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미국'의 위기가 단연 요즘 세계의 화두다.
미국의 위기를 규명하기 위해 요즘 여러가지 분석도구가 동원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미국 지배세력 사이에 뿌리깊은 '남부 보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잣대를 동원한 분석이다. 지난 10년간 미국 경제계를 지배해온 남부 신우익의 성장신화 이데올로기가 최근의 부실회계 등 주식회사 미국의 몰락을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한 두 개의 글을 소개한다.
앞의 글은 미국 남부 보수주의가 미국의 메인스트림으로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오페라 칼럼니스트 황지원씨(http://mihakdo.mytripod.co.kr)가 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대한 분석이고, 뒤의 글은 최근 영국의 진보성향 주간지 옵서버의 평론가 윌 버튼이 쓴 칼럼이다.
***미국 보수주의의 정수를 보여준 <포레스트 검프>**
아카데미상을 휩쓴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4년작 <포레스트 검프>는 진보주의적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미국 남부 보수적 중산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정치영화'로 해석된다. 바보가 역경을 딛고 인간 승리를 이룩한 '휴머니즘 영화'로 위장했을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앨러배마주 태생의 바보(Gump)지만 '앞만 보고 달리는' 우직함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는 동화같은 스토리다. 여기서 그의 이름 포레스트(Forrest)는 악명높은 인종차별단체 KKK단의 창시자로부터 따온 것이며 검프는 '성공신화를 위해 달리는 보수주의자'를 상징한다.
영화는 검프가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옆사람에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검프 옆에 앉아있던 젊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흑인 여성은 이내 버스를 타고 검프 곁을 떠나버리고, 검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격려까지 해주는 백발의 백인 할머니는 미국의 보수주의를 가장 긍정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다.
월남전에 참전한 검프는 그곳에서 댄 중위라는 인물을 만난다. 댄 중위는 대대로 강직한 군인 집안 출신인데, 조상이 북군으로 남북전쟁에 참여했으며 그 또한 친민주당적인 인물이다. 댄중위는 "자네들 (당시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고향)아칸소엔 가봤나? 내가 거기 살았었는데...리틀락은 괜찮은 동네더군"이라고 말한다. 저메키스 감독은 그에게 두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준다.
댄의 중대원들은 모두 미국의 특정 주(State)와 연관된 이름을 갖고 있다. 이들 중대원들이 전멸할 위기에 빠졌을 때 검프가 제일 먼저 구출에 나서는 것은 텍스(Tex)라는 이름의 병사다. 미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신경써줘야 할 곳은 미국 보수의 본산인 텍사스(Texas)란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위력을 보여준 유명한 장면이 검프가 역대 미국 대통령들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다. 영화속에서 검프와 악수를 나눈 대통령들은 케네디, 존슨, 닉슨 등 세명. 저메키스 감독은 이 가운데 미국의 진취적인 진보성을 대변하는 존 F. 케네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롱을 보낸다.
케네디가 "기분이 어떤가( How do you feel)"라고 물었다. 검프는 이에 대해 "쌀 것 같아요(I got to pee)"라고 답했다. 진보진영에 대한 우회적 경멸이었다.
검프의 고향 여자친구 제니는 반전운동에 앞장섰던 진보적 여성이지만 불치병으로 죽어가면서 검프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한다. 영화평론가들은 이를 "위대한 미국의 발전에 우리 진보주의자들은 방해만 되었다"며 용서를 구하는 장면으로 해석한다.
제니가 걸린 병은 반전운동,히피문화,마약,프리섹스를 뜻하며 영화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메세지 "Go Home"은 "이제 방황은 그만하고 (공화당이 늘 강조하는) 미국의 가치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짧은 해병대 스타일 머리에, 악명높은 백인우월주의자의 이름을 가진 검프는 앞도 뒤도 안돌아보고 무조건 열심히 뛰기만 해서 엄청나게 성공했다. 반전이니 세계공영이니 인권이니 인종차별 철폐니 하는 이야기들은 실없는 소리라는 것이다.
두 다리를 잃은 불운을 '미국적'으로 극복하면서 검프에게 감동한 댄 중위에겐 아시아계 여인과의 결혼이라는 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행복을 위선적으로 선물했다.
***'안녕, 아메리칸 파이'**
옵서버지의 평론가 윌 버튼은 '안녕, 아메리칸 파이'이라는 논평에서 미국의 보수주의가 어떻게 미국 사회를 망쳤는지 설명한 다음, '보수주의 바이러스'가 영국 등 유럽도 위협하고 있지만 유럽의 전통에 기반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유럽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축을 투자로 연결시켜준다던 '주식회사 미국' 시스템의 진실은 막대한 미국의 대외채무와 미국 소비자들의 부채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이러한 사태가 언제 해결이 날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은 이러한 난국을 극복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회복될 것이다. 단, 그들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 혹독하게 겪어내야만 가능하다. '미국이 유례없는 기업중심의 경제와 금융선진국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매스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분식회계 사태가 썪은 사과 한 두개가 아니라 금융제도와 기업지배구조의 구조적 취약성이 전면적인 수술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는 점. 미국의 기업윤리가 형편없이 추악하며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는 점. 지속적 시행이 불가능하며 어리석은 정책을 추구하는 어떤 경제체제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극복과정을 겪어야만 한다는 현실 말이다.
이것은 수십억 달러를 분식회계한 기업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의 위기는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미국의 주류가 된 보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채 미국의 기업문화가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친시장적, 친기업적, 친주주적이어야 마땅하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으며 이는 돈이 지배하는 미국의 정치권으로 기업의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면서 조성된 정책 기조였다.
한 가지 예로 미국의 마시 캡터 의원은 "월드콤의 치열한 로비를 받아 탄생한 1996년 전기통신법이 엄청난 규제완화로 오늘날 분식회계 사태에 자양분을 제공했다"면서 이는 미국의 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생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기업계가 미국의 경영진과 입법부를 모두 사들였다는 게 진실이다.
사실 이러한 진실 때문에 미국이 처한 위기에 올바른 해결방안이 도출되기 어렵다. 부시 행정부는 보수주의 혁명과 이에 동반되는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집착이 강해, 위기극복에 반드시 필요한 사고방식의 전환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제 미행정부는 규제를 다시 강화하고 기업의 로비행위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한편, 무엇보다 성공적인 자본주의란 살찐 고양이들이 더 뚱뚱해지도록 내버려두고 노동자 보호정책을 축소시켜나가는 게 아니라는 사고의 전환을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보수주의가 워낙 뿌리가 깊어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이기도 하다.
38억달러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월드콤이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에 있는 기업으로, 보수강경파 상원의원인 트렌트 로트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해왔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분식회계사기를 저지른 엔론이 텍사스주에 있고 조지 부시 미대통령과 절친한 관계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 남부는 기독교, 시장주의, 미국제일주의와 기묘하게 얽힌 미국보수주의 본거지이며 이 보수주의에는 수그러들줄 모르는 남부의 인종차별주의가 가세하고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의 득세는 미국 남부 지역의 경제적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우파 사상가들은 모든 형태의 정부통제를 강압적이라고 비난하고 사회보장제도는 의존심을 키운다는 이유로 비하하면서 "자유"를 요구하는 대중적 구호를 유포시켰다.
이에 발맞춰 월가는 "기업은 최우선적으로 기업의 주인인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며 "규제는 기업정신을 손상시킨다"는 주장과 함께 이 대열에 합류했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과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이 구축한 사회체제는 '위대한 미국' 건설을 위해 해체되어 갔다.
지난 10년간 '위대한 미국' 건설은 인상적인 것처럼 보였다. 일장춘몽으로 끝날 것으로 보이지만 첨단기술 혁명을 이끈 미국의 리더십도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밑바닥은 허약했다. 기업경영진들은 환상적인 스톡옵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투자가들의 탐욕스런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익을 조작하는 편법을 써서 주가를 떠받치고 자신들의 부를 챙기려했다.
그들의 수법은 교묘한 것이 아니라 내년의 수익을 올해회계연도에 편입시키는 것에서부터 아예 매출을 허위 작성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기 등 '막가파'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기극은 가뜩이나 과열된 증시를 비정상적 수준으로 폭발시켜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가는 여전히 1929년이후 그 어느 때보다 미국기업에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증시가 지배하는 경제에서 이루어진 인수합병(M&A)의 결과는 대부분 비참했다. 기업가치가 증가한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오히려 기업가치를 하락시켰다. 1993~2000년 월가에는 3천5백개의 소규모 첨단기술업체들이 상장되었지만 닷컴 거품이 사라지기도 전에 절반 이상이 공모가를 밑돌거나 파산했다.
배당은 순익비율의 두 배 넘게 지급되는 반면, 미국의 대표적 기업들의 투자는 형편없이 적었다. 미국의 종업원 1인당 투자액은 프랑스나 독일보다도 적었다.
분식회계 사태가 빚어지면서 일반 미국인들은 연금보장과 보험사의 존립 여부를 걱정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무료건강보험, 질높은 교육, 노후.질병.실업에 대비한 일정 생활수준의 보장 등 사회보장제도가 새삼스러운 문제로 다가왔다.
미국의 주류에게는 부실한 사회보장제도가 기회, 자유, 재산형성 등을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사회적 희생으로 받아들여진다. 민주당이 시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지혜와 용기, 리더십을 갖고 있다면, 앞으로 치열한 정치적 파장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보수주의 조류는 미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 예로 영국의 정치.금융.기업계도 똑같은 '보수주의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있다. 대처 여사뿐 아니라 토니 블레어 총리와,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도 미국의 기업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보수주의의 공격 앞에 위축되어 유럽의 경제사회적 모델이 치유불가능할 정도로 취약하기 때문에 미국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되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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