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킬러'를 자임하며 귀국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시쳇말로 닭 쫒던 개 꼴이 됐다. 25일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되면서 정몽준 의원이 여론의 검증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검찰은 참여연대가 제기한 배임건을 놓고 이익치 전회장을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이익치씨는 현재 출국금지를 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흘러간 유행가 가사를 빌면, "나 어떡해?" 신세가 된 셈이다.
***검찰의 형법상 배임 혐의 수사 재개**
서울지검 형사9부(이인규 부장검사)는 25일 참여연대가 두해 전인 지난 2000년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상대로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한 사건에 대해 수사를 재개했다고 밝혔다.
참여연대는 지난 2000년 8월 "이 전 회장이 97년 7월 현대전자의 외자조달 과정에서 현대중공업이 지급보증을 섰다 매입한 현대투신 주식 1천3백만주를 2000년말까지 현대증권이 책임지겠다고 확약했다"며 "이는 제3자 손해를 보전, 현대증권과 주주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으로 형법상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고 고발장을 냈었다.
검찰은 이익치 전 회장이 피소 직후 미국으로 급거출국해 지난 2년3개월간 미국에 머무는 바람에 이 고발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지 못해 이씨를 기소중지했었다. 그러나 최근 이씨가 자진귀국하자 수사를 재개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익치씨는 이미 이 사안과 관련해 민사소송에 걸려 재판이 진행중이다.
지난 2000년 7월28일 현대중공업이 이익치씨를 비롯해 현대증권, 현대전자를 상대로 2억2천만달러를 돌려달라는 손해배상을 제기, 1심에서 1천7백여억원을 돌려주라는 판결이 나온 상태다.
소송의 발단은 지난 97년 현대전자가 캐나다 금융기관인 CIBC에 현대투신 주식을 1억7천5백만달러에 넘기는 과정에 현대중공업이 현대전자와 현대증권으로부터 손해보전 각서를 받고 CIBC와 풋옵션(일정기간후 주식을 정해진 가격에 되사주는 계약)을 맺으면서 비롯됐다. 그러던 중 풋옵션 만기일이 돼 2000년 3월 CIBC가 각서를 근거로 현대증권과 현대전자에 재매수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두 회사가 자금난을 이유로 거절하자, 현대중공업에 이를 대신 요구해 현대중공업이 고스란히 2천4백78억원을 물어주게 됐다.
이에 현대중공업은 현대증권과 현대전자, 그리고 "현대중에 재산상 아무런 손실을 끼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준 이익치 회장을 상대로 2천4백78억원을 물어달라는 소송을 내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 소송이 걸린 뒤 얼마 안지나 현대증권 회장직에서 밀려난 이익치는 곧바로 가족을 데리고 미국행을 택했다. 소송 패소가 확실했고, 그럴 경우 온 재산을 환수당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지난 1월25일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이익치 당시 회장과 현대증권, 현대전자에 대해 현대중공업에게 손해배상 청구액의 70%에 달하는 1천7백18억원을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이나 1심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어, 이익치 전회장은 전재산을 환수당할 위기에 몰려있는 것이다.
이러던 차에 검찰이 이 사건과 관련해 형법상의 업무상 배임 혐의로 수사를 재개하게 됨에 따라 이익치씨는 자칫 잘못했다가는 재산을 환수 당하는 동시에 형사처벌까지 받아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씨 스스로가 검찰 수사 자초한 셈**
검찰이 이처럼 이익치씨에 대해 형법상의 업무상 배임 혐의 수사를 재개하게 된 데에는 이씨 자신의 책임이 적지않다.
이씨는 단일후보 확정 전날인 지난 24일 서울지검 기자실에 나타나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 경영전략팀이 지난 99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를 앞두고 변호사들과 함께 수차례 대책회의를 갖고 대선후보인 정몽준 당시 현대중공업 고문 등의 소환에 대비한 답변자료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현대중공업은 98년 5~11월 한번에 10억~30억원씩 현대증권에 수십차례 돈을 보내고 직접 주가관리까지 했다"며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인 정몽준씨가 그같은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대책회의는 정 후보를 포함, 정씨 일가에 대한 검찰 소환에 대비한 답변자료를 준비하고, 현대중공업이 '통정매매'를 한 사실에 대한 해명논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개최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검찰이 정몽준 의원을 소환하면 참고인으로 언제든지 조사를 받겠으며 대책회의록 등 증거자료를 제출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씨가 이날 제출하겠다고 한 증거자료는 현대 경영전략팀이 99년 4월 12~22일 대책회의를 갖고 작성한 회의록과 현대중공업 및 정씨 일가 매매거래내역 등 7가지였다.
이씨는 이에 앞서 23일에는 정몽준 후보가 후보단일화를 위한 TV토론에서 '한나라당 사주설' 등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정 후보를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하기도 했었다.
이익치씨가 이처럼 서울지검 기자실에 나타나서까지 기자회견을 하는 등 검찰을 압박하자, '정치적 편파성' 시비를 우려한 검찰은 2년전 참여연대가 제기했다가 기소중지된 이씨의 업무상 배임죄를 함께 수사하기로 최종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찰은 이 과정에 이씨가 새 증거인양 제시한 7가지 자료에 대해서도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들 자료 대부분은 검찰이 지난 99년 현대증권 주가조작 수사 당시 압수수색 등을 통해 이미 확보했던 것으로, 새로운 것은 이씨가 공판과정에서 시인했던 진술을 '번복'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씨 주장을 '의혹 부풀리기 정치공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출국도 불가능, 법의 처분 기다려야 하는 신세**
검찰이 이렇게 형법상 배임죄로 수사하기로 함에 따라 이익치씨는 크게 당혹스런 처지가 됐다. 민사소송에서 이미 1심에서 패소한 사안인 만큼 형사재판에서도 유죄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이씨는 유사시 구속까지 될지도 모른다.
이씨를 더욱 당혹케 하는 상황은 25일 노무현 후보로 후보단일화가 성사되면서 정몽준 의원은 검증대상에서 빗겨나가게 됐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앞으로 아무리 이씨가 의혹을 제기한다 할지라도 언론이나 여론의 관심사밖으로 밀려날 공산이 농후해졌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고립무원의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더욱이 이씨는 귀국하면서 마음대로 출국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검찰이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싫든좋든 국내에서 법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치씨가 귀국하며 내건 '대의명분'대로 정몽준 의원은 이번 대선에 출마하지 않게 됐다. 이씨가 자신의 소원(?)을 성취했으니, 이제 자신에게 내려질 법의 처분을 감수할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이야기를 할 것인지, 앞으로 예의주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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