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 위한 한미 양국 정부의 행보가 지난 23일부터 닷새 간 제주에서 열린 4차 협상에서 마지막 '숨 고르기'를 끝냈다. 예상됐던 대로 4차 협상에서는 눈에 '확' 띄는 큰 진전은 없었다. 한미 양국 협상단은 상품 분야의 양허안을 조정하는 데 협상력을 집중했고, 그 밖의 분야들에서는 양국 간 미미한 이견들을 없애는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선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한마디로 이번 4차 협상은 다음 협상으로의 '징검다리' 역할 수준에 그친 협상이었다. 한미 양국이 이번 협상에서 얼마나 '튼튼한' 징검다리를 놓았는지는 양국 협상대표의 공식적인 협상결과 보고만 가지고는 파악하기 힘들다. 양국 협상단이 상품 양허안에 대한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점에 계속 주의를 환기함으로써 다른 중대한 사안들은 여론의 관심에서 자연스레 멀어졌고, 그런 사안들에 대해 협상장에서 오고 간 이야기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4차 협상은 한미 양국 협상단의 협상전략과 이 전략을 형성한 배후여건을 그 어느 때보다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향후 협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TPA 연장 위해서라도 미 협상단의 '강공'은 계속될 것
미국 측 협상단은 이번 4차 협상에서 미국 측이 향후 협상에서도 '강성 협상전략'을 고수하겠다는 확실한 신호탄을 쏴 올렸다. 강성 협상전략이란 제로섬 게임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초기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는 전략으로, 주로 강대국이 외교관계를 담보로 약소국의 양보를 요구하는 경우에 전형적으로 이용된다.
미국 측은 이번 협상이 전체 협상일정의 중반을 넘어선 4차 협상이었음에도 상품무역(공산품) 양허안과 섬유 양허안을 미세조정하는 수준에서 살짝 '마사지'해 내놓은 것 외에는 배기량을 기준으로 한 우리나라 자동차 세제의 폐지, 우체국 보험에 민간사업자와 동일한 규제 적용, 저작자 사후 저작권 보호기간의 연장, '재벌에 대한 공정거래법 적용' 관련 조항의 삽입 등 우리 측이 난색을 표하고 있는 기존의 요구들에서 단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의 관세 인하, 반덤핑 조치의 발동요건 강화, 섬유 원산지 기준의 조정, '역외가공방식'의 인정,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특수성 인정 등 우리 측의 핵심 요구들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노(No)'를 외치거나 '협상대상이 아니다'라는 기존의 입장을 유지했다.
미국 측 협상단은 11월 7일로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자국의 기업을 비롯한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번 4차 협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더 구체적인 요구사항들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관세율이 2.5%에 불과한 자동차의 관세 철폐의 이행기간을 '기타(10년 이상)' 단계로 분류해 놓고 자동차와 관련된 우리 측 제도와 법령에 대한 개선을 요구한 것은 최근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휩싸인 포드, GM, 크라이슬러 등 '빅 스리(Big Three)'를 다분히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은 자국의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1970년대부터 한국 등 주요 교역국들에 대한 통상정책에 있어서 이런 강성 기조를 유지해 왔다. 그때부터 이미 미국 내에서는 미국이 무역적자를 보는 이유는 자국 산업의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통상교역 대상국들이 보호주의 조치를 통해 미국산 상품의 수출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1990년대 들어 세계무역기구(WTO) 다자간 협상을 통해 전세계 개발도상국들의 무역장벽을 낮춰 자국산 상품의 수출을 늘려보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농업보조금과 반덤핑조치를 비롯한 미국의 비관세 장벽을 낮추라는 개도국들의 강력한 요구에 부닥치게 된다. 이 와중에 2000년대 들어 재정수지와 경상수지의 동시 적자를 의미하는 '쌍둥이 적자'로 미국경제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하자 미국은 진전이 더딘 WTO 체제 대신 양자간 FTA를 통해 개도국들의 관세장벽과 비관세장벽을 동시에 걷어내면서 자국의 비관세 장벽은 유지하는 새로운 통상전략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무역촉진권한(TPA)은 바로 이런 미국 쪽 사정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헌법 1조는 '외국과의 통상을 규제하는 권한은 의회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미 행정부는 이런 대외통상 전략을 이행한다는 명분으로 지난 2002년 TPA를 통해 대외 교역협상의 실질적 최종권한을 의회로부터 한시적으로 이양받았다.
하지만 TPA는 미 행정부로 하여금 미 의회 의원들이 내는 제각기 다른 '보호주의'적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 이를 통상협상에서 반영하도록 하는 매개체적 제도이지, 결코 미 행정부가 제멋대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 행정부는 내년 6월에 만료되는 TPA를 연장 받아 기존의 대외통상 전략을 지속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한미 FTA에서 미 의회의 보호주의적인 압력을 최대한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 행정부는 한미 FTA 협상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을 통해, 자국 의회로부터 TPA 연장 결정을 얻어내는 데 이 협상을 일종의 카드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 행정부는 TPA가 만료되기 전까지 한국과의 FTA를 맺는 데 '올인'하기로 이미 올해 초에 결정했다. 이는 한미 FTA가 미국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반영한 '모범적인' 협정이 돼야만 미 의회가 행정부에 TPA를 연장해줄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 측에서 TPA가 만료되기 전에 한미 FTA를 체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서둘러 미국의 요구사항들을 수용해주는 것은 미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TPA 연장 결정을 받아내도록 돕는 셈이 되는 것이다.
'굴욕' 협상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우리 정부
한편 우리 측 협상단이 겉으로 내세우는 협상전략은 외교안보관계와 협상을 분리해 협상에서 실익을 찾는다는 이른바 '원칙 협상전략'이다. 우리 측 협상단은 그동안 "한미 FTA가 우리나라에 더 큰 이익을 준다" 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대신 "한미 양국에 윈-윈(win-win)이 되는 협상을 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최근 북핵 사태가 터졌을 때도 "북핵으로 인해 한미 FTA에서 협상력이 약화되는 일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우리 측 협상단의 태도는 겉으로만 그런 것으로 보인다. 우리 측 협상단이 실제로 협상장에서 구사하고 있는 협상전략은 원만한 합의를 위해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상대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연성 협상전략'인 게 분명하다.
사실 현재 우리 측 협상단으로서는 이런 협상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협상을 개시하기 위해 스크린쿼터의 축소, 쇠고기 수입의 재개 등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을 이미 수용해버려, 실제 협상에서 '실탄'으로 쓸 만한 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정부의 조치는 단순히 협상카드를 내보인 정도가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미 FTA는 반드시 체결하겠다'는 사실상의 '백기'를 미국 측에 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부처 간 이견으로 인한 협상력의 약화도 우리 측 협상단의 협상전략을 '연성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코리아타임스>가 26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지적재산권 분과의 협상을 놓고 외교통상부, 법무부, 문화관광부, 특허청 등 관련 정부부처들이 이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있다. (☞관련기사 보기) 비단 지재권 분과뿐 아니라 여러 분과들에서 각각 이해관계가 다른 정부부처들이 충돌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또한 통상협상에서는 든든한 '원군'이 있어야 협상단의 입지가 강화되는 법인데 우리 측 협상단의 경우 정체성도 모호한 '재계 단체들'이 한미 FTA에 대한 원론적인 찬성을 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한미 FTA가 워낙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것이기에 산업별로 아직 한미 FTA로 인한 '손익' 계산이 끝나지 않아 한미 FTA와 관련된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이익단체들의 '밀어주기'가 부족한 것이 우리 측 협상단의 전략을 더욱 연성화시키고 있다.
다만 내년 대선 과정에서 한미 FTA 체결 결과가 미국 측에 대한 양보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정치적 변수'가 한미 FTA 협상에 임하는 우리 정부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강하게 만들어줄 여지는 있다. 또 미국 측의 지나친 요구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국내에 형성되고 있는 것도 우리 측 협상단에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측 협상단은 이런 국내적 상황을 협상에서 지렛대로 이용하는 대신, 오히려 우리 국민들을 '따돌리는' 쪽으로 협상방향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은 우리 측 협상단이 미국 측에는 "스크린쿼터를 다시 늘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해 놓고, 한국 국민들에게는 "필요할 때는 스크린쿼터를 다시 늘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데서 명확히 드러난다. (27일 <코리아타임스> 보도 ☞관련기사 보기)
게다가 북한이 그야말로 시기적절하게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북핵 이슈가 이런 모든 국내적 요소들을 덮어버리고 '한미 FTA의 안보 연계론'까지 부상해 우리 정부의 연성 협상전략이 더욱 굳어지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안보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한미 FTA 협상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5차는 빅딜을 위한 막판조율…진짜 빅딜은 6차부터
이같은 한미 양국 협상단의 협상전략에 비춰볼 때 양국 협상단은 향후 2~3차례 더 열릴 협상에서 미국 측이 요구한 사항들을 '원칙'으로 수용하고, 우리 측이 요구한 사항들 중 일부분을 '예외조항'으로 두거나 '향후 필요시 논의 가능'이라는 문구로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미국 측의 입장을 우선시해 협정문에 개성공단산 상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해 주는 근거가 되는 '역외가공방식' 조항은 넣지 않되 '향후 북미관계 개선 시 역외가공방식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다'는 각주를 넣는 식이다.
한미 양국 협상단은 다음 5차 협상에서는 상품 양허안과 서비스·투자 유보안에 대한 협상을 '실질적 마무리' 수준으로 진전시키고, 다른 분야들에서는 빅딜을 위한 '막판 이견조율'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 5차 협상에서는 무역구제 분과의 '반덤핑' 부분에서만큼은 일종의 '이벤트'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5차 협상이 양국 협상단이 협상타결 시한으로 정해놓은 내년 6월 말에서 180일 전에 열리는 마지막 협상이기 때문이다. TPA에 따르면 미국 측 협상단은 협정이 체결되기 180일 전에 미 국내법의 제·개정을 가져올 수 있는 무역구제 관련 사안을 미 의회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은 지난 1994년 발효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후에 맺은 어떤 자유무역협정에서도 반덤핑과 관련된 조항을 삽입한 적이 없다. TPA에 미국 통상협정의 협상목표로 '반덤핑 집행력 약화 방지'가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종훈 우리 측 수석대표가 4차 협상 후 가진 브리핑에서 "다음 협상에서는 무역구제 부분을, 집중에 가까운 쪽으로, 진도가 많이 나가야 하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공언한 것으로 보아 미 국내법을 건드리지 않는 수준에서 미국 측의 미미한 양보를 받아낼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인다.
미국 측은 다음 5차 협상의 개최 장소로 미국 서북부에 위치한 몬태나 주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비프 벨트(beef belt)'에 속하는 몬태나 주는 물 소비량의 97.5%가 가축의 사육에 쓰일 만큼 '축산업'을 주요 산업으로 영위하는 곳이다. 미국 측은 몬테나 주의 외딴 곳을 협상장소로 정해 지난 3차 시애틀 협상 때부터 본격화된 한미 양국 노동자·농민들의 연대시위를 차단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쇠고기의 주'에서 협상을 개최함으로써 우리 측에 쇠고기 시장을 더 개방하라는 압박의 수위를 '상징적'으로 높이는 효과도 미국은 노리고 있는 것 같다.
이번 4차 협상에서 한미 양국 협상단은 진짜 빅딜을 위한 협상으로 6차 협상을 갖기로 합의함으로써 추가적인 협상 시간을 확보했다. 6차 협상은 1월 중순에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다. 양국 협상단 안팎에서는 협상의 대단원을 그럴 듯하게 장식하기 위해 7차 협상을 내년 3월에 미국 워싱턴 DC에서 여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는 '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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