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의 한국 진출이 늘어나면서 외자가 유입된 국내 기업들에게 '글로벌화'와 '토착화'를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숙제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적인 외국 기업의 폭 넓은 자원과 시야, 국내 인력의 현장감각이 서로 조화되면 시너지 효과가 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결합된 두 조직의 단점만 모아놓은 고약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융계에서는 지난 해 말과 올해 초 세계 굴지 은행의 자회사가 된 한국씨티은행과 SC제일은행이 이런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다. 두 은행 노동조합은 회사가 외국계에 인수된 뒤 겪어 온 변화를 놓고 경영진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한국씨티는 10월 4일부터 옛 한미은행 노조가 태업을 시작한 뒤 차츰 투쟁의 수위를 높이면서 두 달 넘게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SC제일은행은 한국씨티보다 갈등의 강도는 약하지만, 노조가 지난달 23일부터 본점 로비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다.
***노조의 '독립경영' 요구, 그럴만한 배경 있다**
두 은행 노조의 요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립경영'이 핵심적인 요구다. 소속에 따른 차별이나 문화적인 이질감을 해소하는 것뿐 아니라 한국 현실에 맞는 경영전략을 세우고 의사결정도 국내에 근무하는 임직원에게 위임하라는 것이다. 사실 두 은행 경영진은 출범 초기부터 한국에 조속히 뿌리를 내리겠다고 강조해 왔다. 한국씨티의 경우는 "가장 세계적이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국내은행이 되겠다"고 했다. SC제일은행은 스탠더드 차터드(SC)로서는 처음으로 인수한 은행의 이름을 살려 은행 이름에 넣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우선 본사의 글로벌 경영 원칙에 따라 업무처리와 자원의 표준화를 서두르다 '면역거부'와 같은 부조화 반응을 불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미은행 출신 직원들은 씨티그룹의 여신정책이나 상품판매 전략이 전국적인 은행에는 맞지 않으며, 그간 쌓아 온 '노하우' 마저 허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이 계좌를 개설할 때 과거에는 1장의 신청서만으로 가능했으나 시티그룹의 정책에 따라 이제는 필요한 신청서류가 6~7개로 늘어나 고객들이 다른 은행으로 떠나는 일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씨티은행 노조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옛 한미은행 직원들을 대상으로 8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89.3%는 통합은행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는 '시스템과 금융상품이 국내 정서와 맞지 않아서'라는 응답이 39%에 이르렀다. SC제일은행 노조도 한국의 풍토와 관계없이 글로벌 금융상품을 팔도록 하는 본사의 간섭을 중지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과 "주홍글씨 식 차별" 사이의 거리**
두 은행에서는 업무회의를 하거나 이메일을 작성할 때 영어를 쓸지, 한국어를 쓸지를 노사가 협의해야 했다. 심지어 한국씨티에서는 새로 교체되는 PC에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깔아야 할지가 쟁점이 되기도 했다. 본사나 아시아본부 등 해외와의 업무협의가 늘어나면서 국내의 업무현장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게 된 것도 문제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미 노조의 진창근 홍보국장은 "기업대출은 현지 실정을 감안해 신속히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승인 결재를 올리면 몇 달씩 걸리는 경우도 있다"며 "점포 하나 여는 데도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영구 한국씨티은행 행장은 최근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것은 더 나아가기 위한 순간의 불편함"이라고 했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적응해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며 1년 만에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미 직원들은 노조 게시판에서 "통합 이후 1년 동안 일방적인 씨티식 제도 도입으로 고객, 직원, 국가에 만족스러웠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인사는 모든 문제의 출발이자 끝이다. 은행은 새 시스템에 맞는 직원을 중용하거나 새로 채용했고, 불이익을 당한 은행 직원들은 '점령당했다'는 피해의식을 느끼게 됐다. 한국씨티는 올 4월 승진인사가 분쟁의 뇌관이 됐다. 한미 출신은 자신들의 인원이 3배나 되는데도 승진인원이 씨티뱅크 서울지점과 비슷한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부행장을 포함해 상위직급으로 갈수록 씨티그룹이나 씨티 서울지점 출신의 진출이 두드러졌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한 노조원은 "'한미 출신'이란 말은 통합은행에서 '주홍글씨'처럼 차별을 받는 상징이 됐다"며 섭섭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국씨티는 두 합병은행의 승진주기가 달라 빚어진 일이라며, 그 뒤 인사에서는 한미 출신도 배려했다고 하지만 직원들의 감정은 4월 인사로 이미 상당히 틀어졌다.
'적재적소' 방침에 따라 외부 인력 채용이 늘어나는 것도 갈등의 싹이 되고 있다. 어느날 MBA나 컨설팅 회사 출신의 30대 초반 젊은이가 부장급으로 날아들면, 나이와 연공서열이 인정되는 문화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직원들은 '6두품'의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들이 기존 직원이 인정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보이지 못할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SC제일은행의 한 직원은 "본사에서는 외국인 대신 한국인을 영입하면 토착화 아니냐고 하겠지만 직원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은행연합회장 "외국계도 토종화 노력해야"**
외국기업과 한국기업의 결합은 '국제결혼'에 비유된다. 문화적 이질감 해소와 조직융합이 국내 기업간 합병보다 훨씬 더 힘이 든다는 얘기다. 경영진도 원칙이 있고 노조에 휘둘릴 필요는 없지만, 다수 직원의 마음을 잃어서는 애초 예상한 글로벌 기업의 위력을 보여주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미 노조는 '첫 눈이 세 번 올 때까지' 마라톤 투쟁을 하겠다며 은행권 초유의 장기 태업을 하고 있다. 이는 파업보다 은행의 영업력과 수익성에 더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이미 은행은 '변동금리 주택대출의 고정금리 적용' '투자자금 본사 유출' 등 노조가 제기한 일련의 사건으로 이미지에 큰 흠집을 입었다.
진통을 겪으며 변화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씨티그룹은 한국씨티 사태로 자신들이 중시하는 '프랜차이즈(씨티그룹의 국제적 명성 등)'가 훼손될 것을 우려해 적극적인 해결로 자세전환하리란 전망이 나온다. 한국씨티 박선오 홍보부장은 "통합과정서 겪는 혼란과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변화관리 조직을 가동했다"며 "인사, 제도 같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감성통합 등 모든 측면에서 성공적 통합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SC제일 이성미 홍보차장도 "본사 경영진이 한국시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며 "노조를 상생의 업무 파트너로 보고, 이들이 요구하는 독립경영에 대해서도 충분히 협의해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기업이 국내법규를 준수하고 관련산업 발전에도 부합하는 것 역시 현지 직원의 자긍심을 높여 성과를 개선하는 좋은 토착화 전략이란 지적도 나온다. 유지창 은행연합회장은 지난 주 "외국계도 기업대출에 힘쓰는 등 토종화, 토착화해야 한다"며 "이렇게 해야 장기적으로 스스로에게 이익이고 외국자본의 순기능도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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