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를 공식으로 선언한 6일, 얼마 전 협상이 타결된 한미 FTA의 효과가 '반짝' 빛을 발했다.
협상 개시 선언에 나선 'FTA 전도사'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한미 FTA 협상 타결로 자신감이 붙은 탓인지, 기자들 앞에 나서길 극도로 꺼리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최초로' 기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받는 여유를 보였다.
기자들의 수준도 높아졌다. 지난해 2월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듯 한미 FTA 협상이 갑자기 개시됐을 때는 'FTA가 무슨 영어단어의 약자인지'를 묻던 기자들이 이제는 '한-EU FTA에는 ISD(투자자-국가 소송제)가 들어가느냐'고 묻는 수준이 됐다. 한미 FTA의 '학습' 효과다.
"反美는 몰라도 反유럽은 없지 않느냐"
시민사회단체들의 반응은 차분하다 못해 썰렁하다. 철야농성, 단식투쟁, 행정소송, 헌법소원 등 한미 FTA 협상 개시 전후로 수많은 단체들이 급박하게 움직였던 것과는 달리, '물 사유화 저지 사회공공성 강화 공동행동'만이 한-EU FTA 협상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을 뿐이다.
한미 FTA 하나에 대응하는 것도 벅찬데, 연이어 나온 대형 FTA를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탓이다. 게다가 한미 FTA라는 '독한 예방주사'를 이미 맞아둔 상태가 아니던가.
이는 '한-EU FTA는 한미 FTA보다 훨씬 부드러운 FTA 아니겠냐'는 느긋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투자자-국가 소송제(ISD)가 협정문에서 빠질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서비스·투자 분야의 개방 방식도 개방 대상을 일일이 나열하는 포지티브 방식에 따른다. FTA의 아킬레스건인 농업의 경우도, 한국과 EU가 상호 민감성을 고려해 공격 수위를 낮추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우세하다.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맞춘 협상 마감시한도 없다.
한-EU FTA 협상의 김한수 한국 측 수석대표는 "한-EU FTA 협상에서는 적어도 반미 감정에 기초한 이념적 반대는 없지 않겠느냐"면서 "반(反)유럽이란 말은 없으니까…"라는 뼈 있는 농담까지 던졌다. 시민단체들이 힘을 못 쓸 것이라는 예견이다.
한-EU FTA는 지극히 '미국적'인 FTA
그러나 한-EU FTA는 대한민국에 있어 '큰 사건'이다. 한미 FTA에서 '통상 깡패국가 미국'이란 특수한 요소만 빠졌다 뿐이지, 한-EU FTA에도 FTA의 본질, 그동안 사람들이 '미국식 FTA'의 요소라 불렀던 것들이 그대로 살아 있다.
상품에 매기는 관세를 낮추고, 서비스·투자 분야의 개방 수준을 높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첨병'임을 자부하는 EU 집행위원회는 이 부분에서도 파상공세를 펼 것으로 예상된다.)
FTA의 본질은 '투자자가 돈을 버는 데 거치적거리는' 한 나라의 법과 제도를 '투자자가 돈을 버는 데 적합한 상태로' 뜯어고치는 데 있다. 이는 '비(非)관세장벽들(NTBs)의 철폐'란 어려운 통상용어로도 표현되고, '법·제도의 투명성 강화'라는 표현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미국과 EU가 한결같이 '지적재산권(IPR)의 강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런데, 공평하게 협상 양쪽의 법과 제도를 뜯어고치자는 것도 아니다. EU 측은 협상 개시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한-EU FTA가, 한미 FTA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만'의 법과 제도를 겨냥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김현종 본부장은 여기에 '발끈'하기는커녕 "우리 법과 제도의 선진화 계기"라고 맞장구 쳤다.
'동시다발적인 FTA'를 추구하는 노무현 정부와 김현종 본부장에게 능동적인 의미의 '국가발전 전략'이란 없다. 오직 'FTA는 다다익선'이고 '이들 FTA가 우리 경제를 어떻게든 먹여 살려 줄 것'이라는 '신앙'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한-EU FTA는 '한미 FTA 정국'을 'FTA들의 정국'으로 바꾸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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