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경선에 출마중인 이인제 후보가 김대중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 척결을 주장했다. 이 후보의 발언은 김 대통령과의 '결별'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인 동시에, 노무현 후보에게도 '선택'을 압박하는 정치공세로 해석되고 있다.
***김 대통령 친인척 비리는 경선주자들의 '성역'이었다**
이 후보는 5일 대구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경선연설에서 "대만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부패연루 소문이 있던 며느리를 자결토록 했다"며 "선진국으로 가려면 부패를 일소해야 하며, 현 정권도 온 국민이 고통스러워하는 대통령 친익척 비리와 권력형 비리를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쓰레기가 있으면 이 정권에서 다 정리하고 가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다"며 "놀러가서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돌아오면 비온 뒤 서해안으로 흘러들어가 꽃게도 못 크게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독하게 '작심'을 한 뒤 한 말로 들렸다.
이 후보의 이날 발언은 민주당 경선 출마주자들 가운데 나온 최초의 김 대통령 친인척 비리 척결 발언이다. 지난 3주동안 민주당 후보들은 수많은 연설과 토론을 벌였지만, 대통령 친인척 비리 문제만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일종의 '성역'이었다.
DJ 친인척 비리는 민주당 경선과 함께 국민 양대 관심사중 하나인 중대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민주당 경선후보들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같은 침묵은 우선 민주장 경선후보들의 '현실적 계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당 국민경선은 투표권자의 절반을 일반국민에게 배정했으나, 중심핵은 어디까지나 나머지 절반의 투표권을 쥐고 있는 민주당 대의원들이다. 민주당은 아직까지도 김대중대통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조직이다. 이런 조직의 대의원들을 상대로 김 대통령 친인척 비리 척결을 얘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살행위'다.
더욱 민주당내 기저에는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가 '침소봉대(針小奉大)'되고 있다"는 불만이 적잖이 깔려있다. 역대 정권 비리와 비교하면 규모도 크지 않고 아직 구체적 혐의도 입증된 게 없는 데도 불구하고, 지난해 언론 세무조사 과정에 현정부와 사이가 크게 벌어진 메이저언론들이 이를 의도적으로 부풀리기식 보도를 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때문에 한 표가 아쉬운 민주당 경선후보들은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극구 기피해온 게 사실이다.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이같은 침묵이 가능했던 또하나의 이유는 '언론'에게 있다. 언론은 그동안 여러 형태도 경선후보들을 상대로 토론회를 열고 인터뷰를 해왔다. 그러나 누구도 대통령 친인척비리 문제를 토론 의제로 끌어내지 않았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 문제는 후보들의 정치적 입장을 검증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중 하나다. 경선 후보들이 당장 눈앞의 득표라는 현실적 이익에 위반되더라도 이같은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떳떳이 밝힐 수 있는지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분명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 날카로운 잣대를 후보들에게 들이대지 못했다. "친인척 비리는 물론이고, 범국민적 의혹과 저항을 사고 있는 국방부의 F15 선정 의혹 등도 잣대로 들이대지 못한 언론이니..."라고 언론 수준을 탓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토론이나 인터뷰 전에 후보측과 의제를 사전조정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도 언론계 내부에는 엄존하고 있다.
진짜 속내가 어떠했든 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김 대통령 친인척 비리는 그동안 민주당 경선과정에 '성역'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인제 후보가 5일 이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대통령 친인척 비리 문제는 앞으로 경선후보들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하는 핵심의제중 하나로 자리매김됐다.
***이 후보의 노림수는 DJ 아닌 노 후보**
이 후보가 '성역'을 깬 노림수는 여러가지로 해석가능하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김심 음모론'의 연장선상에서의 노림수이다.
이 후보 역시 그동안 김 대통령 친인척비리에 대해 침묵해온 여타 경선후보중 한명이었다. 그는 그러나 광주 경선 직후 음모론을 제기하는 순간부터 민주당내 김 대통령 지지세력으로부터 배반자로 낙인찍혀 등돌림을 당했다.
이런 등돌림 과정에 그는 이번에 김대통령 친인척 비리 문제를 공론화하고 나섰다.
음모론적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김 대통령에 대한 이 후보의 서운함과 불만의 표시가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후보의 노림수는 김 대통령이 아닌 노무현 후보라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노 후보에게 김 대통령과의 관계를 분명히 선택하라는 정치적 압박공세라는 해석인 셈이다.
노 후보 역시 그동안 김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노 후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87년 분열되었던 민주세력의 대연합'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이같은 구상에 대해 소수이기는 하나 민주노동당등 일부에서는 강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노 후보가 말하는 민주세력은 87년이후 지금까지 YS대통령, DJ대통령 시절을 거치면서 기성정치권으로서 온갖 기득권을 누려왔으며 지역주의에 편승해왔던 세력이다. 그리고 집권세력이 되어 온갖 부패게이트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정치세력임을 국민들은 지난 10여년간의 역사에서 확인하고 있다."(민주노동당 3월28일 성명)
요컨대 어떻게 각종 부패혐의에 연루돼 있는 DJ, YS 정권시절의 친인척 및 측근세력들까지 두리뭉실 민주화세력으로 포장할 수 있느냐는 의문 제기였다. 때문에 이인제 후보의 이번 김 대통령 친인척 비리 척결 주장은 노 후보로 하여금 김대중 대통령 및 더 나아가 김영삼 전대통령과의 분명한 관계 설정을 요구하는 정치공세 성격이 짙다 할 것이다.
***이제 공은 노 후보측으로...**
어쨌든 이 후보의 문제 제기로 이제 공은 노무현 후보에게 넘어간 양상이다. 이인제 후보는 앞으로도 계속해 이 문제를 걸고 나올 것이다. 그럴수록 노 후보는 대통령 친인척 비리와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입장 표명을 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노 후보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노 후보가 현재의 광범위한 전국적 지지율을 끝까지 자신한다면, 과감히 김 대통령의 친인척 및 측근비리 척결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내 일부 지지세력의 지지를 잃더라도 그로 인해 보다 많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선택인 까닭이다.
그러나 최소한 경선이 끝날 때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을 피하는 형식의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에 대한 입장 표명은 현재 검찰이 진행중인 수사상황을 본 뒤 최종 입장을 밝히겠다는 식의 선택이다.
노후보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해진 것은 이제 김 대통령의 친인척 및 측근 비리 문제는 경선쟁점, 더 나아가서는 대선쟁점으로 공론화됐다는 사실이다. 김 대통령과의 관계야말로 노 후보가 넘어야 할 또하나의 간단치 않은 산봉우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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