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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 근처엔 영국 여왕 조롱하는 거대 벽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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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영박물관 근처엔 영국 여왕 조롱하는 거대 벽화가?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14> 런던 지하철 여행기

오늘은 런던 시내 유람이다. 고대 로마 시대 론디니움(Londinium)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유서 깊은 도시 런던은 그 오랜 역사만큼 많은 이야기와 문화를 품고 있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는 철도를 기점으로 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큼, 런던의 모든 역사를 다 담지 못하고 철도가 놓인 시기 이후의 런던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빅토리아 시대, 과학기술이 꽃망울을 피우고 자본주의가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던 시기의 런던은 온갖 매혹적인 일들이 발생하던 도시였다.

나는 2008년 4월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다. 런던에서의 공식 일정은 3개였다.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ITF)을 방문해 영국 및 유럽 철도의 정책과 노동자들의 대응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이 첫 번째였다. 영국 최대의 운수해운노조인 RMT를 방문해 영국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영국 시민들과 철도 노동자들이 겪었던 일들을 취재하는 것이 두 번째였다. 마지막 일정은 민영화로 혼란을 겪었다가 재국유화된 영국 철도 시설 공단인 네트워크레일과의 면담을 통해 영국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향후 계획들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2박 3일간의 체류 기간에 비하면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었음에도 짬을 내서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런던의 인물들이 즐겨 찾았던 장소들이라면 만나고 싶은 곳들이 차고 넘친다. 다윈의 비밀 노트도 보고 싶고, 애덤 스미스의 손을 감추는 마술도 보고 싶다. 아서 코난 도일이 만들어낸 셜록 홈즈의 채취를 느끼고도 싶었고 찰스 디킨스가 걸었던 런던의 뒷골목이나 조지 오웰이 노숙했던 벤치에 앉아 낮잠도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를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방대한 해석을 내놓은 카를 마르크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아직도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지 헛갈리는 사회인 듯해서 약간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나는 한때 마르크스의 정신적 소작농이었다. 20대 청년 시절,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술이나 종교 같은 것들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을 즈음, 운명처럼 만난 마르크스는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었다. 당시 왜 세상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세상은 구원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할 정도의 배포와 주량은 갖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교훈, 공공성 강화

마르크스가 연 철학과 경제학, 역사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농지의 한 귀퉁이를 얻어 밭을 갈면서 거장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여러 갈래에서 땀 흘렸던 것은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회주의란 명패를 걸었던 나라들이 대부분 몰락하고 그나마 남은 이상한 공동체가 사회주의를 칭하면서 조롱당하는 오늘이다. 마르크스는 더 이상 세상을 위협하는 불순한 것으로 취급당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보다 더 무서운 알 카에다나 북한의 핵 위협,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 지구 온난화 같은 것들이 더 피부에 가까이 닿아있다. 한국에서의 실질적 위험은 문자로 날아온 근로 계약 해지 통보서나 폭등한 전세값, 임박한 수능시험을 앞둔 상태에서의 형편없는 모의고사 성적표 같은 것들이다.

▲ 런던 지하철역 입구. 공공 지하철이라고 적혀있다. ⓒ박흥수
그러나 세계로 눈을 돌려 보면, 곳곳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 폐해들로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마르크스는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유렵의 여러 나라와 미국의 대학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강좌에 사람들이 몰리고 저작들이 다시 연구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부활이라고까지 말한다. 무한 경쟁에 지친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다양한 모색의 출발지가 마르크스가 된 것은 그 만큼 자본주의에 대해서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해 낸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비인간성과 무지막지함을 완화하거나 극복하는 일차적 대안으로 무엇이 제시되나? 바로 공공성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에 쓰나미처럼 훑고 갔던 사회적 대안이 경쟁 체제와 민영화였다면, 1대 99의 피로 사회에서 사람들을 살릴 방법은 사회 영역 전반의 공적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자본주의의 근간인 사회적 생산과 사적인 소유의 불일치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힐 거라는 마르크스의 말이 예언처럼 들어맞은 현실에서, 현재의 문제를 보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생산에 맞는 사회적 소유 형태의 확대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회적 소유 형태의 확대란 공공 부분의 강화를 말한다. 특히 사람들의 생활에 꼭 필요한 교육, 의료, 물, 전기, 가스, 철도 같은 산업들은 민간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성공한 소수와 실패한 다수를 분리하고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하는 현재의 사회는 연료 탱크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사막횡단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 그나마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라도 공공성의 확대와 강화가 절실하다.

영국 지하철 요금과 '야메 택시 요금'

2008년 4월 13일 영국 방문팀 4명은 장거리 비행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했던 기내 과식 전략 덕분에 호빵맨 얼굴로 런던 히드로 공항에 발을 디뎠다. 입국 심사대와 세관 검사대를 통과한 뒤 입국장 로비로 나갔다. A4 용지에 우리 일행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들고 있는 남자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히드로 공항까지 연결되어 있는 한 시간쯤 걸리는 런던 지하철 튜브를 타도 되고, 공항에서 15분 만에 시내에 도착할 수 있는 논스톱 급행 열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물론 버스와 택시를 이용해도 된다.

▲ 런던 지하철 유리칸마다 부정 승차시 80파운드, 13만원이 넘는 벌금을 부과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박흥수

우리 일행은 장기 여행을 위한 중대형 캐리어들을 갖고 있었고 몸도 장거리 비행으로 지치리라고 예상했기에 한국에서 출발하면서 공항 픽업 차량을 예약했다. 픽업 차량은 공식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 차량인데 일종의 '야메' 영업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법은 아니고 당국으로 부터의 영업 승인을 얻어야 한다. 완전한 합법적 영업도 아니고 불법도 아닌 반합법적 운송수단인 공항 픽업 자가용 영업 차량을 몰고 우리 일행을 맞은 사람은 폴란드에서 넘어온 이주 노동 기사였다. 무거운 짐과 몇 번의 환승과 처음 도착한 역에서 유명하지 않은 호텔을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에, 4인이 치러야할 높은 런던의 대중교통 요금에 비하면 주소를 확인하고 정확히 호텔 앞에 내려줄 수 있는 '야메 택시'는 꽤 유용한 대안이었다. 공항에서 러시아워에 걸린 도로를 통해 한 시간 넘겨 목적지에 도착한 후 지불한 비용은 팁까지 포함해서 34파운드였는데, 우리 돈으로 7만 원이 안 되는 돈이었다. 만약 택시를 이용했다면 두 배가 훨씬 넘는 돈을 내야했고 지하철을 이용했더라도 4명분을 합치면 별 차이가 없을 액수였다.

폴란드에서 온 반합법 픽업 택시 운전기사는 생계를 책임지는 소중한 애마가 자신의 차라고 했다. 해치백 스타일의 중고 승용차 한 대를 가족 몇 사람이 돈을 모아 샀고, 자신들처럼 차를 산 이민자들이 모여 만든 작은 영업 조합에 가입해 배차를 받는다고 했다. 영어가 서툴러서 미안하다고 하는 기사를 보면서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땀을 뻘뻘 흘렸던 홍세화 선생을 생각하면서 곧 좋아질 테니 걱정 말라는 위로를 해주었다. 폴란드 기사는 6년 전 도저히 먹고 살기 힘들어서 영국으로 왔고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동생을 부르고, 동생도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돈을 더 모으면 막내 동생마저 데려와 영국에서 대학 공부를 시키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땐 1960~70년대 공장에 다니면서 동생들의 학비를 책임졌던 수많은 한국의 형과 누나들이 생각났다. 영국으로 너무 많은 동구권과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몰려들어서 영국에서도 일자리를 얻기 힘들고, 이민 자체가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영국인들로부터도 질시와 차별을 받는 일이 많아져 폴란드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부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토로할 때는 그의 작은 어깨가 더욱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우리는 폴란드의 술이 얼마나 센지, 2002 월드컵에서 폴란드가 한국에 졌을 때 느꼈던 고통 같은 것들을 들으면서 목적지인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애초에 편도만 예약 했었는데 런던을 떠날 때도 이 폴란드 기사의 차를 이용하기로 하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방법은 한 번의 일감이라도 더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리 포터가 어린 시절 살았던 것 같던 모양의 집들이 이어진 동네 한 귀퉁이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내려준 기사는 환한 웃음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런던에 도착한 다음날 오전 ITF(국제운수노련) 본부에서의 미팅을 마친 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늦은 오후에 잡힌 약속 시간 사이에 계획했던 마르크스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목적지는 런던 시내 외곽에 자리 잡은 하이게이트 공원이었다. 이곳 공동묘지에는 마르크스의 무덤이 있다. 런던 지하철 튜브의 지도에 검은색으로 표시된 노던 라인에 하이게이트 역이 있다. 빨간색 차체에 몸을 싣고 튜브 속을 달렸다. 하이게이트 역에 도착한 일행이 막 개찰구를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야! 너희들!!"

우리 일행이 뒤를 돌아보니 하이게이트 역의 역무원이었다.

"너희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가지?"
"응!"
"그럼 한 정거장 다시 돌아가서 아크웨이 역에서 내려. 그게 훨씬 가깝고 돈도 아끼게 돼."
"왜 그런 거지?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라서 하이게이트역으로 왔는데?"

"런던 지하철은 구간별로 요금이 달라. 근데 이 전역까지는 1구역 요금이고 여기 하이게이트 역부터는 2구간 역이거든. 비싼 요금 더 낼 필요 없잖아. 그리고 마르크스 묘지 까지는 아크웨이 역에서 가는 게 편하다고. 아크웨이 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만 더 가서 내린 뒤 걸어가면 공동묘지 입구에 다다를 수 있어. 그리고 지하철 표를 보여주면 버스는 무료라고."
"오우. 그래? 정말 고맙구나. 근데 우리가 마르크스 묘지에 간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런던 변두리에 있는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오는 아시아 여행객들이 가는 곳이라면 뻔하다구! 너네 한국인들이지? 한 눈에 알아 봤다고."
"대단한데! 사실은 우리들도 너 같은 철도 노동자야! 오늘 겪은 일은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줄게. 멋진 서비스였어!"

"오우 그래? 직업이 같은 친구들이로군. 남은 런던에서의 여행 잘해!"
"응 정말 고마워!!"
"천만에!"

하이게이트 지하철역 역무원 덕분에 우리는 한 정거장을 되돌아 와서 아크웨이 역에서 버스를 탔다. 그 유명한 런던의 빨간색 2층 버스를 타게 돼서 신기한 나머지 무조건 2층으로 뛰어 올라 갔는데 500미터도 안 되는 한 정거장 여행이라 바로 내려와야 했다.

▲ 아크웨이 역에서 하이게이트 묘지로 향하는 2층 버스. ⓒ박흥수

마르크스 묘지와 대영박물관 가다

두 번째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를 찾은 것은 2012년 6월이었다. 런던 철도 운영사 협회와의 미팅을 하루 앞두고 잠시 시간을 내서 홀로 튜브에 몸을 실었다. 옛 경험을 되살려 1구역의 끝 역인 아크웨이 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을 갔다. 그러나 4년 전에 왔던 곳과 다른 곳에서 내린 덕에 뜨거운 6월의 햇살 아래 사람들에 물어물어 하이게이트 묘지를 찾았고 셔츠의 등짝에 땀이 제법 베일 즈음에 낯익은 묘지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발견했다.

▲ 하이게이트 묘지로 항햐는 길의 꽃집. 길을 물어보니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박흥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는 동서의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서쪽 구역은 특정한 시기나 시간에만 공개하고 동쪽 구역만 개방하고 있다. 묘지 정문의 매표소에서 서쪽 구역의 이집트 풍 석조물로 만들어진 입구를 볼 수 있는데, 입구 뒤로 울창한 숲 속에 빅토리아 시대풍의 묘지들이 이어져 있었다. 묘지의 서쪽 구역은 뱀파이어나 드라큘라의 촬영 장소로 쓰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전형적인 서양식 묘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 1970년대에는 뱀파이어들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도 한다. 동쪽 묘지는 비석과 놓인 꽃들이 없으면 한가 한 공원이라고 느낄 정도로 산책하는 사람들의 가벼운 발걸음과 대화 소리 안에 머물고 있었다.

4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다시 찾아간 마르크스의 묘비 앞에는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둘러보고 있었다. 벨라루스에서 온 젊은 대학생이 못 찾고 있던 1892년에 죽은 여성 운동가 로즈의 무덤을 매표소에서 산 안내서의 지도를 참고로 해서 찾아준 뒤, 드디어 마르크스의 무덤 앞에 섰다. "Workers of All lands, unite!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묘비명 위에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을 보고 있는 왕년의 정신적 지주에게 예의를 표했다. 멀리 마르크스를 만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신 주디스 할머니와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짧은 우정을 나누었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는 삼림욕을 즐기며 명상을 하기에 딱 좋은 휴양림처럼 편안하고 예쁜 공간이다. 담벼락 넘어 하이게이트 공원에서는 웃옷을 벗어 버린 사내가 일광욕을 하고 있고, 개를 데리고 나온 이가 열심히 원반을 던져 개를 뛰게 하고 있었다. 푸근한 무덤에 나의 친구가 평안히 잠들어 있기를 바라면서 묘지를 나왔다.

▲ 하이게이트 묘지의 마르크스 무덤. ⓒ박흥수

다시 튜브를 타고 이번에는 런던 시내로 노선을 잡았다. 다음 목적지는 대영 박물관. 영국의 자랑이며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 중의 하나인 대영박물관은 그 오래된 역사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곳이다. 마르크스가 이 대영박물관에서 자본론을 비롯한 많은 저작들을 집필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시내로 향하는 튜브 안에서는 지하철에 암약하는 가수가 영화 <원스>의 주제가 '폴링 슬로우리(Falling slowly)'를 멋들어지게 기타 반주를 곁들여 불러주었다.

튜브가 굉음을 내면서 시 외곽에서 시내로 달릴 수 있었던 것은 1900년대 초에 런던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시 외곽에 거주지가 확장되면서 지하철도 따라서 확장된 탓이다. 노동 계급의 원활한 이동은 생산성과 직결되어 있다. 1925년에 왓퍼드(Watford), 에머샴(Amersham), 억스브리지(Uxbridge) 노선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늘어나는 런던의 지하철도 폭증하는 인구 집중을 따라 잡지 못했다.

부자들은 언제나 가난의 원인이 개인이 게을러서라고 이야기하지만 1930년대의 런던의 대다수 빈민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하길 원했다. 1936년 영국의 북동부 도시 재로에서 노동자들이 런던까지 도보 행진을 했다. '재로 기아 행진'이라고 부르는 이 비참한 행렬은 실업자의 자식들이 굶어 죽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든 막아보자는 몸부림이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영국 빈민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동으로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빈부 격차에 따른 끔찍한 현실이 존재했다. 그러나 영국에는 혁명으로의 진전을 막는 몇 가지 중요한 걸림돌이 있었다. 조지 오웰에 따르면 피시 앤 칩스, 인조견 스타킹, 연어 통조림, 저렴한 초콜릿, 영화, 라디오, 진한 홍차와 축구 도박이 혁명을 막았다. 볼셰비키가 런던으로 와서 당면한 혁명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해도 한 눈 팔 게 많은 런던 시민들에 스며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차르 왕정의 폭압을 잊게 해줄 수 있는 별다른 엔터테인먼트가 없었던 러시아 민중들과 달리 런던의 민중들을 혁명적으로 고양시키려면 일단 축구 경기부터 중단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드디어 대영박물관에 들어섰다. 고대 그리스 신전의 모습을 한 대영박물관은 1759년 개관한 이후로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 세계 곳곳에서 약탈한 문화재들로 채워진 박물관의 전시물은 우리 인류사의 전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대영박물관의 최고 좋은 점은 입장료가 무료라는 사실이다. 비슷한 규모나 내용을 갖고 있는 다른 나라들 박물관들의 입장료가 상당한 것에 비하면 공짜로 인류의 문화 유산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항상 돈에 쪼들려 '절친'인 엥겔스에게 돈을 붙여 달라고 징징댔던 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을 제집 드나들 듯 했던 이유도 무료입장 때문이었지 않았을까? 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의 방대한 도서와 자료들을 공짜로 이용할 수 없었으면 <자본>과 같은 위대한 저작이 탄생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영국 대영박물관에 떡하니 자리잡은 여왕 조롱 그림

폐관 시간에 맞춰 대영박물관을 나와 한 블록을 지난 뒤 길을 건너는데 신호등 맞은편에 있는 벽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을 조롱하는 거대한 그림이 벽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림 한 편에는 "God save the people!(신이여 민중을 구하소서!)"고 쓰여 있었다! 영국의 국가 제목이 "God save the Qeen!(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인데 국가를 패러디해서 쓴 문구였다. 꺾인 벽을 타고 이어진 그림에는 비틀즈 멤버가 복면을 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수많은 전 세계 관광객들과 영국 시민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림 앞을 지나고 있었지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대영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여왕을 조롱하는 벽화. ⓒ박흥수

▲ 여왕을 조롱하는 벽화 옆에 이에 저항하듯 복면을 한 비틀즈가 있다. ⓒ박흥수

만약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근처의 담벼락에 국가 원수와 애국가를 조롱하는 대형 그림이 그려졌다면 보수 신문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이 1면 머리기사와 사설, 칼럼, 독자 투고 등을 통해서 거품을 물고 반역의 무리들을 소탕해야 한다고 나설 것이다. 국정원이나 검찰에서 특별 수사본부를 설치할지도 모르고 한동안 모든 이슈는 감히 국가 원수와 애국가를 모독한 반국가적 사범에 대한 규탄 모드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공중파 방송 뉴스 메인 앵커들의 비장한 멘트들이 안 봐도 비디오처럼 상상된다. 중립적이거나 진보적인 매체들조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아니냐는 논조로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된 사건을 슬쩍 피해갈 것이다.

한국 사회가 많이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아직 그 길은 한 참 멀리 남아있지 않나 싶다. 마음 놓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헌법에 박제된 죽은 권리여서 누구든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침해할 수 있다면 이 사회는 침묵이 지배하는 무서운 사회가 된다.

▲ G20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렸던 한 대학 강사는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벌금형)을 받았다. ⓒ트위터

지하철 민영화하려던 영국 정부, 꼼수 부려봤지만…

다시 런던 지하철 이야기로 돌아가자. 런던 지하철은 공영 지하철이다. 당연히 적자이다. 출근 시간에는 런던 지하철을 이용해 시내로 들어오려면 많은 고통이 따른다. 때문에 런던 지하철은 수요 분산을 위해 시차제 요금을 적용한다. 당연히 러시아워 때의 요금이 비싸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통근 열차 운영회사도 특정 시간 때의 열차요금을 올려 열차 이용률을 줄이려고 한다. 철도의 교통 분담률을 높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철도 이용을 억제시켜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해있다. 이런 불편함과 적자는 종종 민영화 추진의 근거로 악용된다.

런던 우민화의 한 예로 언급되는 게 1996년 4월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젊은 토니 블레어의 런던 지하철 정책이었다. 2000년 런던 시장에 당선된 리빙스턴은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중앙 정부와 대결해야 했다. 토니 블레어와 리빙스턴은 같은 노동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시장에 당선된 뒤에 리빙스턴은 런던 지하철을 확고한 공공 모델로 만드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노동당 출신이면서도 우회전을 주로 했다는 비판을 받는 토니 블레어 총리는 런던 지하철을 민영화하고자 했다.

영국 철도의 민영화에 큰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런던 시민들이 환영할 만한 정책이 아니었다. 중앙 정부는 한 발짝 물러서 공영-민영이 혼합된 지하철 체제를 도입하자고 나섰다. 공공성과 효율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인데, 한국의 국토교통부가 수서발 KTX 경쟁 체제 도입을 밀어붙이면서 내놓은 수사도 공공성과 효율성의 조화였다. 다행스럽게도 붉은색 튜브 열차는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민들의 민영화 반대 지지 속에 아직도 민간회사가 아닌 런던시의 공공 지하철로 운영된다. 한국 철도도 국토부의 수서발 KTX 경쟁 도입 정책이 철회되는 천만 다행한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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