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은 5년이지만 중앙은행 총재의 수명은 20년이 될 수도 있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FRB) 의장도 18년 간 재임하며 4명의 대통령을 상대했다. 경제가 글로벌화하고 주도권이 관치에서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중앙은행의 역할은 막중해졌다. 때문에 중앙은행 총재가 시장과 대화하며 경제의 백년대계를 꾸려갈 만한 인물이어야 국민들이 허리를 펼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청와대가 한국은행 총재를 선임하는 모양새를 보면 과거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고 놀림 받던 시절에 한은 총재를 임명하던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
청와대는 이번 주에 인사추천회의에서 4년 임기의 새 한은 총재를 선정한 뒤 다음 주에 국무회의 의결로 확정해 임명할 계획이다. 현재로는 이성태 한은 부총재와 박철 전 부총재, 4월에 임기가 만료되는 김태동 금융통화위원이 경합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어윤대 고려대 총장, 조윤제 영국대사, 정운찬 서울대 총장,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 등도 한때 검토됐으나 유력 후보군에서는 한발 비켜난 것으로 알려졌다.
***열흘 뒤엔 취임해야 하는데 아직도…**
중앙은행은 금리와 환율을 조절해 국민경제가 건강하고 활력 있게 움직이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채권시장이나 외환시장과 같은 금융시장은 중앙은행이 경제에 대한 판단자료를 얻고 의도한 정책을 관철시키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때문에 중앙은행 총재는 시장의 생리를 꿰뚫고 있어야 하며, 시장으로부터도 신뢰를 얻어야 정책에서 겉돌지 않게 된다. 한은의 한 고위간부는 "총재를 인선하는 과정에서부터 금융시장과 교감하면서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인물을 골라야 한다"며 "아울러 새 총재에 대해 시장이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한은 총재 인사에서 시장은 그다지 큰 고려대상이 아닌 것 같다.
현 총재의 임기 만료일이 10여 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새 총재가 결정되지 않은 것만 해도 4년 전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2002년 박승 공적자금관리위원장이 새 한은 총재로 발표된 것은 집무시작을 불과 열흘 남짓 남겨둔 3월 20일이었다. 시장은 새 총재의 저서와 발언기록을 뒤져가며 그의 성향과 경제관을 알아보기에 바빴고, 금리정책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어 보려 부산을 떨어야 했다. 미국 백악관이 그린스펀 임기 만료 1년 전부터 3~4명의 차기 후보들을 넌지시 제시한 뒤 시장과 학계의 여론을 충분히 들어가며 밴 버냉키로 압축해 간 과정과 너무 대비되는 것이다.
이렇게 촉박하게 임명하면 적어도 6개월은 총재가 수습하는 기분으로 보내야 한다. 한은 직원들에 따르면 평소 학계나 관계에 몸담고 있었기에 경제를 안다는 인물도 금통위원이 되면 통화정책의 원리를 파악하고 타이밍과 감을 익히기까지는 6개월~1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장을 현란하게 다루는 '마에스트로(그린스펀의 별명)'와 '수습 총재'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박승 총재는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2002년 5월 콜 금리를 0.25%포인트 올려 시장을 놀라게 했으나, 가계부채 문제가 터지고 경기가 급랭하자 이듬해 5월부터 콜 금리를 4차례 연속해 모두 1%포인트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버블이 터지기 직전에 콜 금리를 인상했던 것이니 결과적으로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이 콜 금리 인상은 '수습 총재의 비용'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무슨 철학과 기준으로?**
총재가 수습 기간에 있다고 해서 경제가 봐주는 것이 아니며, 글로벌화한 금융시장의 격변이 피해가는 것도 아니다. 그린스펀은 임명된 지 두 달 만에 블랙 먼데이를 맞았으나 이에 단호하고 깔끔하게 대처해 오히려 신뢰를 얻었다. 이는 그가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동락 교보증권 책임연구원은 "과거 연준 의장 교체기마다 찾아온 경제위기는 대부분 신임 의장의 위기관리 능력을 테스트하는 과정이었다"며 "버냉키에게 주어진 과제는 시장의 신뢰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신임 한은 총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새 총재를 임명할 때 무엇을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지가 불명확한 것도 문제다. 한은 총재는 경제에 대한 식견, 통화정책에 대한 전문성, 금융시장과의 친화력, 한은 독립에 대한 의지, 재경부 등 다른 경제부처와의 협조 능력, 금통위원들과 한은 직원을 이끄는 리더십 등 여러 가지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갖춘 인물은 없으므로 현 경제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서 그것을 인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저런 인물들의 이름만 거론될 뿐이어서 "대통령이 도대체 어떤 철학을 갖고 중앙은행 총재를 뽑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 문제는 박승 총재의 4년 임기에 대한 평가 자체가 미흡한 것과도 관련돼 있다. 잘했는지 못했는지 냉정한 평가를 내려야 미흡한 부분을 보충할 인선의 기준이 마련될 텐데, 임명하는 곳에서 그런 평가를 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4년의 임기가 끝났으니 후임자를 뽑는다는 것뿐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그린스펀 같은 장수 총재가 나올 수 없다. 박승 총재는 부동산 값을 잡지 못한 데 부분적 책임이 있고, 임기 중 설화에 간혹 시달렸지만 한은의 독립성을 높였고, 최근 3차례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등 임기 후반에는 상당히 세련된 통화정책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채권시장의 한 관계자는 "새 총재가 배우는 과정에서 시장이 겪을 혼란을 걱정하면 차라리 박 총재가 4년 더 하는 게 낫겠다는 의견도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인사가 이렇게 진행되다 보니 학식과 경륜을 갖춘 인물을 중앙은행 총재로 뽑기는커녕 구습들만 재현되고 있다. 자천타천으로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뛰어다니며 이런저런 잡음을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한은 총재 하마평을 쓴 신문기사에 다소 의외의 인물이 끼어든 것만 해도 그렇다. 기사를 쓴 기자에 따르면 당초 그 인물은 기사에 넣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상급자가 어디서 전화를 받거나 누군가를 만나고 온 뒤에 그 인물의 이름이 끼워 넣어졌다는 것이다. 또 누구는 부인을 통해 줄을 대고 있다는 등 갖은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원칙이 없으니 지연과 학연이 말하려나**
인사 때마다 빠지지 않는 지역과 학연에 대한 고려가 이번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성태 부총재가 능력도 있고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소신도 있다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2년 선배이기 때문에 역차별을 받을 것인지가 이번 인사의 관심사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유력한 총재 후보로 거론된다는 얘기도 틀린 말이 아니다. 능력이 있고 기준에 맞으면 대통령의 선배가 아니라 대통령의 동생이라도 총재로 임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한은 총재 인사가 워낙 '철학이 부족한 인사'인지라 이런저런 가능성의 매트릭스만 무성하게 거론되고 있다.
좋은 중앙은행 총재를 가진 국민은 복 받은 국민이다. 좋은 중앙은행 총재를 만나면 생업의 고단함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고, 그가 일을 잘 하면 국민 모두가 오래 번영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중앙은행 총재를 만날 수 있으려면 임명권자의 태도와 총재 인사 시스템도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 언제까지 차관 하나 고르듯 중앙은행 총재를 뽑을 것인가? (bonghyun.lee@reut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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