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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기근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던 영국 위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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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기근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던 영국 위정자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11> 아일랜드 기근, 영국을 철도의 나라로 만들다

1830년 9월 15일 리버풀-맨체스터 간 철도가 개통된 이후 영국에서 제일 많이 언급된 단어는 아마도 철도가 아니었을까. 철도는 영국 전역을 실타래처럼 둘러 감았다. 1854년 말, 의회가 승인한 선로의 전체 길이는 2만2499킬로미터였다. 승인받은 노선 전체에 철도가 깔리진 않았지만 현재 한국 철도 노선의 6배가 넘는 실로 엄청난 길이였다. 이렇게 철도가 붐을 이루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철도가 이제까지 그 어떤 교통수단도 이룩해내지 못했던 속도 혁명을 가져다 준 효용성이 철도를 늘리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사회 경제적 조건들이 철도의 건설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제부터 하나씩 그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철도를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길을 뚫고 닦는 일부터 선로를 놓는 모든 과정이 그 어떤 일보다도 고달픈 노동을 필요로 했다. 현대적인 토목 장비를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의 철도 공사에는 다른 공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노동력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거대 장치 산업인 철도는 더 많은 집단적 노동력이 필요했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는 사람들이 철도 부설 공사에 선뜻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철도공사는 먹고 살 곳이 없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영국의 초기 철도 공사에는 아일랜드에서 온 사람들이 공사의 주역이 되었다.

▲ 1830년 대 후반 많은 노동자가 동원된 차량기지 공사 현장. 대기근을 피해온 아일랜드인들이 투입됐다. ⓒ구글

아일랜드에 퍼진 대기근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던 영국

1840년대 중반 아일랜드에서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감자마름병이 발생한다. 아일랜드에 끔찍한 대기근이 번져 곳곳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감자마름병은 유럽 전역에서 퍼졌지만, 대기근의 피해가 유독 아일랜드에서 심각했던 이유는 아일랜드인에게 감자가 절대적인 주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식이라 해도 심각한 병충해로 타격을 입을 경우 다른 대체 작물로 연명하면 최소한의 삶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는 대체 작물이 없었다. 아일랜드인들이 대체 작물을 심지 않아서가 아니라 밀과 옥수수 등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작물들의 대부분을 영국 출신 지주들이 본토로 가져다 팔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기근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아일랜드 소작인들의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았던 지주들은 그나마 재배되었던 감자들을 소작료로 강탈해가기도 했다. 아일랜드는 지배자였던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인 영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은 아일랜드 기근이 "신의 뜻을 거스른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도움을 외면했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나 한국의 일부 목사들이 자연재해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반인륜적 행위들은 역사적 사례를 쫒아 가면 뿌리가 깊다.

아일랜드인들은 스스로를 한의 민족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민족적 정서의 유사성을 따지면 한국과 아일랜드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일치율이 높을 것이다. 아일랜드는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끊임없는 외침을 겪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도 아일랜드 공화국군과 영국의 폭력적 대치가 이어졌었다. 아일랜드는 세계의 이목을 끄는 분쟁 지역이었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이렇게 아일랜드와 영국의 불협화음은 오랜 역사적 관계에서 비롯되었지만, 특히 카톨릭을 둘러싼 종교 대립과 대기근을 정점으로 한 비극의 역사에서 극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이라고 부르는 영국과 잉글랜드는 어떻게 다른가? 잉글랜드가 곧 영국인 것처럼 인식하고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말은 아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축구리그는 영국 프로 축구리그의 하나일 뿐이다. 영국을 말할 때 잉글랜드를 혼돈해서 사용하듯이 잉글랜드 프리미어 축구리그가 영국 축구 자체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축구도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그 사회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가로지르는 리피 강변에 세워진 대기근을 형상화한 조각. ⓒ구글

현재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가 합쳐진 나라다. 이들 지역들은 과거에는 각각 분리된 나라였지만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북아일랜드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아일랜드의 북쪽의 일부는 아일랜드 땅이면서 아일랜드가 아닌 영국이라는 나라를 선택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일랜드의 과거는 어떤 모습이었나? 기원전 1세기에 켈트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아일랜드에 살았다. 켈트족 이전에도 아일랜드에 사람이 살았지만 기원전쯤으로 역사를 거스를 정도면 켈트족을 아일랜드의 원주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아일랜드에 정복자가 나타난 것은 12세기였다. 북대서양 연안을 주름잡았던 앵글로-노르만 족이 잉글랜드에서 넘어와 아일랜드를 침략하고 더블린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원주민인 켈트족과 잉글랜드 침략자들은 같은 가톨릭교도들이었고 사는 지역도 달랐기 때문에 큰 갈등을 겪진 않았다. 그러나 영국에서 근대국가의 문을 연 튜더 왕조가 아일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자, 여러 문제가 돌출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원주민이라 여기는 켈트인, 구 잉글랜드인과 새로 들어온 신 잉글랜드인의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 잉글랜드인이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부터 넘어온 이들로 더블린뿐 아니라 아일랜드 전역으로 진출했다. 특히 분쟁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북아일랜드에 이들 외부인들이 터를 잡게 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폭력의 씨앗이 심어졌다.

기존 원주민과 아일랜드에 들어온 신 잉글랜드인은 종교 문제로 가장 크게 대립했다. 아니 어찌 보면 성경과 유일신을 숭상하는 동일 종교이니 종파 문제로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식민지 침탈 시절 서구 세계는 종파 간 대립을 만들어 식민지 침략에 대한 저항을 내부의 갈등으로 전화시키는 방식으로 식민지를 다스렸다. 피비린내 나는 르완다 내전을 비롯한 수많은 아프리카의 비극도 식민지 모국의 통치 방식에서 비롯한 결과다. 벨기에는 인구의 15%에 불과한 투치족을 점령자의 대리인으로 내세우고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 위에 군림시켰다. 르완다가 벨기에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후 이 투치족과 후투족은 피의 복수를 반복하면서 백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양산했다. 서구 열강들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 아프리카와 그곳 사람들이 파괴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익만을 챙겨갔다. 이런 방식은 영국이 아일랜드를 침략할 때 이미 예행 연습한 학습 효과의 결과이다. 이렇게 종족과 종파를 분리해 서로를 원수로 만드는 방식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을 조장한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을 비롯해 여러 지배자들의 통치 방식으로 전화한다. 한국에서는 지역감정을 조장해 쏠쏠한 정치적 이득을 얻는 남한의 정치 세력들과 남북 갈등으로 자신들의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는 남과 북의 강경 보수파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이 항상 민족 전체의 운명보다 중요한 듯한 행태를 지속하고 있다.

종교개혁을 거쳐 신교를 받아들인 신 잉글랜드인에게 가톨릭을 믿는 구 잉글랜드인들을 비롯한 아일랜드 원주민은 미신을 숭배하는 이교도에 불과했다. 또한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으로 부를 획득하고 아일랜드에 자리를 잡은 신 잉글랜드인은 영국의 간섭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미국의 독립전쟁이었다. 아일랜드에 정착한 신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은 복잡함 그 자체였다. 아일랜드인이지만 아일랜드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교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아일랜드 원주민으로부터는 침략자 내지는 본토인으로 취급당했다. 스스로는 아일랜드의 진정한 주인이라 생각하며 영국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했고, 영국 본토로부터는 식민지 취급을 당하면서 독립을 원하는 집단으로 간주되는 묘한 정체성을 가진 만큼 이들은 아일랜드를 복잡한 이해관계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아일랜드가 대영제국을 이루는 식민지 모국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성을 갖고 있는 애증의 관계가 아일랜드를 둘러싼 문제의 발원지였다.

이슬람 테러리스트? '순교 항쟁'의 뿌리는 고대 서구

1846년 영국의회는 최초의 철도 사고로 목숨을 잃은 허스키슨 의원이 실현하려 했던 정책인 곡물법 폐지안을 통과시켜 수입 농산물에 대한 관세 부과를 철회했는데, 이 때문에 아일랜드의 기근은 더욱 심해진다. '신의 심판을 받아 굻어 죽어야 했던' 사람이 100만 명이 넘었고 또 이에 육박하는 숫자의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앞서 밝혔듯이 영국인들이 신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아일랜드 인의 85%를 차지하는 가톨릭교도들이 신의 심판을 받으면서 가슴에 품은 것은 본토인들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 부자들에 구걸하는 기근에 빠진 아일랜드인. ⓒ구글

아일랜드인 가톨릭교도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불법으로 처벌받았다. 종교에 대한 억압은 언제나 그렇듯이 순교를 각오한 항쟁을 불러온다. 성전에서 죽어도 참전한 자들이 믿는 신에 의해서 기꺼이 천국으로 인도될 것이 분명하기에 확신에 찬 투사들이 생겨난다. 지금 서구 사람들은 이슬람권에서 벌어지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편협한 세계관과 열등한 종교관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목숨을 건 순교 항쟁의 뿌리는 고대 로마부터 서구에 있었다. 종교 분쟁의 밑바닥에는 경제적 착취가 교묘히 똬리를 틀고 있기에 경제적 박탈감과 종교적 신념의 시너지 효과는 강력한 투쟁의 에너지원이 된다.

아일랜드에서 불법화된 가톨릭교도들의 독립 움직임이 거세지자 영국의 웰링턴 총리가 재임 중에 가톨릭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웰링턴 총리가 아일랜드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그런 게 아니라 계속 가톨릭을 불법화할 경우 독립 투쟁으로 전화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아일랜드와의 내전을 치루기보다는 가톨릭을 합법화해서 아일랜드를 영국연방의 통치 체제 아래 묶어 두는 게 훨씬 이롭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그러나 가톨릭이 합법화되자 아일랜드의 구교도들이 더욱 단결하게 되었고 영국 본토의 정치적 반대자들과 전통적으로 아일랜드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신교들은 웰링턴 총리의 가톨릭 합법화 정책을 비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몰아치자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들과 성공회는 주님의 심판이 임하였다며 아일랜드의 비극을 외면한 것이다.

기근이 시작된 서부 아일랜드의 마을이며 길가에 굶어 죽은 시체들이 쌓여가는 와중에도 동부의 벨파스트 항에서는 아일랜드에서 수확한 곡물을 싣고 영국으로 향하는 배들이 줄을 이었다. 아일랜드인에게 보내는 구호 식량을 실은 배 한 척은 벨파스트 항에서 아일랜드산 곡물을 싣고 떠나는 수십 척의 배와 마주쳐야만 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살기 위해 세계 곳곳으로 향하는 이민선을 탄다. 이민선을 탄 사람들은 그나마 뱃삯을 낼 수 있는 형편의 사람들이었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은 1992년작 헐리웃 영화 <파 앤드 어웨이>도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배를 탄 사람들 모두가 이 영화에서처럼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한 것은 아니었다. 약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민선을 탔는데 이중에 60%가 배안에서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육지를 밟은 사람들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몸으로 부실한 식사와 오염된 물을 마시며 오랜 항해를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항해자라는 이름의 네비게이터라고 불렀다. 켄로치 감독이 영국의 철도 민영화를 고발하는 내용으로 만든 2001년 영화 <네비게이터>는 암울한 아일랜드 출신 철도 노동자들의 역사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 대기근을 피해 아일랜드 퀸스타운항을 떠나는 이민자들. ⓒ구글

아일랜드의 기근, 영국 철도를 살 찌우다

아일랜드인들의 상당수는 살기 위해 가까운 영국 본토로도 많이 몰려왔다. 아무 연고가 없는 아일랜드인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일자리는 때마침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던 철도 현장이었다.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여섯 명에서 여덟 명이 한 조가 되어 긴 레일 토막 좌우에 붙어서 연결된 줄을 어깨에 메고 날라야 했다. 저임금에 살인적인 노동, 공사 현장의 감독관들이 휘두르는 채찍 아래서 아일랜드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은 끔찍하고 비루한 삶을 이어나갔다. 아일랜드의 기근 덕에, 아니 '하나님의 심판' 덕에 영국 철도는 쭉쭉 뻗어 나갔다.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전역에 돈 감자마름병은 다른 대체 작물의 값을 올려놓았고 덕분에 말들의 사료 값도 폭등했다. 사람들도 먹을 것이 없는 판국에 말을 위한 사료 값이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곳곳에서 말들도 굶어 죽었다. 마부 들은 오늘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리터당 휘발유 값이 가장 싼 주유소를 찾는 운전자처럼 말의 사료를 싸게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마차의 무게를 줄여 말이 더 오래 달릴 수 있는 방안도 강구되었다. 에너지와 경제 위기 시대에 연비가 뛰어난 경차의 판매가 늘어나듯이 연비가 아닌 사료비가 뛰어난 마차를 만들기 위해 호화로운 장식을 없애거나 무게가 많이 나가는 재료를 가벼운 것으로 대체했다.

곡물가의 변동에 따라 말의 주인이나 마부들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당연히 마차의 운임도 계속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도의 등장은 더 이상 말의 사료 값에 좌우 되지 않는 안정적인 운송수단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 철도가 마차 수요를 흡수하는 만큼 곡물 가격이 안정되었고 사람들은 대흉작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 과거와 현재, 폐기된 마차 뒤로 열차가 달리고 있다. ⓒ영국국립철도 박물관

철도는 왜 마차보다 각광받았나

철도가 각광을 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철도 여행이 주는 쾌적함도 한몫했다. 장거리 마차 여행은 여행객들이 몸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정도로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힘든 과정이었다. 유럽의 관광지나 청계천을 둘러보는 여유로운 마차를 생각한다면 큰 오산 이다. 게다가 마차여행객은 늘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무일푼이 된 사람들은 마차 노선 곳곳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산적이 되어 나타났다.

워낙 많은 범죄로 마차는 역에 도착하기까지 좀처럼 쉬지 않고 달렸으며 무장 경호원을 반드시 동행했다. 때로는 무장 경호원이 산적과 한 패가 되거나 아예 마부가 산적들과 내통해서 여행객들을 산적들에게 인도하는 일도 벌어졌다. 무장 경호원은 마부의 옆에 타거나 마차의 뒤에 타서 산적들의 습격에 대비했는데 산적과의 전투로 적지 않은 경호원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일상적인 범죄 이외에도 비만 오면 바퀴가 진창에 빠져서 모든 승객들이 내려야 했고,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성인 남성들이 마차를 진창에서 빼내야했다. 언덕길에서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내려서 걸어야 하는 일도 자주 겪어야 했다. 또한 중간에 도착하는 역마다 마부의 추가 요금 요구에 시달려야 했고 역마차 역 주변의 숙박업소나 식당의 바가지요금도 감수해야 했다. 장거리 여행객들은 부자 또는 그들의 하인이거나 장거리 여행을 가야만 하는 급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떡하든 여정 전체를 통해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털려고 했다.

당시의 마차 여행이 어땠는지 생생히 알 수 있는 증언을 들어보자.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의 등장인물은 역마차에서 내려 진창길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 걷기 운동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말들이 질퍽이는 언덕길에서 마구를 메고 마차까지 끄는 것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벌써 세 번씩이나 걸음을 멈춘 상황이었고, 게다가 한번은 블랙히스로 돌아가겠다고 반항하며 마차를 끌고 길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마부와 경비원은 힘을 모아, '어떤 짐승에겐 이성이 있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면 동물이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하라'라는 병법서의 가르침대로 고삐와 채찍으로 말들을 다스렸다. 그러자 말들은 굴복하고 본분을 되찾았다.

말들이 고개를 처박고 꼬리를 부르르 떨면서, 관절이 산산조각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간간이 버둥거리고 휘청거리며 질퍽한 진창길로 걸음을 내딛었다. 마부가 쉬게 하려고 '워워!' 고함을 치며 말들을 세울 때마다, 마부석 가까이의 대장 말이 도저히 마차를 언덕 위까지 끌고 갈 수 없겠다는 듯 유난히 단호한 태도로 머리와 갈기털을 격렬하게 털어댔다. 말이 이렇게 요란을 떨 때마다, 한 승객은 예민해서 그런지 흠칫 놀라며 심란해졌다."

진창길 같이 끔찍한 길이 아니더라도 마차 여행은 여행자도 마부도 말도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소진되는 말의 체력을 느낄 수 있는 여행객들은 도덕적 미안함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 위로 속도를 저하시키지 말라는 마부의 채찍이 내리칠 때 마다 말의 순진한 눈망울 가득 서리는 원망을 보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증언을 계속 들어보자.

"도버행 역마차의 분위기는 늘 그렇듯이 정감이 넘쳐서, 경비원은 승객들을 의심하고 승객들은 경비원을, 그리고 서로를 의심했다. 모두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의심했고, 마부는 말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당시의 역마차가 얼마나 많은 노상강도들의 목표물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도버로 가는 역마차는 프랑스로 넘어가거나 돌아오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노선이어서 여행자금이나 다른 부소득을 올릴 수 있는 좋은 습격 대상이었을 것이다.

마차 여행을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원인은 객실 환경이었다. 디킨스 경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자.

"축축하고 더러운 짚이 깔려있는, 곰팡이 핀 마차 내부는 역겨운 냄새가 났고 어두컴컴해서 커다란 개집 같았다. 털 코트와 축 처진 모자 차림의, 진흙 묻은 다리로 지푸라기 더미에서 몸을 떨며 나오는 우리의 승객 역시 커다란 개 같았다."

이제 더 이상 마차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철도가 운행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열광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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