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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영국 '피쉬 앤 칩스'를 대중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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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영국 '피쉬 앤 칩스'를 대중화하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13> 철도가 새로 만들어낸 것들

세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교가 있다. 그중에는 낯설고 신기한 종교도 적지 않다. 톰 크루즈 같은 유명 배우가 외계인을 숭배하는 싸이언톨로지 교도였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현대에는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만큼 숭상받는 것도 있다. 그 중에 가장 최고 경지에 오른 것은 돈이 아닐까? 돈, 곧 자본을 숭상하는 시대인 이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어쩌면 모든 종교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진짜 종교일지도 모른다. 조계사나 명동성당, 순복음교회를 노숙자나 거지의 행색으로 찾아간다면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만약 석가모니나 예수가 온다 해도 최소한 중저가 브랜드는 입어야 사람들의 눈 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본주의교가 더 높은 이상으로 기존의 종교를 뛰어넘는 최고의 종교로 정체를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런 일이 현실화되고 새로운 경전이 쓰인다면 그 1장 1절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구절일 것이다.

"태초에 철도가 있었다."

피쉬 앤 칩스의 탄생

증기기관차로 철도 세상을 연 조지 스티븐슨의 이야기가 시작된 이후로 이 연재는 영국 땅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철도를 이용해 영국에서 들러야 할 곳들이 많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철도를 통해서 열린 자본주의 태초의 모습을 근대 영국만큼 잘 보여주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중세를 벗어나 봉건제의 경계를 막 뛰어넘어 도착한 새로운 시대. 근대라고 일컫는, 정형화된 자본주의를 드라마 세트장의 미니어처처럼 보여주는 시기가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르는 19세기 영국이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영국 노동자의 현실을 노예에 비교했다. 단,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것이 고대 노예와 다를 뿐이었다. 이른바 임금 노예로 불리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을 목격하면서 마르크스는 그의 방대한 저작들을 집필한다. 마르크스는 근대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와 인신의 구속을 강제당하지 않는 인격적 자유를 얻었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현실에서 자본가에게 예속되지 않고는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비록 근로 계약으로 양 당사자가 서명을 하는 근대적 계약 관계이지만, 탈출을 방지하는 사슬이 종이와 잉크로 대체되었음을 의미했다.

▲ 석탄 광산의 소년 노동자들. 9살짜리까지 돈을 벌기위해 탄갱으로 들어가야 했다. ⓒ구글

아직 허리 둘레가 30인치 남짓했던 20대의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으면서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을 임금 노예로 표현했던 것은 상징적 수사로 생각했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따라 고대 노예제에서 중세 봉건제를 거쳐 정착된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인 자본가-임금 노동자의 관계에서 노동자의 생활 조건은 노예와는 질적으로 다르리라는 상식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1800년대 산업화 시기 영국 노동자들의 현실을 담은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마르크스가 말한 임금 노예란 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닌 끔찍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세기 영국 노동자의 생활 수준과 환경은 지금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소말리아나 르완다 등 아프리카의 빈국과 다를 바 없었다. 찰스 디킨스나 그 후대 작가인 조지 오웰이 묘사하는 가난한 이들의 생활은 지금이라면 당장이라도 국제구호단체의 긴급 지원 대상이 될 정도로 처참했다.

벌집 같은 구조의 주변 환경과 비위생적인 상하수도, 굶주림이 일상화된 시간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씩 일해야 했다. 오늘날 서방 세계가 아프리카 내전에 내몰린 소년병들을 걱정하지만, 불과 150여 년 전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아이들의 상당수는 총 대신 공장의 작업 도구를 들고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일해야 하는 산업 전사였다. 특히 부실한 음식은 영양 상태를 악화시켰고 몸의 저항력을 떨어뜨려 노동력을 상실시키거나 심할 경우 목숨까지 위협했다. 1800년대 중반 영국 노동자들의 음식은 밀가루 죽에 삶은 감자를 적당히 으깨거나 튀긴 것이 전부였다. 반 고흐가 1885년 네덜란드의 농촌에서 그린 그림에도 낡은 접시 위에 올려 진 감자를 앞에 놓고 흐린 램프 불빛 아래 농부의 가족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퀭한 얼굴 모습과 주전자로 데운 차와 찐 감자가 전부인 식탁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매일 똑같은 메뉴에 이골이 나있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그들이 받는 돈으로는 총리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근처의 화려한 음식점에서 제공되는 요리를 먹는 건 불가능했다.

▲ 19세기 런던 뒷골목 사람들의 모습.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굶주림과 빈곤으로 고통받았다. ⓒ구글

철도가 개통된 후 가장 큰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은 어쩌면 철도 이용자가 아니라 감자에 질린 영국 노동자들이었다. 섬나라인 영국 근해에서 잡힌 생선들이 철도 덕분에 상하기 전에 도시로 공급될 수 있었다. 생선 값은 철도의 운행 노선과 횟수가 많아질수록 떨어졌다. 퇴근길의 노동자들이 몰리는 식당가 중 어느 한 집이 싼 값에 시장에서 생선을 사다가 새로운 요리를 내놓았다. 이 식당은 가장 일반적인 메뉴에 튀긴 생선을 추가한 뒤 "피쉬 앤 칩스"라는 주재료만을 담은 이름으로 신 메뉴를 선보였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노동자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졌고 식당 주인은 밤이 늦도록 새로 탄생한 메뉴를 만들어 냈다. 음식점 여기저기서 혜성처럼 등장한 피쉬 앤 칩스를 메뉴 항목의 가장 앞부분에 올려놨고, 이는 영국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다.

런던에서는 1860년 조세프 말린(Joseph Malin)이라는 사람이 첫 피쉬 앤 칩스 음식점을 개장했다고 하지만, 1937년에 발간된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도 피쉬앤 칩스가 언급되고 1838년에 나온 찰스 디킨스의 명작 <올리버 트위스트>에도 튀긴 생선요리를 하는 집이 나온다. 따라서 아마도 훨씬 전에 런던의 작은 규모의 식당들이 피쉬 앤 칩스를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피쉬 앤 칩스의 등장으로 영국의 노동자들은 불포화 지방산과 비타민, 무기질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이 영양소들은 산업혁명 한 가운데에 있던 사람들의 건강과 이들을 통해 돈을 버는 자본가의 주머니를 챙겨줬다.

▲ 런던 시내 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쉬 앤 칩스. ⓒ박흥수

시민을 살린 런던 지하철

철도는 이제 대영제국의 심장인 런던을 바꿔놓을 차례였다. 그런데 철도는 런던의 초입에서 막혀 버렸다. 런던의 땅값은 철도회사가 이제껏 지불했던 철도 부지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또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과 마차들로 가득차서 공사를 벌이기가 만만치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습지나 계곡에 선로를 놓는 것과 인파로 가득 찬 도심 한복판에 철도 공사를 벌이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럼에도 점점 확장된 런던 외곽의 거주민들은 시내로 좀 더 편하게 이동하길 원했고 대안은 철도밖에 없었다. 런던 시의원 찰스 피어슨은 대담한 아이디어를 냈다. 런던의 지상에 철도를 놓을 수 없다면 땅굴을 파자는 주장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등장한다. 지금이야 대도시의 지하철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19세기 중반에 지하에 굴을 파 철도를 이용한다는 것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1863년 3월 런던 지하철이 개통된다. 패딩턴에서 패링턴 스트리트까지 6.4킬로미터의 지하세계가 열렸다. 증기기관차로 운행된 최초의 지하철은 땅속 어둠을 밝히기 위해 기관차의 전조등과 터널 내 조명으로 가스등을 사용했다. 지하철이 무난하게 런던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지하수가 터져 침수되기도 했고 지하철 건설로 건물이 손상되거나 지반이 무너졌다는 항의가 빗발쳐 적지 않은 돈을 배상금으로 지급해야 했다. 그럼에도 철도가 가져다 준 편의성은 지하 세계를 더 확장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문화권을 비롯해 대부분의 나라에서 지하철을 서브웨이(SUBWAY)라고 부르고 역의 표시는 메트로를 뜻하는 M자를 쓰고 있다. 그러나 런던을 여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면 지하철을 타기 위해 서브웨이 위치를 물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영국에서 서브웨이는 말 그대로 지하길이다. 영국에서 서브웨이를 찾으면 아마도 지하차도 같은 곳을 가르쳐 줄 것이다. 영국은 지하철을 언더그라운드(UNDER GROUND)라고 하고 표시는 U를 써서 한다. 이 언더그라운드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런던의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은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 1890년의 런던 지하철 ⓒ구글

지하철 공사는 일반적으로 땅을 판 뒤 선로와 역사를 짓고 이들을 지탱하는 터널의 골격을 만든 다음에 다시 땅을 덮는 '컷 앤 커버'라는 공법으로 진행되었다. 서울 지하철의 상당 구간도 같은 방식으로 건설됐다. 그러나 이 방식은 공사 기간 동안 지상의 교통을 전적으로 방해하거나 상당 부분 침해하는 것이어서 건설 기간동안 많은 불편을 초래하고 강바닥 아래와 같은 곳은 시공이 불가능했다. 런던 지하철 공사가 부딪힌 커다란 난관 중의 하나가 런던 시내를 가로지르는 템스강을 횡단하는 일이었다. 이 때 도입된 토목 기술이 터널링 실드 공법이었다. 터널링 실드 공법은 지표면에서부터 땅을 파내는 것이 아니라 두더지가 땅을 파듯 굴을 계속 파 들어가는 방식이다. 과거 공상 과학 만화 영화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는데, 거대한 블레이드가 달린 기구가 회전하면서 터널을 뚫는 방식이다. 이 공법은 건설비가 많이 들고 터널 크기가 기구의 회전 블레이드 지름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지상에 지장을 주지 않는 장점은 복잡한 런던 같은 도시에서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게다가 강 밑을 횡단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안도 없었다.

런던 지하철은 튜브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데 런던 지하철의 승강장에 서 있으면 왜 튜브라고 부르는지 쉽게 알 수있다. 터널링 쉴드 공법은 터널의 모양을 둥글게 하고 시공상의 문제로 열차가 달릴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을 확보하는데, 런던 지하철에서 열차가 막 진입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치약 튜브에서 치약이 짜지듯이 터널 속에서 지하철이 나온다. 이제 런던, 그리고 영국은 땅 위와 지하에서 철도가 지배하는 왕국이 되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에서 빛나는 토목 공사는 상하수도와 지하철이며, 이 두 공사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사람들은 런던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런던은 포화 상태가 되었다. 런던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먹고 난 뒤 싸버린 배설물들은 템스 강으로 흘러들었는데 이 템스 강의 물을 민영 상수도 회사들이 런던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 치약이 짜여 나오듯이 터널 속에서 다오는 런던 지하철 튜브. ⓒ박흥수

민영 상수도 회사들은 런던 시민들에게 식수만 공급한 게 아니라 콜레라균도 함께 제공했다. 이 결과 1849년 런던 시민 1만4000명이 콜레라로 죽었다. 1854년에도 1만 명이 죽었고 1866년엔 6000명이 죽었다. 채드윅이 1842년에 <노동계층의 위생 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지하 하수관 공사 건설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런던은 콜레라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런던 시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맥주를 마셨는데 콜레라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서 알콜에 몸을 맡긴 셈이다. 영국에서의 맥주는 철도와 같이 증기기관으로 확산됐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대형 양조 장치가 만들어지면서 맥주가 대중화되었다. 대량 생산 체제로 변한 맥주는 아무리 무게가 나가도 운반할 수 있는 철도와 만나 사방으로 퍼졌다. 인구가 많은 런던에서는 양조장들이 증기기관에 들어가는 석탄을 아끼지 않고 맥주를 만들어 돈을 벌 수 있었다. 맥주가 애용됐던 이유는 가격이 저렴한 탓도 있었지만 마음 놓고 식수를 먹을 수 없던 상황에서 열 처리 과정을 거친 맥주가 위생상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온 가족이 둘러앉아 피쉬 앤 칩스 접시를 앞에 놓고 맥주로 건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웃음부터 나온다. 세 살짜리 아기가 한 모금 마시고 딸꾹거리지는 않았는지.

상하수도 건설이 완료된 덕분에 런던 시민들의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은 공사의 효과를 바로 얻은 셈인데, 런던 지하철은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시민들을 구하게 된다. 지하철이 런던 시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을 때는 수십 년 뒤 독일 공군이 날아올 때였다. 런던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시민들은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뛰어들었다. 런던의 밤하늘에 서치 라이트가 춤을 추고 그 사이로 독일 공군의 도르니에 17, 융커스 88, 하인켈 111 폭격기가 아랫배를 열고 폭탄을 퍼부었다. 2차 대전 시의 폭격으로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런던 시민 2만9890명이 사망했다. 런던 지하철은 런던 시민들을 품은 어머니였다. 1940년 9월 말 17만7000명이 지하철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지하철로 숨어든 시민들은 잠만 잔 게 아니었다. 폭탄이 만들어내는 섬광과 굉음 속에서 사람들은 생과 사의 여러 갈래 길 중 하나에 있다고 느꼈고, 이런 감정은 등화관제의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공습을 피해 지하철로 대피한 런던 시민들. ⓒ구글
A. N 윌슨은 자신의 책 <런던의 짧은 역사>에서 공습 당시의 지하철 분위기를 말해준다.

"지하철은 폭탄을 피하는 대피소 이상 가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런더너들이 한 데 단결하는 곳이었고, 다른 사람과 침대를 같이 쓰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곳이었으며, 자궁의 신비로운 어둠 그 자체이기까지 했다. … 성적인 감정이 고조되었다. 낯선 이들과 사랑을 나눴다."

역사가 A. L 로우즈는 등화관제 동안에 우연히 만난 남성과 구십 평생에서 유일한 성 경험을 했다고 한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고 느끼던 시기 매일 아침 맞이하는 태양은 사람들의 정신을 고양시켰다. 150년 역사의 런던 지하철은 거대한 토목 지하 구조물이 아니라 런던 사람들의 삶이 배어있는 문화적 자산이다. 비싼 요금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에도 런던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낯선 방에서 하룻밤, 철도가 호텔을 확산시키다

철도가 부설되고 성장한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호텔이었다. 이른 아침 출발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역 앞의 호텔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고, 늦은 밤 도착하는 낯선 방문객들에게 흐린 가스등 조명으로 안내해 쉴 곳을 제공하는 것도 호텔이었다. 기껏해야 한 대에 8명에서 12명에 이르는 마차 여행객을 상대로 숙박업이 커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열차가 한 번 도착해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방문객을 쏟아내자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업이 절실해졌다. 철도가 놓이기 전에는 귀족들이 저택을 단기 임대해 가족들과 하인들을 묵게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방문 지역의 아는 사람 집에 신세를 져야했다.

철도가 만들어낸 대량 수송의 문화는 이 문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요구했다. 이제 귀족들도 철도를 이용하게 됐고 호텔 문화에 적응했다. 굳이 하인을 부르지 않고 일정 기간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됐다. 계급적 지위에 따라 탑승해야 했던 열차처럼 호텔도 똑같이 급이 매겨졌다. 3등이나 4등칸 객차를 이용한 여행자는 3급이나, 4급의 숙박시설로 향했고, 2등이나 1등칸을 이용한 사람들은 그에 맞는 고급 호텔을 찾았다. 호텔업이 성장하면서 최고급 호텔들이 화려하게 등장하는데 사치품으로 도배를 한 사보이 호텔에 이어 19세기가 막 끝나는 해에 세자르 리츠가 칼튼 호텔을 개장했다. 한국의 수많은 해외 여행자들이 호텔에서의 숙박을 자연스럽게 여기듯. 철도 시대의 호텔은 여행 과정에 당연하게 포함되는 일부분이 되었다. 이제 호텔비만 있다면 아는 사람이 없는 도시에서도 걱정 없이 머물 수 있게 되었다.

▲ 빅토리아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런던의 리츠 호텔.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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