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김 씨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던 아들(당시 26세)에게 현대차에서 일해보라고 권했다. 아버지 말대로 아들은 2011년 울산 공장 사내 하청 업체에 취직했다. 정규직에는 지원할 수 없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8년 동안 정규직 신규 채용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해 8월 개정 파견법 시행을 앞두고, 현대차는 사내 하청 대신 직접 고용 단기 계약직인 '촉탁직' 노동자 1400여 명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개정 파견법은 사내 하청 노동자가 단 하루라도 불법 파견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당시 노동계는 촉탁직 채용이 '불법 파견' 소지를 피하기 위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는 "사내 하청에 있는 것보다 촉탁직으로 가면 정규직이 되기 쉽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들도 촉탁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김 씨는 그런 아들이 내심 기특했다.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라"고 독려도 했다. 아들이 촉탁직으로 전환됐을 때 그는 "2년만 지나면 모든 게 잘되리라고" 믿었다.
믿음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깨졌다. 지난 4월, 아들은 아무 예고 없이 "그날 저녁 그냥 문자로 계약 해지"됐다.
김 씨와 같이 사는 아들은 최근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부자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 날이 많아졌다. 김 씨는 "아들이 아예 현대차 얘기도 못 꺼내게 한다"며 "부자 관계가 부자연스러워졌다"고 침통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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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정규직, 아들은 촉탁직
현대차 촉탁직으로 입사했다가 지난 4월 계약 해지된 박준범(가명·29) 씨도 아버지가 현대차 34년차 정규직 노동자다.
박 씨는 지난해 12월 친구를 따라 울산 공장 촉탁직으로 들어갔다. 친구가 다니던 현대차 하청 업체에서 "촉탁직은 직영(정규직)과 똑같은 조건이니, 2년 동안 성실히 잘하면 직영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해서"다. 하청 업체에서 일한 지 2년이 안 됐던 친구가 먼저 촉탁직으로 갔다. 현대차에 "아버지도 있고 해서" 박 씨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촉탁직으로 입사했다.
박 씨가 들어간 자리는 '정년퇴직자'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처럼 "정규직이 산재를 당하거나 휴가를 쓰거나 정년퇴직해 결원이 생긴 자리"에 촉탁직이 들어간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대신 그는 "촉탁직의 90%는 사내 하청 (노동자가 일했던) 자리에 들어간다"고 했다. 현대차가 '불법 파견'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정규직 노동자와 섞여 일하던 하청 노동자를 하청 노동자만 있는 공정으로 전환 배치하고 남은 자리들이었다.
▲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생산 라인 ⓒ연합뉴스 |
촉탁직 노동자의 급여는 정규직 1년차와 똑같았다. 잔업과 특근을 하면 월급이 200만-250만 원씩 나왔고, 두 달에 한 번씩 보너스 100만 원이 나왔다. 옷도 명찰도 정규직과 똑같았다. 대신 박 씨는 '1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서를 썼다. 그 점이 꺼림칙했지만 막연히 '계약이 연장되겠거니' 하고 넘겨짚었다.
예상대로 일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박 씨는 계속 일했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가 계약서를 새로 쓰자고 하지도 않았다. 회사에서는 "별 얘기 없으면 자동 연장인 줄 알고 있어라. 하던 업무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내 하청 업체 출신인 촉탁직 동료가 하나둘씩 계약 해지되기 시작했다. 현대차 사내 하청 업체에서 일한 기간과 촉탁직으로 일한 기간을 합쳐 2년이 다가오는 사람들이었다. 사내 하청 업체에서 1년 6개월 일하고, 촉탁직으로 5개월 일한 박 씨의 친구 또한 계약 해지됐다.
4월 어느 날, 박 씨마저 근무하다 말고 사무실에 불려가 "사직서 쓰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로 끝이었다. 작업반장은 박 씨의 자리에 "신입 정규직이 들어온다"고 귀띔했다. 그는 "나처럼 (사내 하청 노동자 자리가 아닌) 정규직 자리로 들어간 (촉탁직) 친구들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많이 잘렸다"고 말했다.
"잘리고 안 잘리고는 운인 것 같아요. 일 잘하고 못하고 여부와는 상관없이. 신규 채용한 300명만큼 촉탁직 300명 자르고, 부족하면 또 새로운 촉탁직을 넣겠죠. 한 번 촉탁직에서 잘린 사람들은 다시 촉탁직으로 안 뽑거든요. 자동차 회사는 '너 말고도 지원자 많다'는 거예요."
▲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결집한 현대차 울산 공장. "품질은 우리의 자존심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현대차 공장에서는 사내 하청, 촉탁 계약직, 정규직이 함께 섞여 일한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촉탁직 아들 "이렇게 잘릴 줄 알았으면 아예 시작도 안 했다"
처음엔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계약 해지된 지 일주일도 안 지나서 부고가 들렸다. 현대차 촉탁직 노동자가 계약 해지 석 달 만에 목을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같이 일했던 직영 형들한테 괜찮으냐고 연락이 왔어요." (관련 기사 :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 석 달 만에 목매고 자살)
박 씨는 "다른 지역에 있는 집도 정리하고 아내와 헤어져 울산으로 왔다"며 "일한 지 6개월도 안 돼 잘릴 줄 알았으면 아예 시작도 안 했다"고 후회했다.
"그래도 2년만 버티고 혹시 비정규직(사내 하청 불법 파견) 문제가 해결되면, 촉탁직 내에서 나도 직영 전환할 때 유리하지 않을까 했어요. (정규직이 되는 데) 불이익이 갈까봐 휴가도 안 쓰고 일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자동차는 포기했습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한창 꿈을 키워 가는데 애초에 (촉탁직이 아니라) '한시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고 했으면, 억울한 사람도 없고 나처럼 타지에서 오는 사람도 없고 죽는 사람도 안 나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관심도 잠시뿐이었다. 박 씨는 "촉탁직 제도가 이래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내고 촉탁직을 챙겨주는 정규직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작업하는 데 거치적거리지만 않으면 남이 출근을 하든지 안 하든지 신경도 안 쓰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며 "(정규직들은) 일주일만 지나면 누가 죽었는지도 기억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조합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안 해봤느냐는 질문에 그는 "노조 가입할 여건도 안 되고 하니, 노조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규직 아버지 "대책 없이 촉탁직 도입 합의한 노조가 원망스러워"
김봉근 씨는 "촉탁 계약직이 불법 파견 은폐 수단인 줄 알면서도 아무런 대책 없이 합의해준 (정규직 노동조합) 집행부가 아주 나쁘다"며 "촉탁직을 도입한다고 노사 합의할 당시 이들을 보호해줄 문구 하나라도 넣었으면 사람이 목숨까지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분노했다.
"최근에 고인이 된 촉탁직 부모도 (정규직) 반장으로 수십 년 성실하게 근무하다가 퇴직했거든요. 자식이 그렇게 되니까 그 아버지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정규직) 노동조합이 아무 대책 없이 합의해주니까 회사에서 마음대로 칼처럼 자른 거 아닙니까? 촉탁 계약직이 지금도 계속 일하고 있는데, 완전히 소모품 취급당하고 있잖아요. 이건 어떻게 방패막이 돼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김 씨는 최근 '촉탁직 자녀를 둔 현대자동차 정규직 부모 모임'을 만들었다. 100명이 넘는 정규직 아버지들이 모였다. 그는 "우리(부모 모임)끼리 임원진 10명을 뽑아서 (노조) 지부장 면담 요청까지 했는데도 소식이 없다"고 비판했다.
김 씨의 비판에 대해 권오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대외협력실장은 "지부장도 매일 업무가 있는데 4만5000명 조합원을 일일이 만나주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지부장이 조합원들이 요구하는 면담을 받아주지 않은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촉탁직 전반에 대해서도 권 실장은 "정규직 가운데 자기 아들이 촉탁 계약직인 분들이 있는데, 회사도 사전에 기간제로 계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고 (당사자도) 그런 것을 알고 들어온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 씨는 "현대차가 불법 파견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올해 300명을 추가로 신규 채용했는데, 지부가 사내 하청 업체 사람들을 우선 신규 채용하도록 합의했다"며 "촉탁직은 정규직 원서를 낼 자격조차 없고, (현대차에) 취업하려면 촉탁직 아니면 사내 하청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대차 촉탁직도 노동조합 가입할 수 있을까? 현대차 촉탁직 노동자들은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조합원으로 가입해 고용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현대차지부(정규직 노조) 규정을 보면 현대차 입사와 동시에 노조 조합원이 된다고 명시돼 있다"며 "정규직 노조가 촉탁직도 노조 조합원이라고 선언하고, 노조의 단체협약을 적용받도록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정책위원은 "특히 현대차지부는 올해 과장·부장급까지 조합원 범위를 확대하자는 단협 요구안을 내기로 했는데, 노조 가입 범위를 위로는 확대하면서 아래로는 확대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촉탁직을 조합원으로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권오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대외협력실장은 "(촉탁직도) 조합원이면 고용을 보장해야 하는데, 촉탁직까지 고용 보장을 다 하면 고용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난다"며 "촉탁직이 대신 일하던 자리에 원래 정규직이 돌아오면 그 정규직은 어디로 가느냐"고 반문했다. 권 실장은 "회사가 예전에는 '한시 하청'을 사용했는데, 파견법이 바뀌면서 사내 하청을 사용하지 못하자 직접 (촉탁직을) 한시적으로 고용한 것"이라며 "그 대신 지부는 촉탁 계약직 사용 사유를 '정규직이 산재, 휴직, 해외 출장, 정년퇴직, 노조 간부 전임자로 나가는 경우' 등으로 제한하게끔 회사와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 관계자 또한 "촉탁직도 일한 지 2년이 넘으면 얼마든지 정규직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임시로 비는 자리를 몇 개월 채워넣는 부분까지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내 하청 노동자였다가 촉탁직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이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계약 해지되는 이유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정규직 전환 부담과 관련이 있다"며 "그렇지 않으면(2년 이내에 계약 해지하지 않으면) 법정 공방이 오가고, (현대차가) 불법 파견이 아니라고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반대로 말하면 그 대신 (촉탁직은) 최대 2년까지 고용이 보장되고, 대우도 정규직에 준하는 대우"라고 덧붙였다. 한편, 촉탁직의 규모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정규직이 출장, 산재, 병가, 휴가 등을 간 자리에 '직영 계약직'(촉탁직)이 연간 2000명이 필요하다"면서도 "하지만 지금까지 고용한 촉탁직의 규모나 계약 해지 규모는 파악이 안 되고 있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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