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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둑 앞에선 작은 도둑마저 고맙다"?

[한미FTA 뜯어보기 526 : 기고] 한국의 FTA 전략, 종합 재검토 필요(上)

이미 체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FTA라는 점에는 이견이 별로 없을 것이다.

'미래의 최혜국대우(Future MFN Treatment)'라는 조항이 들어갔다는 흉흉한 소문은 이 특별한 조약을 더욱 특수한 것으로 만든다. 이 조항은 한국이 추가적으로 체결할 FTA에 한미 FTA보다 더 유리한 조항이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이 조항이 미국에도 적용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조항 그대로라면 미국과 한국 양측에 중립적인 조항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유럽연합(EU), 중국과 같은 거대 경제권과 연속해서 FTA 협상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 보면 한미 FTA는 그대로 두어도 '자체적인 진화'를 하는 셈이다. 즉, 미국 입장에서 한미 FTA는 언제나 최상의 조건으로 업데이트되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미국 측은 원래 협상을 시작할 때부터 한미 FTA를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 플러스 알파'로 만들겠다고 했다. 한미 FTA는 여러 가지 점에서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와 맺은 나프타에 비해 더 나아간 셈이다.

한미 FTA보다 더 나빠질 것이 있느냐?

이 상황을 EU나 중국의 눈으로 살펴보자. 투자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놓은 한미 FTA는 협상에서 '베이스라인'이라고 부르는 기준점이 된다. 한미 FTA라는 조건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EU와 중국이 바라보는 한국 시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EU와의 FTA의 경우, 워낙 'EU형 FTA'와 '미국형 FTA'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경우 전문가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협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미 미국과 가혹하고도 처절한 협상 결과를 받아놓은 상태에서, EU형 FTA의 내용과 EU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더 나빠질 것이 있느냐"라고 하면 사실 그렇기는 하다.

EU 집행위원회는 개별 회원국의 위임을 받아 한국과의 FTA 협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개별 회원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소위 '비관세무역장벽(NTBs, Non-Tariff Barriers)'은 자연스레 협상 의제에서 빠지게 된다.

이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집요할 정도로 요구해 온 비상식적인 일들, 우리나라를 '국가 정책 제로'의 상태로 만들어 놓을 일들, 가령 스크린쿼터의 축소,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 대기환경 정책의 포기 등과 같은 요구가 구조적으로 협상 의제로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국가와 기업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아직 미국도 그 제도의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EU 측은 아예 의제에서 빼놓았다.

'큰 도둑을 만나고 나니 작은 도둑을 만나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는 심정이 아마 우리가 EU와의 FTA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상황일 것이다.
▲ 지난해 11월 정부가 개최한 '한-EU FTA 공청회' 행사장 앞에서 농민단체 관계자들이 공청회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산업을 중국에 넘기고, 우리는 금융국가로?

중국과의 FTA는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아직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어떤 방식으로 FTA를 국가 발전전략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뭔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보여준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범위와 파괴력을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다.

대체적으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까지 통상이나 지역협력 관련 전문가들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던 중국과의 장기적 관계는 '한중일'이라는 틀을 통해 기본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도였다.

한중일 세 나라가 동시에 협상을 해야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될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는 점 정도는 게임이론의 간단한 모델로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노무현 정부의 현재 협상력 정도로 한중일 FTA를 하면 중국과 일본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고 한국만 손해를 보는 FTA, 즉 한미 FTA와 같은 FTA가 재현될 슬픈 시나리오를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이 직접 협상하는 것보다는 균형 잡힌 협상안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은 거의 전 부문에서 한국에 비해 가격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기계적으로 계산하면, 한국은 모든 산업을 중국에 넘기고 금융국가로 가는 것이 맞는다는 답이 나올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한중 FTA를 꼭 해야 하는가? 국제통상 절차에서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이라는 다자간 틀이 있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안 하면 그만이다 .

1~2년 내에 도하개발아젠다(DDA)를 완화시킨 형태의, 새로운 다자간 통상협정 라운드가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FTA가 대세'라는 정부의 주장은 국제적인 시각으로 보면 슬로건에 불과하다.

정부의 FTA 전략은 '도시국가' 전략?

정부는 EU와의 FTA 협상은 1년 내에 끝내고, 중국과의 FTA 협상은 국민여론을 봐가면서 추진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 조금 눈을 크게 뜨고 정부의 통상 정책에 대해 살펴보자. 이미 한미 FTA 체결까지 성공적으로 진행시킨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FTA 대세'를 탄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디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주 긍정적인 시각으로 정부의 FTA 정책에 일관성이 있다면, 이는 경제학에 나오는 '도시국가'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스위스와 룩셈부르크 그리고 대만이나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의 경제정책이 '도시국가 ' 모델이라고 분류된다. 이는 국제경제학에서는 '위성 경제(satellite economy)' 모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도시국가 모델은 실제 산업 생산은 사라지고 금융화와 중계무역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도시국가의 입장에서는 국가 간의 연계성이 대단히 중요해진다. 경제사의 관점에서는, 암스테르담 모델이나 런던 모델도 도시국가 모델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동시다발적인 FTA 정책', 정부의 최신 용어로 'FTA의 전략적 확대'는 '한국을, 산업정책을 극단적으로 배제한 금융국가로 키우겠다'는 전략이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과연 한국과 같은 거대한 국민경제가 금융과 중계무역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 모델을 적용해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국민경제에서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15%까지 높아졌던 스위스의 경우가 금융을 극단적으로 키웠던 곳이다. 하지만 스위스는 이런 위성 경제 모델에서 최근 금융의 비중을 낮추고 국내 생산기반을 강화하는 국민경제 모델로 전환했다. 그 결과 지금은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 선진국의 대열에 끼게 됐다.

한국 경제에서 금융의 비중이 아무리 높아진다 해도, 국제적으로 금융 비중의 상한선이 GDP의15%라면, 이 부문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기 어렵다는 것은 당연하다. 동북아 금융허브 등 그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렇다.

정부의 FTA 전략에는 국민경제 모델이 없다

정부의 FTA 추진 전략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국내 산업정책과 국민경제에 대한 모델과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통상 부문만을 끌고 나간다는 점에 있다.

어떤 산업을 어떻게 키울 것이라는 산업정책과 내부 로드맵이 있다면 그에 맞춰 협상전략이 나오게 돼 있다. 하지만 국민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인 산업정책이 부재하기 때문에, 정부의 협상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극단적인 상황논리에 맞춰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정부의 FTA 정책도 '다다익선'이라는 단순무식한 기준 하나로 움직이고 있다.

한미 FTA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많이 줬느냐' 혹은 '덜 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 FTA 정책을 추진하느냐', 특히 '이 FTA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전략이 빠져 있는 것이다. 똑같은 문제점이 EU와 중국과의 협상에서도 노정될 것이다.

외교통상부와 청와대는 'FTA를 많이 하면 좋다'는 하나의 기준만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국민들이 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니까 "덜 내주면 될 것 아니냐"는 보조 기준을 하나 더 가지게 된 셈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게 대세다"라는 설명 외에는 제시한 것이 없다.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그려보니…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대로 FTA 정책이 진행되면 어떻게 될까? 국제적으로 미국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제품은 소위 '하이엔드(high-end, 최고급)' 제품이 아니다. 쇠고기가 그렇고, 치즈가 그렇고, 다른 일상 제품들이 대부분 그렇다. 심지어는 석유화학 제품이나 철강 제품도 마찬가지이고, 섬유제품이나 자동차의 경우도 그렇다.

'쓰리 나인'이라고 부르는 순도 높은 정밀화학 제품이나 기계류도 국제 하이엔드 시장에서는 유럽산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강남의 스낵점에서 파는 유기농 호밀빵 샌드위치도 유럽산인 것이 대세다.

정부가 강조하는 '소비자 후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이엔드 시장의 진정한 강자는 거의 전 부문에 걸쳐서 유럽이다. 현실적으로 미국이 유럽보다 강한 제품군은 오히려 서비스와 문화 부문 , 즉 영화와 보험업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미 FTA로 국내의 '로우엔드(low-end, 중저급)' 시장은 이미 미국에게 내준 상태다. 하이엔드 시장은 한-EU FTA를 통해 유럽에 내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저가 상품군 시장은 중국이나 동남아 시장에 내주게 될 것이다.

자, 그럼 대한민국 경제는 뭘 먹고 살지? 무엇으로 이미 80%를 넘어선 대외부문에서의 손실을 보전하면서 나아가지? 이 질문에 대해 정부는 그동안 강조해 왔던 대로 '서비스 산업으로 먹고 살 것'이라고 답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 점이 너무 뻔해서 정부도 "이것이 대세다"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거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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