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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는 마음에 대한 억압" 350년전 아일랜드 목수가 세상에 던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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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는 마음에 대한 억압" 350년전 아일랜드 목수가 세상에 던진 말

[인물로 본 세계사] 망치질로 세상을 바꾼 윌리엄 에드먼슨

어느 시대나 '시대를 앞서간 사람'은 욕을 먹는다. 칭찬은 죽고 나서야 온다. 윌리엄 에드먼슨(William Edmundson, 1627~1712)도 그랬다. 살아서는 감옥을 밥 먹듯 드나들고, 총독에게 욕을 먹고, 심지어 청교도 신학자 로저 윌리엄스(1603~1683)에게 "무지와 무례함의 덩어리"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 역사는 그를 달리 부른다. 노예제에 맞선 최초의 조직적 항의 목소리를 낸 사람, 아일랜드 퀘이커 운동의 아버지, 그리고 두려움 없이 권력에 맞선 한 평범한 목수.

목수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양심의 투사로

에드먼슨은 1627년 영국 웨스트모얼랜드 주(州) 리틀 머스그레이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삼촌 손에 자랐으며, 열세 살에 목수 견습생이 되었다. 톱질과 대패질로 손을 굳혀갈 무렵 영국 땅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불붙었다. 에드먼슨은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의 의회군에 입대했고, 1650년에는 스코틀랜드 원정에까지 참가했다.

그러나 전쟁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체스터필드에 주둔하던 어느 날, 그는 처음으로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다. 총과 칼 대신 침묵과 내면의 빛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군인에게는 낯설고도 이상한 풍경이었지만, 에드먼슨의 마음 어딘가가 흔들렸다.

1652년, 그는 제대했다. 아내 마거릿 스태니퍼스(Margaret Staniforth, ?~1689)와 함께 아일랜드로 건너가 형 존과 합류해 앤트림에서 포목상을 열었다. 1653년, 잉글랜드로 물건을 사러 갔다가 퀘이커 제임스 네일러(1618~1660)의 설교를 듣고 완전히 개종했다. 이듬해인 1654년, 아내와 형, 그리고 몇몇 이웃과 함께 러건(Lurgan)에서 아일랜드 최초의 퀘이커모임을 열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냥 모여서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감옥은 그의 두 번째 집이었다

퀘이커 교도로 산다는 것은 당시 아일랜드에서 자청하여 고난의 길을 걷는 일이었다. 퀘이커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예배 참석거부, 십일조납부 거부, 군복무 거부로 끝없이 당국과 충돌했다. 에드먼슨은 아마(Armagh), 케이번(Cavan), 벨터벳(Belturbet), 마리버러(지금의 포틀라오이즈) 등 아일랜드 곳곳의 감옥을 돌아가며 투옥됐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전국 교도소 투어"를 완수한 셈이다. 물론 그가 원해서 간 건 아니었지만.

박해를 피해 1659년 아일랜드 중부 로즈널리스(Rosenallis) 근처 틴닐(Tinneal)에 농장을 마련하고 정착했다. 이곳이 그의 남은 생을 위한 근거지가 되었다. 그런데 피신한다고 평화로워지지 않았다. 1689~1691년 윌리엄 3세(1650~1702)와 제임스 2세(1633~1701) 사이의 전쟁이 아일랜드를 휩쓸면서 그의 농장도 약탈당했고, 두 아들은 아일랜드 반군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다. 아내 마거릿은 어느 날 군인들에게 벌거벗겨져 한겨울 추위에 내버려졌고,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에드먼슨의 삶은 결코 낭만적인 순례자의 여정이 아니었다.

대서양을 건너 노예제에 맞서다

그럼에도 에드먼슨은 멈추지 않았다. 1671년, 그는 퀘이커 지도자 조지 폭스(1624~1691)와 함께 첫 번째 아메리카 대륙 선교여행에 나섰다. 바베이도스, 자메이카를 거쳐 지금의 미국 동부해안 지역,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까지 누볐다. 1675년에 두 번째, 1676~1677년에 세 번째, 1683년에 네 번째 방문을 했다. 지금이야 비행기가 있지만, 당시 대서양 횡단은 몇 달에 걸친 목숨을 건 항해였다.

그 여정에서 에드먼슨은 역사에 남을 행동을 했다. 1676년, 그는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에서 노예를 소유한 지역 모든 퀘이커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노예제는 마음에 대한 억압이다"라며, 신앙인으로서 다른 인간을 소유물로 삼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편지를 조직적인 형태로 노예제에 반대한 최초의 공개성명 중 하나로 평가한다.

이 발언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1676년이라는 시대를 기억해야 한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한창이었고, 바베이도스는 설탕과 노예로 굴러가는 섬이었으며, 영국식민지 지배자들은 노예소유를 신이 허락한 경제 질서로 여겼다. 그 시절 에드먼슨의 발언은, 지금으로 치면 재벌집 사람들 앞에서 "기업세습이 틀렸다"고 외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었다.

바베이도스 총독은 에드먼슨을 "흑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반란을 부추기는 자"라며 고발했다. 에드먼슨의 항변은 소박했다. 그들에게도 신의 빛이 있다. 이 씨앗은 이후 노예폐지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벤저민 레이(1682~1759), 존 울먼(1720~1772)을 거쳐 마침내 영국이 1807년 노예무역을, 1833년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는 길로 이어졌다.

아일랜드 목수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

에드먼슨의 삶은 몇 가지 이유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말을 건다.

첫째, 그는 권력의 언어가 아닌 양심의 언어로 말했다. 그는 국회의원도, 귀족도, 법학자도 아니었다. 목수였다. 그러나 그가 던진 "인간을 소유물로 삼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침묵하는 동안 역사의 방향을 바꿨다. 오늘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 그 말이 누구 입에서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에드먼슨은 보여준다.

둘째, 그는 자기 공동체 안을 먼저 바꾸려 했다. 에드먼슨은 외부사회를 향해 먼저 손가락질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퀘이커 교도들, 즉 '우리 편'에게 먼저 편지를 썼다. 노예를 소유한 것은 이교도나 악당이 아니라 바로 같은 신앙의 형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이 자기 내부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할 때 그 목소리는 힘을 잃는다. 에드먼슨의 태도는 내부비판의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러준다.

셋째, 그는 결과를 살아서 보지 못했다. 에드먼슨이 1712년 세상을 떠났을 때, 노예제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는 한 세기 넘게 자랐고, 결국 열매를 맺었다. 지금 한국에서 기후위기, 청년빈곤, 젠더불평등 같은 구조적 문제에 맞서는 이들에게도 같은 위안이 필요하다. 당장 세상이 안 바뀐다고 해서, 그 외침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넷째, 그는 이주민이었다. 영국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 정착한 에드먼슨은 식민지 이주민으로서 오히려 피식민지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비범한 감수성을 보였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다문화 가정이 급증하는 현실 속에서, 에드먼슨이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보여준 태도, 기득권자이면서도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선다는 값진 참고가 된다.

다섯째, 그는 철저히 비폭력이었다. 군인 출신임에도 퀘이커가 된 뒤로는 어떠한 폭력도 거부했다. 감옥에서도, 약탈 앞에서도, 아내를 잃고도 그는 무기를 들지 않았다. 우리사회의 갈등이 날로 격화되는 시대에, 신념을 지키되 폭력에 기대지 않는 저항의 방식은 여전히 유효한 물음이다.

망치질로 쌓은 것

윌리엄 에드먼슨은 1711년 더블린 퀘이커 모임에 마지막으로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쓰러졌다. 이듬해 1712년 8월 31일, 여든네 살의 나이로 틴닐의 농장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일랜드 로즈널리스의 퀘이커 묘지, '친우들의 잠자는 곳'이라 불리는 그곳에 지금도 그의 묘비가 서 있다.

그는 목수였다. 목수는 나무를 쪼개고 못을 박아 무언가를 세운다. 에드먼슨이 세운 것은 집이 아니라 양심의 건축물이었다. 3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건물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역사가 한국의 어느 이름 없는 사람에게도 같은 평가를 내릴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윌리엄 에드먼슨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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