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4차 협상에서 미국 측 협상단이 예상대로 '보다 세게, 보다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협상 둘째 날인 24일 오전 11시 한미 양국 협상단은 전날 중단됐던 상품무역 분과의 협상을 재개했지만, 미국 측이 전날 제시했던 상품 분야 양허안을 조금 더 '마사지'하겠다고 약속한 것 외에는 거의 전 협상분야에서 기존의 요구들을 밀어붙이면서 우리 측을 압박하고 있는 분위기다.
양자 간 통상협정을 위한 협상에서는 회가 거듭될수록 협상 당사국들이 한두 가지 사안을 서로 조금씩 양보해가며 유연성을 높여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1월 미국 중간선거라는 명분에 북한 핵실험 '특수'까지 덤으로 얻은 미국 측 협상단은 상품 분야의 수정 양허안으로 생색을 내면서 오히려 전보다 더 경색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 '최혜국 대우 기준범위 좁히자'
미국 측은 이번 4차 협상에서도 한미 FTA 협정문에 들어간 '최혜국 대우'의 적용범위를 미국이 기존에 FTA를 체결했던 국가들은 제외하고 앞으로 FTA를 체결할 국가들로만 한정하자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최혜국 대우(MFN, most-favored-nation-treatment)'란 통상협정 당사국이 각각 다른 나라들과 맺은 통상협정 상의 대우 중 가장 좋은 대우를 상대방 국가에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의 주장은 한국에 대해서는 사실상 최혜국 대우를 해주지 않겠다는 것이며, 기존에 미국이 FTA를 체결한 다른 나라들보다 불리한 무역 조건을 한국에 적용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현재까지 호주, 캐나다, 멕시코, 이스라엘 등 15개의 국가들과 FTA를 체결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칠레, 싱가포르,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노르웨이, 스위스,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등 6개의 '작은' 나라들과만 FTA를 체결한 상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혜국 대우의 적용범위에서 과거의 FTA 체결국을 빼자는 미국 측 요구는 우리나라에 더욱 더 불리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적어도 그동안에는 '최혜국 대우'는 한미 양국의 모든 FTA 체결국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정부는 최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서도 한미 FTA에서 타결이 힘들 것으로 예상되는 쟁점들 중 하나로 '서비스·투자 분야에서의 최혜국 대우 부여범위'를 꼽은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 측 협상단은 24일 "미국 측 제안은 협정상의 의무로 최혜국 대우를 규정하되 '양국 모두' 이 의무를 과거에 FTA를 체결한 국가들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말해, 미국 측의 요구가 부당하지만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정부는 "이런 미국의 방침은 (1994년에 발효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후 미국이 체결한 모든 FTA에서 채택하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는 이런 미국의 방침을 협상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규정하는 방안을 신중히 논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스크린쿼터 다시 늘리는 것 불가능하게 해 달라"
협상 이튿날을 맞은 서비스 분과에서는 우리 영화산업에 대한 미국 측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24일 오전 <한겨레>는 정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지난 9월 말 열린 서비스 분과 별도회의에서 미국 측이 스크린쿼터를 현행 73일에서 더 늘릴 수 없도록 '현재 유보'로 분류하고, 또 디지털 전송을 통해 상영되는 영화를 유보 목록에서 제외해 스크린쿼터의 적용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문화관광부는 즉각 보도자료를 내 "현재까지 미국 측은 공식적으로 디지털 전송을 통해 상영되는 영화에 대한 개방을 구체적으로 우리 측에 요구한 바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문광부는 스크린쿼터에 대한 보도에 대해서는 반박을 하지 않아 사실상 미국 측이 스크린쿼터를 '현재 유보'로 분류해 달라고 요구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미국 측은 3차 협상에서 이미 이런 요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문광부의 이날 보도로 미국 측 요구가 확인된 셈이다. 현재 우리 측 유보안에서 스크린쿼터는 '미래 유보'로 분류돼 있다.
한미 FTA에서 스크린쿼터가 '미래 유보'로 분류돼 있어야만 우리나라는 향후 필요할 때 스크린쿼터를 다시 늘릴 수 있는 정책권한을 가지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국 측이 스크린쿼터의 재(再)연장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충분히 예상돼 왔다. 미국 측은 한미 FTA 협상을 개시하는 선결조건 가운데 하나로 스크린쿼터의 축소를 요구했을 만큼 미국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자동차 협상반…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미국
이날 협상이 완료되는 자동차 작업반 협상에서도 미국 측 협상단은 기존의 요구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되풀이했다.
무엇보다 미국 측은 우리 측에 '자동차 기술표준 상설위원회'를 설치해 110개에 달하는 우리나라 자동차 기술표준의 재·개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자동차 통상에 대한 사안들을 논의할 수 있는 한미 간 정례 통상회의가 있는데도 미국 측은 협상 초기부터 미국산 자동차의 한국 수출을 가로막는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상시 협의채널이 필요하다고 고집을 부려 왔다.
또 미국 측은 '한국 정부가 수입차에 대한 소비자 인식을 악화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의 조항을 협정문 안에 삽입하자고 요구했다. 이런 조항이 삽입되면 우리 정부는 수입차만을 대상으로 한 세무조사 등을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전날인 23일 미국 측은 배기량을 기준으로 한 우리 자동차 세제를 즉각 폐지하라는 주장을 되풀이 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24일에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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