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꿈을 꾸는 이를 보았다. 노동운동가 한석호,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이다. 평소 그의 호기로우면서도 애절한 이야기를 경청하다, 서울 모처에서 강연이 있다는 소식에 간만의 서울 나들이를 했다. 그는 첫마디에 자신을 '실패한 노동운동가'라 규정했다. 무엇이 '귀족노조'라는 비아냥까지 듣는 고소득 집단의 전직 간부인 그가 자신을 실패자라고 호명하게끔 했을까?
한석호 씨가 무슨 현대차 정규직처럼 고소득자는 아니다. 수입이 변변찮은 활동가로 오랜 시간 지냈기에 자식의 사교육비를 댈 여력도 부족했다(그는 딸아이가 수학 학원 좀 보내달라고 무척 졸랐지만, 가치관상 정규(?) 사교육은 끝내 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주변 지인들이 공부 동냥을 해주었다고 한다). 열혈 활동가들이 그러하듯, 한석호 씨 역시 여러 번의 투옥 등 고초를 겪었다. 영화 <1987>에 대한 그의 짧은 소회를 여기 소개한다.
"꽤 잘 만든 영화인 듯싶다. 박종철 죽기 일주일 전 보안사 서빙고분실 지하실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물고문 당하며 기절하기도 했던, 그래서 내 죽음이 될 수도 있었던, 그러면서도 세상 바꾸겠다는 열의로 펄펄 끓던 내 청춘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돌아갈 수만 있으면 돌아가고픈 시절이다. 어떤 영화인지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못 볼 것 같다.
당시 죽어간 그들, 그 이전, 또 그 이후 죽어간 숱한 이들의 심장에 박혀 있던 중심은 평등한 세상이었다. 당시의 그들이 바란 것은 형식적 민주주의만이 아니었다. 그 정도였으면 그들은 죽지도 않았다. 그런데 세상은 더 불평등해졌다. 밑바닥에서 비정규직과 하청노동과 불안정 청년 등의 주변부 노동자들 및 영세상인 등이 세상을 한탄하고 있는데, 운동은 무능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라고 해도 북유럽만큼의 평등 조건은 만들어야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차마 못 볼 것 같다. 그들에게, 그들의 죽음에, 현재의 운동이 너무 초라해서, 여태껏 운동을 하면서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내가 너무 초라해서, 미안하고 죄송해서, 끝내 못 볼 것 같다. 그래도 딸과 아내와 할매에게는 꼭 보라고 할 생각이다." (한석호의 페이스북에서 발췌)
한석호 씨는 1987년에 근거한 지난 30년의 노동운동은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지난 시기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과를 간과해서는 안 되고, 우리 사회의 실패에는 정치와 기업 권력의 책임이 막중하지만, 자기 임금과 고용만 챙기는 데 집중하며 격차 확대에 기여해온 노조의 폐해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의 중대한 존재 의의가 개별 기업을 뛰어 넘은 노동자간 연대의 창구임을 인식한다면, 한국 노동운동이 실패했다는 그의 인식은 처절하게 정확하다. 한국의 노조와 노동운동의 주류는 노동자 사이의 단합과 연대를 북돋우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노동운동이 격차 심화에 끼친 해악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노조의 존재 가치 자체를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 한국 중심부 노동운동의 크나큰 해악이다.
한석호 전 위원장은 "주변부 노동자와 함께 살기 위해 중심부 노동자의 임금을 동결하고, 그 동결분으로 기금을 만들어 청년 노동자 일자리 지원,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 등의 처우개선,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에 따른 영세 상공인 지원 등에 쓰자"고 줄기차게 선도적으로 주장해 왔다.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고소득층의 급여는 묶어두는 대신 노동자의 양보로 격차 완화를 위한 자금을 확보하자는 간언이다. 기존 노동운동 풍토에서는, 그의 말처럼, 용납될 수 없었던 이단적 주장이다. 재벌과 부자의 곳간을 여는 데 전력하지 않고 노동자가 내 몫을 양보한다는 건 그 동네에선 욕먹기 딱 좋은 망언이다. 한 전 위원장이 제시하는 방안의 기술적인 난점이나 실효성 등은 일단 차치하자. 주목할 지점은 노동자가 양보를 주도해 만들고자 하는 흐름이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자본주의 체제에는 양보·타협·협조하면서, 노동자끼리는 양보도 타협도 협조도 않는 것이 대한민국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이다. 재벌과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들까지도 중심부·주변부 할 것 없이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한 극단의 경쟁사회에서 나눔·양보·타협 등은 노동운동이 기피해야 할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중심부 노동자에게, 아니 모든 노동자에게 양보와 타협정신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래도 좀 먹고 살 만한 이들이) 밑바닥과 공감하게 해야 한다.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함께 살기 위해 양보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 이 같은 연대와 평등의식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런 상황에서의 기승전 '(임금)투쟁' 주장은 노동 분단을 더욱 심화케 하는 헛발질에 다름 아니다. 중심부 임금은 더 상승하고 주변부는 더 도태되는 상황을 강화시킬 것이다. 노동운동이 반동을 심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도 있다. 노동운동은 안팎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이 사회가 내 몫의 양보를 통해서라도 비정규직 문제, 하청노동자 문제, 불안정 청년 문제를 풀자고 설득해야 한다. 사업장 안에서는 조합원 반대가 있더라도 계속 시도해야 한다. 노조 선거에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한 맺힌 노동운동가의 안타깝고 간절한 호소다. 이런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한국 노동운동의 주류였다면, 노조 조직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 수준을 헤매지는 않았을 테다. 그저 귀족노조가 망국의 원흉이라고 선동하는 부유층의 주구들이 활개 치지도 못했을 테다. 분명 지금보다는 한결 나은 한국을 만드는 데 노조와 노동자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을 테다.
연대는 욕구에 충실할 때 강해진다
한석호 전 위원장처럼 측은지심의 고양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이 같은 생각이 더욱 널리 퍼지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런데 인간과 사회를 바꾸는 동력으로 이타심이나 측은지심만으로는 역부족인 측면도 없지 않다. 우선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이유가 미궁으로 남아있는 여타 국가들의 연대임금제부터 살펴보자. 북유럽과 서유럽의 상당수 국가는 일찍이 산별노조와 같은 초기업적 노조를 통해 노동자간 임금양보(연대임금제)와 격차 축소를 실현한 바 있다. 50~60년대에 가장 왕성했던 연대임금의 바람직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초기업적 노사관계가 여전히 제일 활성화된 나라들은 저임금층의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임금격차도 작은 편이다. 고용률도 가장 높거나 다들 양호하여 경제와 가계 살림살이에 큰 탈이 없다. 여러 통계에서 선진국으로 꼽힌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필자의 이전 칼럼 '최저임금만 올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바로 보기)'에 관련 도표가 실려 있다).
이렇듯 노동자끼리의 양보와 연대를 대대적으로 구현하는 일은 노동자는 물론 국가와 국민 전체에도 매우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한데 무엇이 그네들 나라에서 다수 노동자로 하여금 그런 양보에 동조케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추리해보자면, 노동자의 단결을 강조했던 마르크스의 긍정적 영향을 하나 꼽을 수 있다. 노동자 간 동질감을 다지고 단결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단기적인) 소득 감소를 감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이야기다. 또 산업혁명 이후 2차 세계대전 종식 전까지는 거대한 경제위기와 대규모 파업이 반복됐던 시기였으므로, 마르크스와 별개로 '뭉쳐야 이롭다'는 사고가 강력하게 존재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길드 등 직종별 협력단체의 오랜 전통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의 경우 이 같은 배경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게다가 마르크스를 파는 자들의 태반은 입으로만 '하나의 노동자'를 외칠 뿐, 이를 위해 노동자 스스로 몫을 나눠 연대의식을 키우는 일은 극구 반대한다.
한석호 전 위원장은 (연대임금제와는 다소 다르지만) 임금양보와 사회연대기금의 조성을 통해 나눔과 양보의 사회 흐름을 만들고, 이에 더해 정책과 제도를 바꾸는 실천운동, 즉 복지와 증세에 노조가 앞장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노동운동의 환골탈태에 힘입어 연대적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획기적인 세금 인상과 복지 강화가 이뤄지길 나 역시 학수고대한다. 다만 앞서 말했듯 측은지심이나 이타심의 확산은 너무도 필요하되, 그것만으로는 복지와 증세를 위한 자기 몫 양보와 연대의 동력이 부족하다.
예컨대, 일반 소득층도 세금을 많이 내기로 유명한 스웨덴의 세금과 복지에 대한 장기 인식조사를 보면 꺼림칙한 모습이 관찰된다. 노후, 의료, 초중등교육을 위해 세금을 더 내겠다는 답변은 60~75%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만, 사회부조(기초생계비)를 위해서는 25~40%만이 세금을 더 낼 수 있다고 응답한다. 이뿐 아니다. 스웨덴 국민은 대부분의 복지 부문에 세금 투입이 늘어나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회부조와 주택수당(통상 저소득층에 한정)에 대해서는 거의 항상 줄이거나 그대로 둬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과연 저 나라가 착한(?) 사람들로 가득한 복지강국인지 의문이 들게끔 하는 대목이다.
시사점은 여러 가지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요지는 이것이다. 사람은 어디에 살든, 누구든 다면적이면서도 비슷비슷하다. 더불어 살자는 이타심의 확장은 복지 발전과 세금 확충을 위해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세금을 더 내고 복지를 늘릴 때 '일단 나부터' 이득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수가 가지는 게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이런 환경에서 세금을 풍부하게 걷을 수 있고, 또 그 세금으로 (광범위하지만 소극적인 여론의 반감을 무릅쓰고) 저소득층 복지를 튼튼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세 운동을 주도하는 시민단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의 남재욱 박사는 사회연대를 강화하는 복지 발전이 인간의 측은지심보다는 이기적 욕구와 오히려 더 밀접할 수 있음을 영국의 예를 통해 알려준다. 아래는 그의 <프레시안> 기고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 복지국가의 핵심 프로그램인 국민보험은 보편주의의 엄격한 동등성 원리에 따라 설계됐다. '누구나 같은 제도에 포함된 것'뿐 아니라 기여와 급여를 모두 정액으로 하였다. 그러나 정액 보험료와 정액 급여에 기초한 체계로는 급여 수준을 낮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급여로는 빈곤을 막을 수 없었고, 중산층 이상이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이 문제를 해소하려면 급여 수준에서만이라도 선별주의 원리의 결합이 필요했다. (...) 그러나 영국에서 이와 같은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증가하는 빈곤 문제에 대해서는 잔여적 프로그램인 사회부조로 대응했다. 중산층 이상은 고용주와의 협상을 통한 직업 연금이나, 사적 연금 등 시장이 제공하는 복지에 의존했다. (...) 결과적으로 영국 국민은 낙인 속에서 사회부조를 수급하는 이들과 공적 복지체계를 벗어나 시장에서 복지를 구매하는 이들로 분리되었다. 보편주의의 이상이 '하나의 제도 안에 전체 시민을 포괄함으로써 사회적 연대성을 확대한다'는 것에 있음을 고려하면 매우 역설적이다. 동일한 제도, 동일한 급여로 보편적인 사회보장을 추구한 프로그램이 오히려 사회적 연대성을 약화시킨 것이다." (☞바로 보기)
이처럼 개개인의 욕구를 채우는 데 소홀했던 영국은 복지 확충의 성과를 온전히 끌어내지 못했다. 저소득층도 그 이상의 계층도 나름의 곤란과 불만을 가졌고, 자연히 견고한 사회연대 구축에도 실패했다. 증세와 복지의 확대, 곧 나눔과 연대의 강화는 언뜻 보면 극히 이타적으로,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을 십분 자극해야 달성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 본연의 개별 욕구에 적극 부응하면서 추진돼야 성공할 수 있다. 즉, 기본적으로 이기적 욕구에 충실한 가운데 이타적 욕구도 상당 부분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를 짜는 것이 제 앞가림에만 급급한 현 풍토를 뒤집을 관건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에는 대대적인 임금 양보가 이뤄질 만한 역사적 동인이 희박하다. 또한 복지빈국이라는 환경 하에서 시장소득 의존도가 떨어지기 어렵기에 각자의 연대심을 일깨우자는 호소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양보에 등을 돌리는 이들에게 갖은 비난을 퍼붓는다고 될 일도 아니다. 특별한 심성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아무리 벌어도 부족한 게 사람 마음이다. 무엇보다 복지가 든든하지 않다면, 인간의 여러 욕구 중에서도 금전적 욕구가 유난히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소위 상위 10%의 문제점을 환기하는 것은 현시대에 각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한데 그러한 문제제기가 호화 부유층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불이행에는 눈을 감으면서 벌이가 괜찮은 노동자의 허물만 공격하는 보수진영의 꿍꿍이에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노동 진영에 양보와 연대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연대임금제나 그에 준하는 임금 양보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한 전 위원장이 희망하는 바와 같이 민중에게 진한 울림을 줄 수 있는 노동운동의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금을 통한 소득 양보와 복지 확대가 달성된다면 일말의 변화 여지가 있다. 한국 국민 다수가 유무형의 큰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자살률과 출산율, 스트레스가 팽배한 직장 생활, 남녀 모두에게 해로운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잔재, 만연한 불안과 낮은 삶의 질, 부족한 일자리와 어두운 경제 전망 등 한국인을 괴롭히는 문제들은 보편적인 세금 인상과 효율적인 복지 확대를 바탕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다. 또 세금과 복지의 확대는 결국 시장소득 격차까지 줄이게 되고, 이는 곧 고임금의 실질적 삭감이 수반됨을 의미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권이 정신을 차려 세금과 복지의 중요성을 각성하고 고질적인 조세저항을 누그러뜨려야한다는, 초고난도의 과제가 버티고 있다. 그래도 뚜벅뚜벅 이 길로 가야 한다. 극단의 경쟁사회를 종식시키고 양보와 연대를 제도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우리는 이 길로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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