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아퀴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저런 새끼는 아주 죽여버려야 해. 살려 두면 시끄럽기만 해". 그 자리에서 내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택시가 달리는 중이었고, 닫힌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두 다리가 다 떨렸습니다.
오랜만에 타 본 택시였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서울 연대 앞까지 광역버스를 이용한 다음, 연대 정문 앞에서 택시를 잡았습니다. 피곤한데다 짐이 제법 무거웠습니다. 홍대앞 전철역.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여서 큰 부담은 없었습니다. 지난해 5월 말, 직장을 그만 둔 뒤 제일 먼저 버린 습관 가운데 하나가 택시 타기였습니다. 2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삼보 이상 승차'라는 원칙을 고수했다고 할 만큼, 택시를 애용했습니다. 운전면허증도 없었고 이른바 그때그때 민심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택시는 굴러다니는 취재원이었습니다.
연희동에서 동교동 지하차도 쪽으로 가는데, 택시 앞쪽에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왕복 4차선 도로는 한산한 편이었습니다. 내가 빨리 가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렇게 차선을 잡아먹고 달리니…." 택시 기사분은 나이가 제법 들어보였습니다. 마침 정지신호가 들어왔습니다. 오토바이는 2차선 정지선에 얌전하게 섰습니다. 그때 택시 기사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습니다. "아, 이 양반아, 그렇게 차선을 물고다니면 어떻게 해. 한 차선만 타고 다니라고!" 그러자 오토바이 운전자-퀵 서비스였습니다-가 "내가 먼저 가고 있었잖아!"라고 대꾸했습니다. 퀵 서비스 역시 50대 중반은 넘어 보였습니다.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얼굴이 새카맸습니다. 피곤에 지쳐 보였습니다. 오토바이 기사는 금세 고개를 돌려 앞만 바라보았습니다.
파란 신호가 들어오자 오토바이가 먼저 치고 나갔습니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택시 기사는 그때부터 오토바이 기사에 대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오토바이 하고 사고가 나면, 우리 택시가 매번 져. 그걸 믿고 저렇게 까부는 거야. 저런 것들은 사고가 나면 아예 죽여버려야 해. 그래야 시끄럽지가 않아." 저주가 아니라, 적의가 아니라 살의, 살기였습니다.
두 귀로 직접 들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뒤탈이 많은 부상 사고보다 사망 사고가 차라리 낫다, 그래서 부상당한 사람을 '다시 깔아버리는'-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 운전자가 있다는 소리를 오래 전부터 들어 왔지만, 운전자로부터, 그것도 도로 위에서, 자동차 안에서 직접 듣고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공포스러웠습니다.
평소 택시에서 내릴 때 기사분에게 "돈 많이 버세요"라고 인사를 하곤 했는데, 그날, 나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문을 쾅 닫았습니다. 대법원에서 새만금 사업을 재개하라는 판결이 나온 지 사흘 뒤에 마주친 '불상사'였습니다.
3월16일 대법원의 판결 이후, 새만금 방조제에는 먼지가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형 덤프트럭과 포크 레인이 연기를 뿜어댔습니다. 새만금 갯벌에 물막이 공사가 재개되자, 찬반 양론이 분분했습니다. 간척 사업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는 물론, 종교인, 지식인, 전문가들이 저마다 나섰습니다. 물론 전라북도 공무원이나 농촌 공사, 개발 지상주의를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두 손을 들어 환영했습니다.
방조제를 쌓아 새만금 갯벌을 땅으로 만드는 사업에 찬성하느냐 않느냐를 떠나서 이번 대법원 판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새만금 갯벌을 왜 육지로 만들어야 하는지 그 개발 목적이 아직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을 계속하라고 결정한 것입니다. 국책 사업이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예산이 제법 투입되었다-는 이유를 달았다고 합니다.
이번 판결은,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았는데, 차가 출발했으니 차는 계속 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스꽝스런 사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차가 출발한 지 오래되었고-기름값이 많이 들었고- 또 그 차가 국가 소유이므로 그 차는 목적지가 어디든 무조건 달려야 한다, 목적지는 승객과 운전자가 합의해서 정하라는 것입니다.
대법원에서 새만금에 대한 판결이 나오던 16일, 한국 사회는 온통 야구에 들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세계 야구대회(WBC)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한국 야구가 프로 야구의 본산인 미국팀을 제치고, 일본팀을 연거푸 두 번 물리치며 4강에 올랐으니, 흥분할만도 했습니다. 기뻐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론, 특히 지상파 방송사는 지나쳤습니다. 지나쳐도 많이 지나쳤습니다.
연세대 윤태진 교수의 관찰에 따르면, 18~19일 주말 이틀 동안,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 3사의 저녁 뉴스가 보도한 기사는 모두 131개였는데, 그 가운데 무려 86개가 WBC 관련 기사였습니다. 특히 MBC는 주말 저녁 뉴스 시간의 4분의 3을 야구 관련 보도로 채웠습니다. 5년 가까이 법정 공방을 벌여 온 새만금 관련 뉴스는 SBS가 24번째 기사로, MBC는 22번째 기사로 다뤘습니다. 윤 교수는, 새만금에 대한 대법원 판결 소식이 "한국 야구팀이 받을 상금 액수보다 덜 중요한 뉴스였던 셈"이라고 밝혔습니다.
19일 일요일이었던가요? 나도 일본과의 4강 전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또 소름이 끼쳤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일본 팀을 또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반드시 일본을 이길 것이라고 예측, 아니 예언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꿈 같은 것이었습니다. 월드컵 축구대회처럼 길거리 응원이 펼쳐졌습니다. 텔레비전 방송사는 경기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시청자들을 '독려'했습니다. 방송사가 띄우는 애드벌룬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이러다가 지면 공황 상태에 빠질 텐데….' 나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문제는 경기가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물론 한국 팀이 졌지요. 완전한 패배였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였던 한 친구가 낙담을 해도 이만저만 낙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식욕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는 며칠 동안 패배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하곤 하던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였던 친구가 그렇게 실망하는 것을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왜 하필이면 일본에게 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이치로를 죽이고 싶다"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일본 야구가 한국 야구보다 한 수 위인데, 정작 억울해야 할 사람들은 일본 선수들과 일본 야구팬들일 텐데, 두 번이나 이기고 나서 한 번 진 것을 놓고 그렇게 분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친구는 일본과 일본 야구팀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우익, 즉 보통국가론을 내세우며 새로운 패권주의로 나아가려는 일본 우익과 일본을 동일시했습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우익과 일본은 같지 않다는 인식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일본 야구와 일본 역시 멀어도 한참 먼 것입니다. 일본 우익에 대한 악감정을 일본 야구에 그대로 투사하는 그 친구가 평소 지식인의 역할을 그토록 강조해 오던 내 친구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 야구팀을 저주하는 그 친구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나는 오토바이 기사에게 살의를 퍼붓던 택시 기사를 보았습니다.
3년 전 바로 이맘 때,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삼보일배를 시작했습니다. 2003년 3월28일 변산 해창 갯벌을 출발한 삼보일배 행렬은 온몸으로 길 위에 경(經)을 쓰며 서울로 향했습니다. 당시 시사주간지 기자였던 나는 취재를 빙자해 시간이 날 때마다 수경 스님을 찾았습니다. 2002년이던가요, 북한산 국립공원 사패산 지구에 터널이 뚫리게 되자, 비구니 스님들이 터널 공사가 예정되어 있는 현장에 움막을 짓고 농성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경스님은 비구, 비구니와 신도들과 함께 서울역에서 조계사까지 삼보일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도심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기'는 엄숙하고 경건했으며, 또 장엄했습니다. 행인들은 물론이고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도심이 산사처럼 적막해졌습니다. 취재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지켜봐야 하는 기자였지만, 나도 모르게 코끝이 매워졌습니다. 그때, 행렬의 맨 앞에서 수경 스님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닦아주던 소설가 최성각 형은 그야말로 살수차처럼 눈물을 흘렸습니다.
새만금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삼보일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삼보일배는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4대 종교가 연합했고, 구간마다 참여하는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그것은 참회이자 연민이었습니다. 척추를 곧추 세워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가 이마를 땅에 대며 절을 합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땅에 엎드리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이 땅으로부터 떨어지면 존재할 수 없다는 숙명적 조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생겨난 존재입니다. 천지인(天地人)입니다.
세 걸음 걸으면서 탐, 진, 치 삼독을 벗어버리고, 한 번 절하면서 진리에게, 뭇생명에게, 지구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비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며, 다시는 생명들을 함부로 해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보일배는 곧 잊혀졌습니다. 삼보일배라는 '새로운 시위 형태'만 남았을 뿐, 새만금 갯벌을 살리는 것이 곧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는 문명사적 일대 전환이라는 삼보일배 정신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3월16일, 대법원 판결이 난 직후, 수경 스님은 통곡했습니다.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인 수경 스님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성명 〈새만금을 둘러싼 '전쟁'이 나는 두렵습니다〉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21세기의 지성과 논리는 어디에 있으며 대의와 정치, 법과 정의, 화해와 상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공든 탑이 무너지고 또 다시 투쟁과 대립의 악순환인가"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스님은 생명 평화의 푸른 기운이 위태롭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은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는 오만한 미 제국의 이라크 침공 때문이자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외면하는 대한민국 개발독재의 광풍 때문이며, 우리 모두의 가슴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죽임의 문화'와 '투쟁과 대립의 독 기운' 때문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만금 사업이 우리 사회의 커다란 이슈로 자리잡아 왔으면서도 합리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배경에는 '죽임의 문화'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택시 기사가 오토바이 기사를 향해 퍼붓는 저주, 아니 살의가 있는 한 새만금 간척 사업과 같은 대규모 자연 파괴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과 일본 야구, 즉 국제 정치와 스포츠를 구분하지 않는 한, 생명과 생명 사이의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나는 새만금 공사에 대한 논란의 한 가운데에 저 살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새만금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살의입니다. 이 살의는 경제 논리에서 비롯합니다. 보십시오. 택시 기사가 오토바이 기사를 죽여 없애려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돈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부상을 당하면 법적으로 번거로와집니다. 합의를 해야 합니다. 치료비가 들어갑니다. 다 돈입니다. 돈 때문에 부상 당한 사람을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돈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생각을 무의식이 아니라 일상적 차원에서 스스럼없이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버젓이 주장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세상입니까.
경제 논리를 생명(생태) 논리로 전환하지 않는 한, 개발 지상주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만금 간척 공사에 대한 찬반론도 결국에는 경제 논리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갯벌이 새로 생기는 땅보다 경제적으로 더 유익하다는 논리입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새만금 공사를 중지하라며 1인 시위를 벌이며 배포한 대국민호소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국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라! 〈네이처〉지의 과학적 평가에 의하면 강하구 갯벌의 가치는 헥타르 당 2만2832달러다. 그런데 그것을 논으로 만들 때 그 논의 가치는 불과 92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산업용 기지로 써도 대동소이하다".
환경 단체들도 새만금 사업에 대한 반대 근거를 내세울 때 경제 논리를 동원합니다.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경제 논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안타까워 보일 때가 많습니다. 환경 단체들, 환경보호론자들도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급기야 머리 속에 있는 생각까지 돈으로 환산하는-지적 재산권 같은 것 말입니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비 능력이 곧 사회적 성공으로 통용되는 시대입니다.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순간, 소비자는 스스로를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죽음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과 같은 뜻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공포는 '경제적 공포'로 귀착됩니다. 모든 공포는 경제적 공포에서 기인합니다. 상대적 박탈감도 경제적 공포의 다른 이름입니다. 양극화는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잠깐 옆길로 새겠습니다. 양극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양극화가 아니라 일극화입니다. 가진 자가 하나의 중심을 이루는 일극 체제. 국제 정치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극 체제로 전환되었듯이 말입니다. 초고령화사회 역시 연령층으로 보면 분명한 양극화 사회입니다. 하지만 초고령화사회, 즉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양극화는 사태의 본질을 희석시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을 부추기는 측면이 강합니다. 내친 김에 친환경이라는 표현도 걸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친환경이라니요? 여기서 '친'이라는 접두어는 가짜, 짝퉁, 사이비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깁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연못 하나 만들어놓고 생태적 주거 공간이라고 떠벌이는 건설업체나, 저런, 아파트를 지을 때 바람의 길을 생각한다는 토지공사 광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웰빙 바람에서 우리가 목격했듯이, 어느 틈에 생태주의도 자본의 논리에 포섭당하고 말았습니다. 생태주의는 이제 광고 컨셉입니다.)
돈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회. 돈이 없으면 곧 죽음인 사회. 이런 사회가 경제적 공포를 퍼뜨립니다. 경제적 공포는 1종 전염병입니다. 경제적 공포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내면화합니다. 경제적 공포가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릅니다. 경제적 공포가 모든 선택의 유일한 척도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때 극심한 경제적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지난 해 247개월 동안 지속해 왔던 월급쟁이 시절을 청산하고 난 직후, 앞날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곤 했습니다. 경제적 공포는 곧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적의로 바뀌었습니다. 가진 자들에 대한 적의가 불쑥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오토바이 기사에 대해 살의를 느끼는 택시 기사나 일본 야구팀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내 친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새만금 사업을 강행하려는 진영이나 논리에 대해 나는 무조건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사패산 터널 앞에서, 천성산 도룡뇽 앞에서 개발 지상주의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나만 옳고 상대방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성과 합리를 내세우는 독선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이성과 합리는 허위이거나 불합리라며 경청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대화할 줄 몰랐습니다. 나는 연설을 하거나 강의를 했을 따름입니다.
택시 운전기사가 오토바이 기사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결코 살의를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면, 신세를 한탄하며 서로 격려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경제적 공포는 상대방을 배려할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경제적 공포에 감염되는 순간, 타인은 경쟁자일 따름입니다. 타인은 내 밥을 언제 빼앗아갈지 모르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타인 역시 공포의 대상입니다.
택시 운전기사에서부터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저 '살의', 즉 경제적 공포를 인정하지 않는 한, 생명 평화는 '지나간 미래'인지 모릅니다. 저 살의를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판에, 갯벌을 살리자, 자연과 더불어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자고 외치는 것은, 굶주린 사람에게 다이어트를 권유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성과 합리의 힘을 복원해야 합니다. 이성과 합리를 감정의 포장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과 지성을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진영을 공격하는 무기로 쓰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합의에 도달해야 합니다. 경제 논리가 자연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경제적 공포를 추방해야 합니다. 생명 평화의 논리가 경제 논리, 즉 살의를 어루만져야 합니다.
지구와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다른 생명과 더불어, 다른 문화, 다른 민족, 다른 종교와 더불어 사는 사회-생태 환경 운동, 생명 평화 운동이 지향하는 사회가 매우 불편한 사회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공유해야 합니다. 가난해지지 않으면, 가진 것을 내놓지 못하면 더불어 살 수 없습니다. '공생(共生)은 공빈(共貧)'입니다. 그러나 공빈은 소유의 차원에서 공빈이지, 존재의 범주에서는 충만한 삶입니다. 배타적인 소유보다, 더불어 풍요로운 존재를 우선하는 삶이 공생의 삶입니다. 연민하고 배려하는 삶이 공생의 삶입니다. 홀로 서서 더불어 사는 삶, 자립하고 자족하는 삶, 참여하고 창조하는 삶이 공생의 삶입니다.
새만금 방조제는 우리가 자연 속으로, 아니 지구의 몸 속으로 찔러 넣은 칼인지 모릅니다. 잘못 찌른 칼이라면 얼른 뽑아내고 치료를 해야 합니다. 잘못 찌른 것이 분명하고-새만금 사업의 직접적인 아이디어는 선거 전략 캠프에서 나왔습니다- 그대로 두면 죽을 것이 뻔한데-완공된다 해도 앞으로 무슨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조차 합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너무 깊이 찔렀다는 이유로, 깊이 찌르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더 찔러야 한다면,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새만금 방조제가 바닷물의 흐름을 막는다면, 그 순간, 우리 사회는 지성, 아니 상식이 없어졌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방조제 33km가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빌어올 미래가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기꺼이 경제적 공포의 노예로 살아가겠다고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돈이 전부다'라며 만세 삼창을 하는 것입니다. '돈 만세, 돈 만세, 돈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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