸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과 특히 공명하는 바가 크다. 타이타닉 호의 승객들이 그 배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눈이 멀었던 것처럼,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과 경제 성장이 주는 달콤함에 중독되어 있다. 이렇게 얘길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번 지하철 방화 참사가 현대 과학기술이나 경제 성장에 대한 도취와는 무관한 문제라고 반발할지 모르겠다. 이번 사고는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도 사전에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다고. 발생했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한 때 정신 질환자로 알려졌던 용의자 김 아무개 씨는 장애인이 된 처지를 비관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인터넷에는 “정신 질환자나 장애인을 격리 수용해야 한다.”라는 끔찍한 말들이 많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것은 장애인에 대한 심한 사회적 편견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훨씬 더 따뜻한 사회였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것은 경제 성장의 열매가 사회복지 시스템의 구축과 같은 좀 더 평등한 사회에 기여하도록 사전에 노력하지 못했던 탓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실제로 사회복지 시스템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돌아가도록 구축되어 있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상대적으로 덜한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나라에서는 개인 총기 소지율이 아주 높음에도 불구하고 총기 강력 범죄의 비율은 미국과 같은 나라와 비교할 때 매우 적다.
기관사가 판단을 좀 더 잘했더라면, 조종실과 사령실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 되었더라면 사고가 커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바람일 뿐이다. 한 명의 기관사가 수백 명의 승객을 실은 지하철을 움직이면서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그가 극히 짧은 시간 내에 신속하고 명확한 판단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서 내수용에는 절연 시트를 사용하지 않은 사실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듯이 애초에 위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설계된 기술 시스템 속에서 의사소통이란 합리적이기보다는 기형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모든 일은 ‘국민의 정부’ 시절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공기업 경영 합리화’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경제 성장과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진행된 자본과 정부의 돈 놀음이 기술 시스템과 만날 때, 위험은 바로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지난 ‘국민의 정부’가 꼭 해야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던 일 중 하나는 바로 일상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대형 사고와 위험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사실 ‘문민정부’ 시절 일상화된 대형 참사와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국민들은 바로 이 ‘비정상적인 삶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새로운 정권을 선택했다. 이런 열망을 인지하지 못한 채 5년을 보낸 ‘국민의 정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가 발생한 것은 어쩌면 한국 사회에 대한 ‘역사의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1주일 후에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참여정부’는 과연 ‘돌진하는 타이타닉 호’의 방향을 돌릴 수 있을까? 한때 많은 젊은이들에게 정교한 논리와 날카로운 주장이 담긴 글로 영감을 줬던 늙은 논객은 참여정부의 개혁이 ‘쇳소리’가 안 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개혁에 ‘쇳소리’가 나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반갑게 다가가는 개혁은 없다. 누구에게는 ‘쇳소리’로 들리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피리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개혁은 어수룩하게 폼만 잡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개혁에 ‘쇳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할지 새로운 정부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자포자기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또 새 정부에게 우리는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 더 늦기 전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