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불통'이라는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근래에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민심이 나눠진 것이 대표적인데, 정치 현장뿐만 아니라 계층, 세대, 남녀, 지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통의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왜 우리 사회는 불통 사회가 되어버렸을까? 많은 이들이 소통과 혁신을 이야기하지만, 제대로 된 소통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혁신은 왜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불통과 불신,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 사회가 불통 사회임은 사회적 신뢰지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 덴마크 시민은 '알지 못하는 타인'을 74.9%가 신뢰한다고 말하지만, 한국 사회는 겨우 26.6%, 즉 4명 중 1명 정도만이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소통이 일어나기는 어렵다. 사회 통합과 신뢰의 수준을 높여야 할 정치와 언론은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분란을 조장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불통과 불신으로 인한 아픔은 쉽게 치유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논어(論語)>의 안연편(顔淵篇)에서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식량이 충분하고, 군대가 충분하며,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이 정치라고 이야기한다. 자공이 부득이하게 그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느냐고 묻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자공이 하나를 더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냐고 묻자, 이번에는 '식량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공자는 '신뢰를 정치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했다.
현대 사회는 복잡다단해졌다. 과거에는 사회의 이해관계자가 비교적 단순했고, 계획을 세우고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전략을 세우면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과 함께 등장한 세계화된 이해관계자로 인해 오늘날의 사회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구성됐다. 행정 관료들이 열심히 계획을 세우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현실을 도외시한 책상머리 계획이라고 비난 받고 있지만, 예전의 관행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경로의존성에 따른 관료주의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이것이 더 심하다.
한층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신뢰에 기반한 소통, 참여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 문화, 그래서 좋은 사회 변화와 혁신을 이루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럽에서는 계획이나 전략이 가지는 일방주의적 한계성을 인식하고, 실험실(lab)의 방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단체 해외연수단이 소통, 협치, 사회 혁신을 키워드로 9일간의 북유럽 혁신 실험실에 대한 현장 학습에 나섰다. 필자는 여기에 함께 했다.
계획과 전략이 아닌 실험실의 방법론
근래에 유럽을 중심으로 사회 혁신의 방법론으로 리빙랩(living lab), 폴리시랩(policy lab)과 같은 실험실 방법론이 등장하고 있다. 리빙랩을 우리말로 바꾸면 '생활 실험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곳곳을 실험실로 삼아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법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삶의 현장 자체가 실험실이니 당연하게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실험의 참여자이자 설계자이고, 해법을 찾아내야 하는 주체다. 리빙랩이 생활 현장을 근거로 한다면, 폴리시랩은 정책 실험을 대상으로 한다. 본격적인 정책을 실행하기 전에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해 정책 실험을 통해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정책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실험을 통해 확인해보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조금씩 리빙랩, 폴리시랩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지만, 유럽 복지국가는 오래 전부터 이를 도입했다. 핀란드는 국가 정책으로 운영하고 있다. 북유럽 사회가 이용자 중심의 실험 문화를 활성화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성과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도 오랫동안 혁신과 협치(거버넌스)를 이야기해 왔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곳보다도 리빙랩, 폴리시랩을 통해 사회 혁신을 활발하게 이루고 있는 현장을 둘러보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벨기에 브뤼셀, EU의 심장부에서 본 정책 실험실
우리 일행이 첫 방문지로 선택한 곳은 벨기에 브뤼셀이었다. 브뤼셀을 첫 현장으로 선택한 것은 브뤼셀에 유럽연합(EU)의 주요 기구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 유럽연합군의 최고사령부(SHAPE), EU 본부, 유럽 의회,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EU의 행정부) 등이 모두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해 있다. 브뤼셀 시내에서 '대사(ambassador)'라고 외치면 절반이 고개를 돌린다는 말은 브뤼셀에서만 통하는 농담이다.
벨기에 브뤼셀이 유럽의 중심지가 된 것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는 나라의 규모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강대국들은 다른 강대국에 유럽연합의 본부가 만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부터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며 유럽 각국의 교량 역할을 했던 브뤼셀이 자연스럽게 EU의 수도가 되었다.
우리가 첫 방문지로 선택한 곳은 EU의 리빙랩 역할을 하는 JRC(Joint Research Center)였다. 3000명이 근무하는 이 연구센터는 구성원의 절반이 자연과학자이며, 과학자의 80%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이 연구기관에서는 다양한 정책 실험을 통해 EU 회원국들이 실행할 수 있는 모델와 데이터와 같은 정책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EU는 영국의 탈퇴 문제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지만, 28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 국가연합체다. 근대시기 유럽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과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로 만들어진 EU는 전쟁과 폭력이 아닌 이성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낸 인류의 위대한 작품 중 하나다. 일국의 문제만 해도 복잡다단한데, 28개 국가로 구성된 연합 공동의 비전과 가치를 생산해가면서 실천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난해하겠는가.
그래서 JRC는 비판적 사고로 다가올 문제들을 탐색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실험을 하며,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검증된 것들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의 수많은 연구소들이 자료와 데이터를 중심으로 책상 위의 연구를 하는 데 비하면, JRC의 정책 생산은 보다 현실에 기반을 두고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이 돋보였다. 이런 목적을 위해 미래 예측, 인간 행동 통찰, 가시적인 정책 디자인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시간 남짓의 설명과 대화로는 이들의 전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브뤼셀에서 하루를 머물고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코펜하겐의 함께 만드는 2025, 탄소중립 2025
덴마크는 UN이 매년 3월 20일 '세계 행복의 날'에 발표하는 행복국가 순위에서 2013~2017년까지 5년간 1위를 차지했던 나라다. 그래서 '행복국가론'에 관심이 큰 필자에게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코펜하겐에서 이틀을 머문 숙소는 운하가 곳곳에 흐르는 해안가에 위치했고, 자전거 고속도로가 사행천처럼 멋지게 설치돼 있는 곳이었다. 코펜하겐은 자전거의 도시였다. 제법 쌀쌀하고 비까지 조금씩 내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이들이 많았다. 코펜하겐시가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지형적으로 경사가 거의 없다는 점과 자전거 활성화 정책도 한몫을 했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대중교통 요금이 코펜하겐을 자전거 도시로 만든 듯하다. 코펜하겐에서 대중교통을 한번 탈 때마다 드는 평균 요금은 31크로네, 우리나라 돈으로 5500원에 달한다.
코펜하겐에서는 사회내무부, 환경행정 솔루션팀, 코펜하겐의 물과 에너지를 통합적으로 관리·운영하는 호포르(Hofor, 수도권 시설관리업체)를 찾아 덴마크의 실험과 혁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내무부의 주된 역할은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와 활동을 지원하고, 연구와 자원봉사 등 시민참여 활동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과 비교하면 덴마크의 시민운동은 역동성과 긴장감이 떨어진다.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이 저항적이고 대결적인 성향이 강한 데 비해 북유럽에서 그런 종류의 시민운동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정당정치가 활성화되어 있고, 시민이 요구하는 정책과 제안이 다양한 정당을 통해 일상적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거리의 정치를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시민운동은 자원봉사를 통해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정치·사회의 환경부터 우리나라와 너무 많이 다르니, 유럽의 모델을 우리에게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크게 불신받는 곳이 국회와 정치인데, 정치가 제대로 바로 서지 않으면 다른 일도 바로 세우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덴마크에서 다시 느끼게 된다.
환경행정 솔루션팀은 '함께 만드는 2025(co-create 2025)'의 비전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팀이 이야기하는 세 가지 비전은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 일상생활이 나아지는 도시, 자연을 즐기는 도시'다. 행정기관이 제시하는 비전이 추상적이지 않아 시민의 일상과 붙어 있고, 이런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도시 기반의 개선, 책임지는 도시(2025년 탄소중립 도시 실현), 열악한 지역을 없앤 매력 있는 도시로의 전환 전략을 이야기한다. 특히, 서울의 공기와 비교할 수 없이 공기가 맑은 데도 불구하고 2025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곳곳에서 듣다보니, 환경 문제에 대한 덴마크 사람들의 남다른 의지가 느껴진다.
코펜하겐은 1970년대 사람들의 거주 기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는 도시였지만, 90년대 혁신을 통해 근래에는 한 달에 1000명씩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로 바뀌었다. 코펜하겐이 인구 증가 도시가 된 배경에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된 리빙랩이 있었다. 에너지 리빙랩과 같은 사회 실험을 통해 생활 속에서 빨래를 줄이고, 집안의 온도는 낮추는 등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당국이 시민과 함께 실험해가면서 실제 작동할 수 있는 정책 대안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민의 공감과 지지를 받지 못하면 현실에서 작동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빨래 주기를 절반 가까이 줄이는 것은 가능했지만, 집안의 온도를 1도 낮추는 것은 실제로 어렵다는 것이 리빙랩을 통한 데이터의 결과물이었다.
Hofor는 스스로를 '위대한 코펜하겐의 생활 실험실(greater copenhagen living lab)'로 내세운다. Hofor는 코펜하겐의 물과 에너지를 통합 관리하는 곳으로 코펜하겐 시정부가 73%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물과 에너지 관리를 위해 여러 곳에서 분산 운영했지만, 효율성을 키우기 위해 Hofor에서 통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쪼개기는 쉬워도 통합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조직의 생리인데, 효율적 운영을 위해 급수, 폐수, 난방 등을 통합해서 운영하는 덴마크 사람들의 실용주의가 돋보였다. 더욱이 2025년까지 탄소중립화를 목표로 기후변화 대응, 지속가능한 개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리빙랩을 혁신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리빙랩은 결론을 정해놓지 않고 주민들의 참여와 실험을 통해 보다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결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리빙랩의 철학이다.
도심 속 스키장이 된 발전소와 컨테이너 청년 마을
덴마크는 도시재생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결과, 쓰레기 처리와 청년 주거문제 등의 다른 도시 문제가 일어나는 아이러니를 겪고 있다. 하지만 곳곳에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려는 현장이 눈에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쓰레기를 태워 에너지를 생산하는 열병합발전소 '아마게르 바케'다. 덴마크 코펜하겐 시정부는 열병합발전소를 재건축하면서 기존의 이미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건축 공모를 했고, 옥상 위에 스키장을 설치하고 벽면에 암벽을 설치하는 비야르 잉겔스 그룹의 설계안이 선정됐다. 건물의 외관도 예술적으로 보이지만 옥상의 거대한 슬로프는 산이 하나도 없는 코펜하겐 시민에게 인공 산을 선물했다. 그래서 이 스키 슬로프는 '코펜하겐의 언덕(copenhill)'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도심에서 불과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시민에게 혐오시설이 아니라 편의시설이 됐으며, 외국인에게는 관광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혁신과 전환의 발상 없이는 쉽지 않는 일이다.
청년 주거 문제의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 '코펜하겐 컨테이너 빌리지'도 마찬가지다. 코펜하겐에서는 몰려드는 유학생 때문에 괜찮은 원룸을 구하려면 월 150~200만 원의 비용이 든다. 고층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와 고층 건물을 싫어하는 덴마크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시내에는 6층 이상의 건물이 없다. 1911년 시청종탑 높이 이상으로는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주거 문제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프레데릭 부스크(Frederik Busck)와 미카엘 플레스너(Michael Plesner)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컨테이너로 집을 구상하고 코펜하겐 외곽의 쇠퇴한 항구에 컨테이너 마을을 조성했다. 250명의 컨테이너 청년 마을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시 당국이 이 마을의 조성 과정을 거주할 청년들과 협업으로 진행했고, 참여자들과 아이디어 교환을 통해 혁신적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컨테이너 벽면은 단열처리를 했고, 내부 디자인은 자석을 활용해 쉽게 탈착이나 변형 배치가 이뤄지도록 했다. 아직 주변의 환경은 가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만들어갈 모습이 기대된다.
덴마크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곳은 코펜하겐 FABLAB이다. FAB는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Homo faber)에서 착안한 말로 시민이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만들고 제작할 수 있도록 한 개방형 실험실이다. 쉬는 날 없이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개방한다. 이곳은 누구의 통제나 가입 절차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식 공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FABLAB은 상업적 목적으로 시설을 이용하지 않으며, 깨끗하게 실험실을 사용하고, 자신의 프로젝트를 공유하며, 다른 사람을 돕고 장비를 온전하게 사용하자는 기본적인 원칙만을 제시하고 있다. 참여하는 시민과 직접 인터뷰할 기회가 없어 아쉬움이 있었지만 공유와 공존, 배려와 책임 등의 높은 시민성과 행정의 유연한 접근 없이는 제대로 된 혁신이 나오기 어려움을 느낀 덴마크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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