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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윈'도 '제로섬'도 아닌 '윈루즈' 게임

[한미FTA 뜯어보기 96 : 한미 FTA 중간점검(1)] 결국 누가 이익을 보나

한국경제는 해방 직후 출발부터 신화와 도전이 계속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로 형성된 구조 역시 독특하다. 대외 경제의존도 70%, 에너지 해외의존도 98%, 수도권 거주 인구비중 50% 등 그 구조적 특징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더 끌고 미래로 가야 하는가, 아니 그렇게 미래로 갈 수 있기는 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 경제규모로 세계 10위권, 1인당 국민소득으로는 세계 30위권에 드는 한국경제의 구조에 대한 이런 질문에 답을 해보는 것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준비 없는 협상

계획경제 혹은 동원경제의 성격을 지녔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이미 이승만 정권 때 준비된 것이었다. 사실 1차, 2차 경제개발 계획은 이승만 정권 시절에 수립된 것이 박정희 정권 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이 바꾼 것은 새마을 운동을 통한 화학농업의 적극적 도입과 도박에 가까운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전두환 정권 때는 한국경제가 과잉생산의 부담을 벗기 위한 폭력적 구조조정을 거쳤다. 그러나 수치만 보면 전두환 정권 때의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튼실'했다.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의 경제 시스템은 수치와 경제운용의 관점에서 거의 같았다. 김영삼 정권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도 4년 간 준비된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OECD 가입으로 인해 그 전 한 세대를 끌어 온 한국식 계획경제는 결국 종말을 고한다. 개방된 금융 시스템에 대한 효율적 제어장치를 찾지 못한 한국의 계획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결국 한 세대를 비극적으로 마감하게 된다.

이렇게 그동안의 경제정책을 일별하다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치명적 결함이 눈에 보인다. 한미 FTA는 준비가 안 된 협상이다. 대외협상 3년, 대내협상 2년을 합쳐 보통 5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미국형 FTA'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한미 FTA 협상은 그 속도 자체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다.

경영학과 경제학의 차이점이 있다. 경제학은 국가 혹은 정부체계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서 좌파 학자든 우파 학자든, 급진파 학자든 보수파 학자든 경제운용의 변경에 대해 보수적이다. 아마 가장 보수적인 사회학자나 정치학자보다 가장 급진적인 경제학자가 변화의 속도 면에서는 더 보수적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구조조정을 하고 노동자들을 내보내면 회사를 살릴 수 있다고 믿는 경영학자와 달리 경제학자는 그렇게 내보낸 노동자들이 새로 진입하게 될 노동시장 혹은 그런 실직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 시스템도 분석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한미 FTA 그 자체를 찬성하는 경제학자들도 속도 면에서는 불안감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미 '자유무역' 협정이라는 이름과 달리 FTA는 전통적으로는 보호무역의 전통 위에 서 있다. 특정 지역의 관세 철폐로 크든 작든 통합의 효과를 발생시켜 그렇지 않은 나라에 대한 배타적 이익을 발생시키겠다는 것이 원래의 FTA다. 그래서 FTA는 양 당사국 사이에 실질적 효과가 충분히 클 때 진행되곤 한다.

이론대로라면 한미 FTA가 체결되면 한국과 미국은 이익을 보게 되고, 그밖의 나라들, 즉 중국이나 일본, 유럽은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FTA는 중상주의 철학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지역통합군 같은 군사협약과도 유사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누가 한미 FTA로 이익을 보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의 누가, 어떤 계층이, 혹은 어떤 직종이 이익을 보는가? 그리고 한국의 시각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겠지만, 미국에서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익을 보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은 큰 문제다.

왜냐하면 이런 분석이 전제돼야만 한미 FTA로 이익을 볼 사람들이 한미 FTA로 인해 심각하게 소외될 것이 뻔한 사람들의 손해를 보상해주는 장치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경제협상이 사회적 충격 없이 연착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보상의 장치가 필수적이다.

현재는 손해 볼 사람이나 이익 볼 사람이나 그게 누군지가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이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한미 FTA가 체결되면 미국과의 무역에서는 우리나라가 손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이 늘어나는 것보다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수출이 더 많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평균 관세율이 한국은 8%, 미국은 2%라는 관세구조 상 한미 FTA가 체결되면 한국시장이 4배 더 많이 개방되는 게 당연한 이치다. 한국의 무역적자도 구조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미국은 주정부 별로 분산된, 세계에서 가장 치밀하고 견고한 보호장치를 가진 나라다. 반면에 한국은 사실상 국내시장을 '애국심'으로 지켜 온 일종의 관행시장에 가깝다. 이런 애국심 혹은 애국심을 조장하는 장치를 무역에서는 '비관세 무역장벽(non tariff measure)'이라고 부른다. 국산품 장려부터 금 모으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OECD 국가로서는 특이하게 애국심이 높고, 이 애국심이 국내 시장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등 미국 측이 제시한 4대 선결조건은 전부 이런 '비관세 무역장벽'에 해당한다. 광우병과 연관된 쇠고기 시장, 스크린쿼터와 연관된 영화 시장,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난 생명공학(BT)에 대한 한국인의 열광과 관련된 약값 문제, 깨끗한 공기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대기의 질과 관련된 정책 같은 것들은 전부 국민의 관행이나 애국심 같은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정부가 4대 선결조건을 들어주는 것을 통해 관련 직종의 업체와 국민 모두가 손해를 본다. 그렇다면 이익은 누가 가져가는가? 우리가 미국에 비해 절대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태권도 사범이나 한의원 같은 특수직종 종사자 외에는 이 구조에서 이익을 볼 사람은 거의 없다. 노동자들이 지금 바라는 것은 '고용승계'가 돼야 한다는 것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재벌? 재벌도 민영화될 국가기관을 놓고 미국기업과 경쟁하게 될 터이니 꼭 이익을 본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미 다국적기업화된, 그리고 지분의 50% 이상이 외국인 소유가 된 한국 대기업들이 기대하는 것은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완화와 노동 유연성 강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출총제는 삼성 이외의 재벌에게는 해당사항이 거의 없고, 노동 유연성은 한미 FTA가 아니더라도 현 정부 혹은 다음 정부가 끝없이 강화할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대기업도 크게 이익 볼 게 많지 않다. 해외 현지생산 체제로 전환하고 있는 현대자동차도 한미 FTA가 국내 자동차시장만 내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불안해하고 있고, 화학과 제철 산업 관계자들도 한미 FTA로 대미 수출여건이 과연 나아질까 미심쩍어 하는 분위기다.

중소기업에는 한미 FTA가 대재앙이다. 중소기업을 둘러싼 국내 중심의 네트워크에 미국기업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중소기업에 중요한 대기업 등과의 '협력조건'이 개선되거나 체계화될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한미 FTA로 이익을 보게 될 대표적인 업종으로 이야기되는 섬유업의 경우를 봐도, 옷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원사의 70~80% 이상이 중국산이기 때문에 미국이 섬유 원산지 규정을 내세우며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관세율 인하를 성공적으로 얻어낸다 하더라도 사실 우리 섬유업계에 큰 이익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농민과 도시 자영업자는 불 보듯 뻔한 희생자다.

정말로 한미 FTA가 국민경제의 일부에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이익을 볼 것이 뻔한 업종과 손해를 볼 것이 뻔한 업종을 대상으로 대화를 하고 그들 사이에 이익과 손해를 나누도록 하는 장치를 정책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익을 볼 사람이 명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미 FTA로 이익을 보게 될 사람이 "내가 이익을 본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세금을 더 내라고 할까봐 그런 것인지, 실제로 이익을 보게 될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래도 무역협회는 한미 FTA로 무역업계가 이득을 본다고 하면서 한미 FTA를 찬성하고 있다. 그런데 전경련은 "어쩌면 이익을 볼 것"이라면서 그 뒤에 서 있다. 상공회의소와 중소기업연합회, 그리고 경총 같은 곳들은 약간은 어정쩡하게 "원론적으로 찬성한다", "정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왜 이러한가 하면, 자동차공업협회를 중심으로 여러 업종별 협회들에서 "한미 FTA의 실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볼멘소리를 조금씩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이득을 본다고 하는 무역협회와 전경련이 예상되는 이득의 일부를 사회에 내놓아 농민과 자영업자들을 위한 국민경제안정기금 같은 것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한미 FTA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지금보다는 부드러워질 것이다. 기업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전기와 유류를 사용할 수 있도록 차액을 국민들이 메워준 것이 지금까지 대한민국 경제가 작동해 온 방식이다. 이제는 기업이 한미 FTA로 이득을 보게 된다면 그 이득의 일부를 국민경제에 환원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는 기업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한 신문 칼럼을 통해 "FTA 입국(立國),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사실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된 후 지난 10여 년 동안 멕시코와 캐나다가 구조적으로 개선된 것이 별로 없고, 미국경제도 부시의 1기, 2기 정부를 거치면서 더 어려워졌다. NAFTA가 전체적으로 윈윈(win-win) 게임인지, 제로섬(zero-sum) 게임인지, 아니면 이익을 보는 자와 손해를 보는 자가 뚜렷하게 갈리는 윈루즈(win-lose) 게임인지를 평가하기에는 아직은 누적된 통계가 너무 적다. 그래서 NAFTA는 긍정적 평가이든 부정적 평가이든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미 FTA는 대미 무역수지 악화라는 점에서 루즈 게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는 "국민 생산성을 높여서" 결국에는 우리에게 이득을 조금 보게 해준다는 것이 외교통상부의 주장이다. 한미 FTA는 수출을 늘리는 등의 효과를 통해 4조~6조 원의 이득을 우리에게 안겨준다는 것이 그나마 정부가 제시한 가장 큰 폭의 이익이다.

하지만 이런 금액은 새만금에 들어가는 돈보다 적고, 하다못해 서울시의 '은평뉴타운' 사업규모보다도 적다. 이 정도의 금액은 고로 두 기 정도를 갖춘 일관제철소 건설비용 정도에 해당한다. 공장 하나 지을 돈 정도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온 나라가 이 난리를 친다는 것은 경제학적 관점으로는 이상하기 짝이 없다.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800조~900조 원 정도인 한국의 경제규모에 비해 4조~5조 원이라니, 그 정도의 적은 금액의 이득을 위해 국가의 장래를 건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노동자들이 5분씩만 더 일해주면 이 정도의 생산성은 한미 FTA를 안 해도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미 FTA가 마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홍보효과를 가장 크게 일으킨 것은 "문제는 서비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 한 마디다. 노 대통령의 이 말이 한미 FTA 신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 중 50% 이상은 넓은 의미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고 이들은 인구비중이 7.1%인 농민들이 불행해지면 그만큼 자신들이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미 FTA가 국내에서 '제로섬 게임'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미 FTA의 국내적 효과는 '조정(coordination)'의 실패에 따른 루즈 게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농민들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 자영업자들도 무너지고, 농민과 도시 자영업자들을 고객으로 해서 소비재를 생산하는 중소업체들까지 무너지면서 연쇄적으로 도시경제와 지역경제가 다 같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한미 FTA 신화를 떠받치는 것 중에 반도체와 휴대전화 단말기에 대한 기대심리도 있다. 그래도 삼성 반도체가 우리를 먹여 살리고, 세계최고라는 우리나라 휴대전화 단말기가 고용을 유지해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기전자 부문의 미국 관세율은 1%도 안 된다. 한미 FTA로 관세가 철폐된다 해도 어차피 우리가 수입해야 하는 일부 원천기술의 가격이 싸지는 효과 외에 획기적으로 한국업체가 이익을 볼 여지는 거의 없다.

한미 FTA가 한국경제의 구조를 개선시켜 줄 것인가? OECD 가입은 단기적으로는 부정적인 효과가 컸지만, 길게 보면 투명성을 개선하는 메커니즘을 한국경제에 들여놓았다. 그러나 미국과의 FTA로 한국경제의 구조가 개선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며, 이런 주장은 이론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전기 망, 가스 망, 대중교통 망, 우편물 배달 망까지 전부 다 내어달라고 하는데, 이런 걸 죄다 기꺼이 갖다 바치겠다고 한다면 도대체 뭐가 개선된다는 말인가? 우체국 택배가 느리다고 해서 미국 UPS의 택배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우체국을 없앨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3차 협상에서 미국은 대놓고 우리나라의 우체국 체계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국가 간 경제협상에서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

미국의 서비스 업체들을 불러들여 국내 공공서비스를 약간 개선하기 위해서 현재 20대와 30대가 다수 고용돼 있는 일자리를 송두리째 미국 업체에 내어주고 도대체 뭐가 개선된다는 말인가? 일부 사람들은 농민, 노동자, 자영업자들이 손해를 보는 만큼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미 FTA를 '제로섬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일 뿐이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대략 5년 뒤에 어쨌든 새롭게 형성될 균형상태에서 지금의 생활수준이라도 유지할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 20대인데 아직 직업이 없는가? 한미 FTA라는 케이크에서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몫은 없다. 당신이 지금 50평 이하의 소규모 식당의 사장이거나 동네 미장원 주인인가?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몫도 없어 보인다. 당신이 지금 연봉 3000만 원 근처 또는 그 미만의 중소기업 종업원인가? 당신에게도 한미 FTA는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없다.

당신이 지금 한미 FTA 업무를 보는 외교통상부 직원인가? 당신은 5년 이내에 국회 청문회에 불려갈 것이다. 당신이 지금 재경부 또는 총리실 직원인가? 당신은 부처 내 감사실 또는 감사원으로 불려갈 것이다. 당신이 지금 한미 FTA 관련 정부 보고서에 들어갈 전망치를 계산해낸 연구원인가? 당신은 수치조작 혐의로 검찰 취조실에 불려가게 될 것이다. 피의자 자격이든 참고인 자격이든,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당신은 그 길을 피하기 어렵다.

5년 뒤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외환위기 때 경제사령탑에 앉아 있었던 경제관료들에게 사법적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한국경제에 큰 불운이다. 당시에 경제관료들을 한 차례 청산했다면 한미 FTA 협상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고, 시작됐다 하더라도 그 과정과 그 내용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불운은 지금 한미 FTA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외교통상부의 통상교섭본부와 자유무역협정국, 재정경제부와 한국개발연구원, 산업자원부와 산업연구원과 같은 곳에서 부정확하게 만들어내는 통계와 근거도 불분명한 전망들에 대해 나중에 언젠가는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해줄 최소한의 장치도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정부 안대로 한미 FTA가 체결돼 3~5년 후에 국민경제가 파탄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때 이들은 모두 승진했거나 훈장을 받았거나 아니면 대학교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내 눈에는 한미 FTA로 진짜로 이익을 볼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지,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기업이나 도시 소비자가 아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미 FTA 게임에서 침묵의 패자가 될 뿐이다. 패자들 사이의 차이점은 살아나가기가 '죽고 싶을 만큼' 어려워지거나 '그래도 견뎌낼 만큼'만 어려워지는 정도일 것이다.

'정책 실명제'가 지금처럼 애타게 아쉬웠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황우석 만세"를 외치던 이른바 '황금박쥐'와 그들을 뒷받침한 과학기술부 등의 정부 고위간부들 가운데 그 누구도 진심으로 국민에게 사과하거나 사법적으로 책임을 진 사람이 없다. 한미 FTA의 경우엔 어떨까? 5년 뒤에 가서 지금의 '전망'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때도 "그건 정책실패일 뿐 스캔들은 없었다"라고 말하고 넘어가려는 걸까?

물론 한미 FTA는 좋은 것이 될 수도,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대통령의 임기 안에, 그리고 미국 신속무역협상권한(TPA)의 시한 안에 이 협상을 끝내겠다고 밀어붙이는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한미 FTA는 '윈-윈'은커녕 '제로-섬'도 아니고 '윈-루즈'의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고위 공직자에서부터 실무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이 거대한 정책결정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나중에라도 사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지금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밀실에서 작성되는 협상문의 조항들이 초래할 결과들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임기가 끝난 뒤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그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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