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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가격의 복수'에는 속수무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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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가격의 복수'에는 속수무책인가?

[이봉현의 경제스케치] 쉽지 않은 '거품 대응'

인플레이션은 인플루엔자(유행성 독감) 만큼이나 끈질기게 인류를 괴롭혀 온 두통거리였다. 둘 다 전염성이 강해 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초(超)인플레이션으로는 1차대전 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사례가 있다. 패전 배상금 마련을 위해 돈을 마구 찍다 보니 돈 가치가 떨어져 노동자들이 하루치 품삯을 손수레에 가득 싣고 집으로 밀고 갈 정도였고, 벽지 대신 돈으로 도배를 하는 집도 많았다. 1924년에는 100조 마르크짜리 지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발행된 최고 액면가 지폐다. 하지만 실제 가치는 미화로 100달러 정도밖에 안 됐는데, 당시 빵 한 조각이 800억 마르크, 맥주 한 잔이 2000억 마르크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당백전이란 '악화'가 초인플레이션을 몰아와 백성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했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과 국방비 조달을 위해 발행한 당백전은 상평통보보다 6배 정도 금속 함량이 많았지만 명목가치는 20배나 됐다. 대원군은 결국 이 발행차액을 재정자금으로 활용하려던 것이었지만, 쌀 한 섬 가격이 1~2년 사이에 6배로 폭등하는 등 큰 혼란이 초래됐다.
  
  저물가가 지배적이었던 이유
  
  이처럼 인플레이션은 통화량이 재화량보다 빠르게 늘어나는 곳에서는 언제든 그 마각을 드러낼 잠재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경제가 어느 정도 관리되는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는 인플레이션이 큰 걱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최근 세계 223개 나라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연간 물가상승률이 10% 이하인 나라가 193개 국으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5% 이하인 곳도 149개 국이나 됐다.
  
  세계적인 저물가 현상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설명돼 왔다. 먼저 인건비가 선진국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중국과 인도가 세계의 공장 및 서비스 아웃소싱 센터로 등장하면서 제조원가가 크게 줄어든 점이 꼽힌다. 또 정보기술(IT)과 유통업의 발달로 소비자들의 가격비교 능력이 커졌고, 시장개방으로 국내외 업체가 같이 경쟁하면서 독과점 가격이 사라졌다는 점도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인플레이션을 악성으로 몰아가는 주범인 '물가 오름세 심리'가 사그러든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통화경제학의 세계적 석학인 프레드릭 미시킨 교수(미국 콜롬비아대학)는 지난주 한국은행이 주최한 국제 컨퍼런스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와 물가안정 목표와 같은 강력한 명목기준 지표를 채택하는 통화정책에 힘입어 많은 나라들이 저인플레이션을 누리고 있다"고 밝혔다. 즉, 중앙은행이 경기부양적 통화정책을 요구하는 정치권의 압력을 견뎌낼 것이란 기대가 높아졌고, 중앙은행도 "물가를 연간 몇 퍼센트 이내에서 안정시키지 못하면 책임을 지겠다"고 나오자 소비자들이 물가에 대해 안심하게 됐다는 것이다.
  
  세계경제는 2003년 이후 비교적 긴 기간의 성장세를 이어 왔지만 물가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각국의 중앙은행은 물가 고민에서 벗어나자 돈을 넉넉히 풀어 경기를 북돋우는 정책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바야흐로 '골디락스(인플레이션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견실하게 성장하는 이상적인 경제)'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플레이션은 잘만 관리하면 치명적이지 않은 유행성 독감처럼 앞으로도 오래도록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헨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한 팔만 가진 경제학자를 보고 싶다"고 푸념했듯이 경제에 양면성과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대표적인 부작용은 '자산가격의 복수'다. 중앙은행이 풀어놓은 풍부한 유동성이 그동안 물가는 자극하지 않았지만, 자산가격을 주기적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경제는 자산가격의 급상승과 거품 붕괴의 순환을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느슨하게 통화를 관리한 결과는 세기 말을 휩쓴 IT(정보기술) 주식 열풍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초에 이 거품이 터지며 경제가 급속한 침체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자 미국 연준은 그 직전 6.5%까지 급격히 끌어올렸던 단기금리를 1%까지 급속히 내렸다. 이번에 풀린 유동성은 2002년 이후 부동산 시장을 자극했고, 이에 힘입어 소비가 살아나고 경기가 회복세를 탔지만 많은 나라에서 주택 가격이 몇 배씩 뛰었다. IT 버블 붕괴의 충격에서 미국의 경기회복을 이끌어낸 힘은 상당부분 집값 상승이 불러온 소비 증가였다.
  
  자산거품을 잘못 다루면…
  
  중앙은행은 이처럼 암묵적으로 자산가격을 경기조절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정작 자산가격에 대한 이해나 통제력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자산가격이 통화정책의 대상인지에 대해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다. 밴 버냉키 미국 연준 의장은 지난 4월 말 의회에 보낸 답변에서 "자산가격이 미래의 물가에 미치는 영향의 범위에서만 제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썼다. 자산가격 버블은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해 생긴 현상이긴 하지만, 중앙은행이 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며 버블이 터진 뒤 덧나지 않게 대응을 잘 하는 게 낫다는 얘기다.
  
  물가는 안정돼 있는데 자산가격이 오르는 게 버블 때문인지 신경제 때문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이 중앙은행에는 없다는 고백도 뒤따른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이 1996년에 급등하는 주가를 보고 "비이성적 과열"이란 말을 한 뒤에 긴축에 들어갔더라면, 1997~99년의 인플레 없는 고속성장, 즉 '신경제'는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는 자주 거론된다. 아울러 버블을 감지했다 해도 금리만으로는 신통한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중앙은행이 버블을 터뜨리려면 자산가격 상승의 수익률보다 높은 금리인상이 필요한데 그러면 경기가 완전히 망가진다는 것이다.
  
  자산거품을 잘못 다룰 때 경제에 초래되는 위험은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자산거품이 붕괴되는 시점과 중앙은행이 물가에 대응하는 시점이 어긋날 경우 경기의 진폭이 커질 위험이 항상 있다. 일본은행은 닛케이지수가 2만800에서 3만4300으로 65% 오르고 도쿄 인근 지바의 아파트 값이 평당 1억 원에 분양될 만큼 천정부지로 오르는 등 자산가격이 부풀던 시기에는 물가가 안정돼 있다며 단기금리를 2.5%의 저금리로 유지했다. 반면 자산가격이 꺼지기 시작하던 1989년 5월 이후 물가가 불안하다며 1년 사이에 단기금리를 2%포인트나 올렸다. 아귀가 맞지 않은 이런 대응이 일본의 10년 불황을 촉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미국도 지금 주택가격 거품이 빠지는 기미가 역력함에도 물가가 수상해지자 금리를 더 올리려 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류승선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은행은 항상 경기의 정점 부근에서 물가를 우려해 과잉대응을 함으로써 경기후퇴의 진폭을 키우는 일을 반복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최근 "물가만 보고 통화정책을 펴다 보면 경제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게 될 요인을 놓칠 수 있다"고 했다. 요 몇 년 급등한 집값에 대한 정책대응과 관련된 고민을 말한 것이다. 일반인들의 경제감각으로는 물가가 오르는 것보다 오히려 집값, 땅값이 오르는 게 더 큰 문제일 수 있고, 이를 초래한 풍족한 유동성이 원망스러울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내가 낳은 자식이고, 자산가격 상승은 인플레이션과 닮기는 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는 중앙은행의 논리는 합리적일지는 모르나 공허하다. (bonghyun.lee@reut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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