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국정감사 때 학위 거래를 통한 평가 비리 의혹과 공익제보자 해고를 위해 법원 제출 자료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여론의 질타를 당했던 한국산업기술평가원이 새로운 원장 선임을 둘러싸고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각종 비리 의혹, 공익제보자 탄압, 노동조합과 갈등 등 2년여의 재임 기간 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던 산업자원부 1급 관료 출신인 현 김동철 원장이 사실상 산자부의 적극적인 비호 속에서 선임이 확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모제'가 아닌 '음모제'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비상대책위원장 고영주)은 15일 "산업기술평가원 원장 선임 과정에 산자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며 "현재 진행중인 '공모제'는 '음모제'에 가깝다"며 산자부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산자부가 '낙하산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과기노조의 주장을 살펴보면 현재까지는 김 원장의 선임이 거의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김 원장의 임기 종료를 앞두고 실시된 이번 공모에는 지난 1월31일 마감까지 총 16명의 과학기술계 종사자가 신청·접수했다. 하지만 그 뒤는 파행의 연속이었다.
지난 3일 실시된 1차 추천위원회에서는 7명의 추천위원들은 불과 1시간10분만에 16명의 응모자들의 서류전형을 마친 후, 김 원장을 포함한 5인을 면접 심의 대상으로 분류했다. 응모자들의 서류조차 검토하기 힘든 시간에 16명을 검토하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더구나 이날 모임은 조찬을 겸한 모임이었다.
***"7명 추천위원 전원 산자부 관련 인사, 관련법안은 허울 뿐"**
속사정을 살펴보면 더 가관이다. 7명의 추천위원 전원이 사실상 산자부 관련 인사로 짜여 애초에 공정한 심사보다는 산자부 입맛에 맞는 '구색 맞추기'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산하기관관리기본법은 "민간위원을 추천위원회의 과반수로 하고 정부 산하기관의 임·직원 및 공무원은 제외하며 (6조), 민간위원은 법조계·경제계·언론계·학계 및 노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임하도록(시행령 4조)"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이런 법규와는 딴판이다.
현재 추천위원회는 산자부 김호원 산업기술국장, 김춘호 전자부품연구원장, 이영수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부원장 등 산자부 공무원과 산하기관 인사를 필두로 전원 산자부 관련 인사로 구성돼 있다.
민간위원으로 참여하는 기업계 인사 2인의 경우 산자부와 산하기관으로부터 각각 1백억원과 24억여원의 연구개발비를 받고 있는 기업의 경영인이다. 언론계 인사 1인의 경우 전직 산업기술평가원 직원으로 산자부 장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산자부와 가까운 인사라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이밖에 학계 인사로 참여한 현직 대학교수의 경우도 산자부 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5건의 과제를 지원받는 등 산자부와 긴밀한 관계이다.
과기노조는 "추천위원회는 언론이나 노동조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원장 추천과 관련한 일체의 사항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참여정부에서 강력하게 공모제를 실시하도록 하는 취지나, 투명사회협약 등을 추진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딴판 아니냐"고 꼬집었다.
***국회와 청와대 문제제기도 무시로 일관**
이런 산업기술평가원의 원장 선임을 둘러싼 갈등을 보는 국회와 청와대의 시각도 곱지 않다. 산업기술평가원과 김 원장의 각종 문제점은 국정감사 때도 여·야를 막론하고 질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잦은 언론 보도로 청와대도 일부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회 산업자원위원장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실 관계자는 "지난 국정감사에서 산업기술평가원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됐고 지금 산자위 차원의 감사가 진행돼 2월중에 그 결과가 나올 예정"이라며 "감사 결과 김 원장과 경영진에 일정 부분 문제점이 있다고 공식 확인된다면 국회 차원에서 대응이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국정감사 때 이 문제를 앞장서 제기한 의원들의 입장은 더 단호하다.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실 관계자는 "공익제보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해고, 학위 거래 비리, 법원 제출 증거 조작 등 국회 차원에서 갖가지 문제점이 불거진 상황에서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김 원장을 포함한 현직 경영진에 대한 엄중한 평가가 전제돼야 할 것"이라며 "만약 이번에 김 원장이 선임된 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산자부와 추천위원들도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청와대도 갑갑한 상태다. 최근 청와대 한 핵심 인사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됐고, 법원 판결로 공익제보자의 해고나 부당노동 행위가 인정된 상황에서 가장 큰 책임을 안고 있는 경영진이 유임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앞장서 투명사회협약을 추진하는 마당에 산자부가 공익제보자를 탄압했던 인사의 손을 들어주는 것에 불편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김 원장이 해고시킨 연구원 4인은 지난 연말 반부패국민연대가 수여하는 '투명사회기여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들이다. 반부패국민연대는 청와대와 정부가 추진하는 투명사회협약의 시민사회 파트너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김 원장은 해고와 부당노동 행위 관련해 검찰 기소도 진행중이다.
***산자부 공식적으로는 "경영혁신 긍정"-뒤로는 "문제 많다" 인정**
현재 산자부는 공식적으로 김 원장이 재직한 지난 1년10개월간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산업기술평가원의 경영 혁신이 이루어져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기관 운영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평가와는 전혀 상반되는 산자부의 판단이 확인됐다. 지난 2005년 1월24일 산업기술평가원 내부에 배포된 '산자부 산업기술개발과장 요구사항'은 "평가원 경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산업기술평가원에 7가지 경영 혁신을 주문하고 있는 이 문건에 따르면 "평가원은 평가 기관 중에 제일 관료적으로 알려져 있고, 전략기획본부의 역할이 미비하며, 산자부 요구 자료에 대한 대처가 미비하는 등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경영 혁신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영 상태에 문제가 많음을 인정한 것이다.
<사진 2> 지난 1월24일 사내에 배포된 산자부 산업기술개발과장의 경영 혁신 요구사항.
***1조6천억원 주무르는 핵심 산하기관에는 '낙하산'으로?**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산자부는 김 원장의 유임에 집착할까? 그것은 산자부 내에서 산업기술평가원의 위상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산업기술평가원은 1999년 설립된 기관으로 2005년 기준 1조6천억원 규모의 국가 연구개발(R&D) 자금을 기업과 대학 등에 지원하기 위한 평가·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산자부의 핵심 산하 기관이다. 이 때문에 산자부 내 기관에서 독립한 1999년부터 현재까지 산자부 1급 관료들이 원장을 독식해왔다. 이 때문에 이번 공모제를 계기로 산자부 '낙하산'이 좌절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는 형편이다.
산자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이번에 산업기술평가원 원장에 '낙하산'이 안 된다면 "이것은 산자부로서는 아주 당황스러운 일"이라며 "핵심업무를 담당하는 산하기관을 좌지우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소동은 한 마디로 산자부 관료들의 '낙하산'으로 연결된 산자부와 산하기관의 거대한 그물망에 구멍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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