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감정이 확산되면서 노무현의 약점이 사라졌다. 아니 도리어 약점이 강점이 되는 게 아니냐는 판단이 들 정도다. 반미감정 확산이 노무현 지지표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지, 우려된다."
이회창 캠프의 한 관계자가 5일 기자에게 한 말이다. 현재 이회창 캠프가 '반미' 확산에 얼마나 신경쓰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이회창 후보, 7일 촛불시위에 참여키로**
실제로 한나라당은 최근 각종 여론조사 결과, 수도권 지역에서 노무현 후보 지지율이 이회창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근원을 다름아닌 '반미'에서 찾고 있다.
이러다 보니 사정이 더없이 다급해졌다. 이회창 후보는 6일 민주당측에 "여야 총무가 즉각 만나 SOFA개정을 결의하자"고 제안했다. '반미'가 노무현 후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차단하자는 계산으로 해석된다. 이회창 후보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7일 저녁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예정된 대규모 촛불시위에 자신도 직접 참여하기로 했다. 파격적 결정이다. 이 후보측이 지금 '반미' 기류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해온 보수진영에서 보면 여간 헷갈리고 당혹스런 사태 진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회창 후보가 '반미'의 행렬에 동참하다니....아니나 다를까, 6일자 조선일보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이날 반미와 관련해 두 개의 글을 실었다. 하나는 <李·盧 '반미 문제' 見解 밝혀라>는 제목의 사설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근일 주필의 <한ㆍ미의 역지사지(易地思之)>이라는 기명칼럼이었다.
두 글은 한 가지 공통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현안은 반미문제다."(<李·盧 반미 문제'見解 밝혀라>의 첫 문장)
"한ㆍ미관계는 지금 반세기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한ㆍ미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첫 문장)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세력이 작금의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일보 사설, 무얼 밝히라는 것인가**
우선 <李·盧'반미 문제'見解 밝혀라>는 조선일보 사설부터 읽어보자.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현안은 반미(反美)문제다. 서울 세종로의 주한 미국대사관이 시위대에 둘러싸여 있고, 일부 한국단체 대표들이 미국 유엔본부와 백악관 앞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상황이다. 이처럼 번져가는 반미시위 앞에, 국민들은 '한국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대통령 후보들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 어차피 2주일 뒤 있을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든, 곧바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회창·노무현 후보 등은 반미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고 국민의 판단을 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여중생 사망사건 및 미군 무죄평결과 관련해 이·노 후보 등은 '부시 미국대통령 직접사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등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지한 해법이라기보다는 대중적 정서를 좇는 데 급급한 표명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호(號)의 진로'와 직결된 반미문제는 이렇게 다룰 사안이 아니다.
반세기 동안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의 근간을 이뤄온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가 백악관 앞에서 벌어지고, 반미에 공감하는 한국인이 급속히 늘고 있다. 어제 발표된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Pew) 리서치센터조사에서 '한국은 아시아에서 미국에 대한 비판의식이 가장 높은 나라'로 나타날 만큼 상황은 심각하다.
결국 반미문제 해결은 각 후보가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유권자들이 판단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후보들은 뜨거운 현안인 반미문제를 비켜가려 하기보다는, "우리에게 미국과 주한미군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원칙을 밝히고, 아울러 당선 후 반미문제를 풀어갈 구체적 실행방안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주요 후보들이'반미'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갖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다."
조선일보는 여기서 이회창 후보의 대응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중생 사망사건 및 미군 무죄평결과 관련해 이·노 후보 등은 '부시 미국대통령 직접사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등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지한 해법이라기보다는 대중적 정서를 좇는 데 급급한 표명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호(號)의 진로'와 직결된 반미문제는 이렇게 다룰 사안이 아니다."
'진지한 해법이라기보다는 대중적 정서를 좇는 데 급급한 표명'이라는 표현은 노 후보보다는 이 후보에 대한 비판이자 불만토로다. "노무현은 반미주의자"라는 게 조선일보의 일관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설은 이런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과연 이ㆍ노 후보에게 무엇을 주문하는지가 분명치 않다. "우리에게 미국과 주한미군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원칙을 밝히라는 게 고작이다. 이에 대해선 이미 이회창, 노무현 두 후보는 여러 차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런 두 후보에게 새삼스레 입장을 밝히고 필요하다면 '반미'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가지라는 엉뚱한 주문을 하니, 조선일보 스스로가 작금의 사태 진전에 대해 크게 당혹해하고 있음만 드러낼 뿐이었다.
또한 음모론적 시각에서 보면, '반미 토론'을 통해 이념적 차별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계산이 깔려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조선일보는 그동안 이번 대선이 '보-혁 대결' 구도로 진행돼야 하고 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사설을 통해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이날 사설은 조선일보의 '당혹' 자체를 드러내는 '횡설수설'에 불과했다.
***일제치하를 경험한 한국민의 '컴플렉스' 때문에 반미감정이 폭발했다?**
하지만 사설을 쓰는 논설위원들을 총괄지휘하는 자리에 있는 유근일 주필의 <한ㆍ미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기명칼럼을 보면 조선일보가 지금 어떤 상황인식을 하고 있는가가 극명히 드러난다.
유 주필은 칼럼을 통해 "한ㆍ미 관계는 지금 반세기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어 있다"며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푸는 길은 딱 한가지-한ㆍ미정부와 국민이 미국적 세계전략의 절실함과 한국적 민족정서의 절실함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단절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로 다시 잇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자의 위치에 있는 미국, 세계경영을 하는 자리에 서있는 미국이 먼저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돌이켜보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충분히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이다. 문제는 그러나 그 다음부터였다.
"미국은 아직도 전혀 깨치지 못한 결정적인 '맹점' 한 가지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바로 식민지 시대를 체험한 제3세계 사람들의 내면의 정서와 심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제3세계 국민들은, 지금은 일부를 빼놓고는 그래도 먹고살 만큼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지난 역사에 가위눌려 있고 그로 인한 아픔을 안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민족으로서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유린당한 식민지 시절의 역사적 체험에서 아직도 깨끗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식민지를 체험한 민족적 수난의 DNA는 50여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강대국에 의한 단 한 건(件)의 사건ㆍ사고에 의해서도 일시에 되살아나는 깊은 잠재의식으로 드리워져 있다. 미국은 세계전략을 추구하는 데 있어 제3세계 국민들의 이같은 심층정서를 항상 염두에 새기고서 후발(後發) 동맹국들을 상대해야 한다. 세계 어디를 가든, 그 나라 사람들이 뭐라 하든, 오로지 "미국법과 미국식대로만 하겠다"는 일방주의로는 무엇이 결코 잘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물질의 힘, 과학주의ㆍ계량화ㆍ객관주의를 뛰어넘는, 상대방의 마음과 심정과 역사적 체험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21세기 세계전략의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세계국가 역할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거추장스러운 부담을 지는 것 아니겠는가?"
유 주필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인들은 일제때 피식민지 경험을 했던 '컴플렉스'가 있으니 미국이 '거추장스럽더라도' 한국인들 심리를 읽고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것이다.
***어느 교수의 진단**
'식민지를 체험한 민족적 수난의 DNA'.
유 주필이 명명한 한국인 컴플렉스의 새 이름이다. 아울러 유 주필을 비롯한 조선일보 사람들이 매일 저녁 광화문 조선일보 사옥 건너편에서 펼쳐지는 촛불 추모제 등을 통해 폭발하고 있는 반미 감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적나라한 표현이기도 하다.
미국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단지 한국민의 컴플렉스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는 식이다. 따라서 세계국가 미국은 한국인들의 피해의식을 고려해 '거추장스럽더라도' 한국인들을 잘 다독거려 문제를 더이상 악화시키지 말라는 조언이자, 간절한 부탁이다.
과연 이번 사태가 조선일보 주장대로 50여년전 일제에게 강점 당했던 우리의 역사적 피해의식 때문인가. 좋다. 그렇다고 하자. 유 주필을 포함한 나이든 사람들에게 그런 피해의식이 있다 치자. 그러나 일제를 경험하지 않은 나어린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분노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DNA로 유전이 됐다는 말인가.
유 주필이 작금의 사태를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며칠 전 만난 한 대학교수는 작금의 사태를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부시정부 출범 이후 반미의식이 급속히 팽창해 왔다.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명하면서 남북대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동계올림픽 때에는 오노의 더티플레이로 젊은이를 포함한 온 국민을 분노케 했다. 또한 낡은 기종인 F15를 우리나라에 강매했다.
이러던 차에 나어린 두 여학생이 궤도차에 깔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자국병사들을 무죄로 평결한 뒤 한국에서 빼돌렸다. 그러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피해자 가족에게 2억원을 주었다, 추모비를 세워줬다, 잘못했다고 사과도 하지 않았느냐는 등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미국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아쳤다면 과연 미국민들은 가만 있었겠는가. 아마도 인종폭동이 일어나 한인타운의 교포들이 길거리에서 집단린치를 당하고, 총을 맞는 사태가 발생했을 것이다. 촛불을 들고 평화 추모집회를 갖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평화적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은 6월 월드컵과 붉은악마 응원을 통해 기성세대와 달리 강한 자부심과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됐다. 이들 세대에게 일방적 친미를 강요하는 일부 기성세대는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 정부와 메이저언론들이 요즘 젊은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일보 횡설수설의 근원은?**
대선을 눈앞에 둔 정치세력들은 이번 반미가 과연 어떤 정치적 파장을 몰고올지 득실을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이번 사태에 접근하려 한다면 그 집단은 자충수를 두는 정반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지난 주말 첫번째 촛불 추모제가 열렸을 때 한 정당이 집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추모제에 참여하면서 당의 깃발을 앞세우고 들고 왔다가 참석자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깃발을 당장 치우라"는 자발적 참여자들의 빗발친 비난 공세에 그 정당은 결국 깃발을 내리고 얼마 뒤 집회장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지난 6월 월드컵때와 비슷한 장면이었다. 당시 각당 대선후보들은 붉은악마 신드롬에 편승하고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응원전에 참여했다가 주위의 빈축을 사고 아무런 정치적 성과도 거둘 수 없었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미 기류는 어떤 집단이나 조직이 만들어내고 연출한 게 아니다. 자생적 분노의 폭발이며, 자생적 분노의 조직화다.
이런 상황에서 정파들이 득을 얻고자 하면 단 한가지 길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과 함께 똑같이 분노를 느끼고,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이번 사태를 대하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선일보가 보여준 횡설수설하는 모습은 '진심'이 결여됐기에 필연적으로 드러낸 자기한계이자, 자기모순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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