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오늘(11월 21일)은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겠다고 발표한 날이다. 그 해 12월 3일 임창렬 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협상 합의문에 서명해 이른바 'IMF 체제'가 시작된 뒤 우리 국민들은 이루 다 말하지 못할 고생을 했고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IMF 한국담당 펠만, 금리정책에 훈수**
1997년 12월 18일 39억 달러까지 졸아붙었던 외환보유액(가용)은 이제 2070억 달러로 늘어나 우리나라가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이 됐다. 신용평가회사 S&P가 투기등급인 B+로 10단계 떨어뜨렸던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은 그동안 8단계가 다시 올라 A에 이르렀다. 1998년 6월 16일 280까지 내려갔던 종합주가지수는 이제 1270을 넘었고 연일 사상최고치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가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하고 터키, 아르헨티나 등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에 IMF 회원국으로서 오히려 도움을 주게 된 지금, 많은 국민들이 IMF의 존재를 잊고 지내고 있다. 그렇지만 IMF가 한국경제에 대한 코치를 멈춘 것은 아니다. 회원국이 의무적으로 IMF와 가져야 하는 연례협의나 정례협의를 통해 '훈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 조슈아 펠만 IMF 한국담당 부국장은 정례협의를 마치고 재경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기회복이 확실해질 때까지 한국은행이 금리에 대해 관망(wait and see)하는 자세를 유지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리는 것은 반대한다는 의견이다.
이처럼 한국에 대한 IMF의 최근 권고는 경기부양을 확대하거나 긴축전환을 최대한 늦추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 여론이 들끓고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올 즈음인 지난 6월에도 한국에 왔던 조슈아 부국장은 이번에 연례협의 결과를 설명하면서 "한국의 주택가격에 버블(거품)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오히려 추경을 편성하고 금리를 추가로 내릴 여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는 IMF 관리체제를 졸업한 만큼 이런 주문이 강제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행 박재환 부총재보는 "IMF와 실무협의를 하지만 우리 입장을 전달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 정도이지 구속력은 없다"고 말했다.
***IMF의 견해와 미국의 세계경제 운영**
그렇더라도 IMF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넘기기는 어렵다. IMF 이코노미스트들의 견해는 미국이 현 시점에서 원하는 세계경제 질서 재편방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존 스노 미국 재무장관은 "IMF가 중국의 환율개혁을 주도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혀 노골적으로 IMF에 대 중국 압력을 주문하기도 했다.
IMF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누증이 현재 세계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이라고 보고 있다. IMF가 지난 9월 발표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는 "미국은 저축을 넘어선 과도한 투자(소비)로 올해 경상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6.1%인 76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중국이나 산유국, 일본, 아시아 개도국들에서는 저축률에 미치지 못하는 과소투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큰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이게 미국 자본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미국 장기금리가 낮게 유지되는 현상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IMF는 보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상적자와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해 6월 이후 금리를 지속적으로 올려 국내 소비를 줄이는 한편 해외 쪽의 수요 확대와 환율조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에 대한 위안화 절상압력을 멈추지 않은 것도 이런 노력의 하나다.
김일구 이코노미스트(랜드마크투신운용 본부장)는 "아시아에서 수요를 늘려줘야 미국 경기가 침체 국면에 들어가지 않고 미국 정부의 긴축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게 미국 정부의 시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과 일본 등이 지금 금리를 올릴 경우 공을 다시 미국으로 넘기는 것이 된다"며 "IMF가 이들 나라의 금리인상을 반대하는 것은 세계경제질서 재편의 판이 깨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온 IMF 대표단이 줄기차게 총수요 확대정책을 주문하는 것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IMF의 의도와 재경부의 의도**
우리는 IMF 처방의 쓴 맛을 뼈아프게 본 나라다. IMF는 1997년 우리나라에 긴급자금을 제공하면서 '기성복'같은 전통적인 처방을 들이밀었으나 문제를 악화시켰고, 나중에 오류를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IMF는 우리 정부에 외국자본의 유출을 막아야 한다며 고금리 정책을 요구했지만, 우리가 이런 IMF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 30%까지 치솟은 고금리는 견실한 기업마저 도산하게 하고, 이는 부실채권 증가->금융경색 심화->기업도산 증가->실업자 양산->경기침체->부실채권 증가의 악순환을 몰아왔다.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수정된 8년 전의 고금리 및 재정긴축 정책, 급진적으로 추진된 금융회사 BIS비율 준수 의무 등 가혹한 IMF 프로그램의 부작용에 대해 외국 언론은 "한국이 오도된 경제정책과 구조적 취약성의 대가를 치르고 있고, 그 대가에는 프리미엄까지 붙여져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국제기구의 조언을 무시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 의도는 확실히 알고 대응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의 조언을 유리하게 활용해보려는 심리가 재정경제부의 경제관료들에게 있는지도 살펴보고 경계할 일이다.
통화 당국이 여러 고려를 해서 금리를 올리려 할 때 "금리를 올릴 필요가 없다"는 말을, 국회에서 재정건전성에 대한 논란을 첨예하게 벌일 때 "경기부양을 위해 어느 정도의 적자재정은 괜찮다"는 말을 IMF가 대신 해주길 바라는 재경부 관료들이 혹시 있다면, 그건 위험한 일이다. IMF에 신세를 지면 언젠가는 그들이 원하는 것도 들어줘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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