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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 저항 이겨내는 정치가 훌륭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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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 저항 이겨내는 정치가 훌륭한 정치

[민미연 포럼] 문재인 정부, '톨스토이적 행복국가'를 꿈꾸는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리나>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고 관조했다. 이 사유는 국가로 옮겨도 상당 부분 들어맞는다. 각 구성원이 고루 잘 사는 나라는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꽤 단순하다. '맞벌이를 용이하고 당연한 일로 만들고, 이를 기초로 고용을 제고하는 한편 개인 및 가구 단위의 소득 격차를 줄인다.' 이러한 톨스토이적 관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살림살이 정책은, 역대 정권이 그랬듯 기대만큼의 성과는 없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내년에도 3%대 성장을 이어가고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을 자신한다"며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새 경제정책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어 개개인의 삶이 나아진다는 것을 국민이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5월 29일 경제 현안 긴급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전기 대비 성장하고 가계소득이 증가하는 등 거시경제 상황이 개선되고 있지만 최근 1분기 가계소득동향 조사 결과 하위 20%(1분위) 가계소득 감소 등 소득분배 악화는 우리에게 매우 아픈 지점"이라고 토로했다. 외치의 눈부신 성과에 비해 내치, 특히 살림살이 부문은 신통치 않은 실정이다. 어디가 꼬인 걸까?

먼저 국민의 체감을 중시하는 현 정부의 국정 기조에 맞는 지표부터 확인한다(난 이 통계가 청와대 상황판에 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156개국 대상의 국제 조사가 있다. "가능한 최악의 삶(the worst possible life)을 '0'으로, 가능한 최상의 삶(the best possible life)을 '10'으로 놓았을 때,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2018년 세계 행복 지수(World Happiness Report) 기준(2015~17년 평균), 한국 국민의 평점은 5.87로 OECD 35개국 중 30위다.

156개국 기준에서는 57위로 그럭저럭 선방이다. 1인당 GDP 3만 달러를 고려하면 훨씬 높아야 하지만, '한국보다 못한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헬조선 타령이냐'는 세간의 핀잔에는 어쨌든 부합하는 순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속내까지 봐야 한다. 한국은 개개인 간 체감도 차이가 크다.

2016년 보고서 기준(2012~15년 평균), 삶의 질 평점에 대한 표준편차를 보면 한국은 2.155로 OECD 35개국 중에서는 31위, 전체 조사국 156개국 중에서는 96위에 자리한다. 삶에 대한 한국인들의 평가가 크게 양극화돼 있다는 뜻이다. 2.079의 토고, 2.084의 짐바브웨, 2.122의 파키스탄처럼 아프리카나 중앙아시아의 경제 빈국보다도 한국의 표준편차가 크다. 동경 받는 경제 성장의 나라 한국에서 풍요 속의 빈곤에 노출된 이들은 '헬조선'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한 가지 위안(?) 삼는다면, 미국의 표준편차 역시 2.066(85위)로 분열이 심화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미국 국민의 전체 평점은 6.886(18위)로, 초강대국의 명성에는 모자라지만 한국보다는 한결 높다.

문 대통령의 국정 철학은 나아지는 삶을 단순히 경제지표가 아니라, 국민이 실생활에서 체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이 직접 매긴 삶의 질 점수가 진짜로 높은 나라들, 즉 평점과 편차가 모두 좋은 나라들에서 배울 거리를 찾아야 한다.

여성의 활발한 노동시장 진출은 체감지수 최선두 국가들의 핵심 공통분모다. 이때 저임금을 방지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여성이 남성 못지않게 일자리를 갖고 급여도 충분하다면, 남성이 과로도 불사하며 여성 몫까지 벌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악을 쓰며 고임금·고소득에 몰두해야 할 동기부여가 희박해지는 것이다. 국민이 고루 잘 사는 나라들, 바꿔 말해 국민의 삶에 대한 평가가 우수한 나라들은 '일반화된 맞벌이와 작은 임금 격차'의 쌍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은 정확히 반대다. 남성 고용률은 준수하지만 여성 고용률은 OECD 최하위권이고, 남녀 및 전체 임금 격차도 가장 큰 편이다. 격차를 무시하고 봐도 한국처럼 여성의 경제활동이 저조하다면, 문 대통령의 바람과는 달리 국민 체감이 개선될 확률이 없다. 터키, 칠레, 멕시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소문난 문제 국가들과 한국의 공통점은 여성 고용률과 삶의 질 점수가 모두 나쁘다는 것이다.

'톨스토이적 행복국가' 중에서도 북유럽 다섯 나라의 해법을 주목할 만하다. 이들 나라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남성만큼 왕성하다. 전체 고용률이 높을 뿐 아니라 성별 고용률의 차이가 3~5%로 가장 작다. 이는 '실용적인' 복지가 뒷받침하기 때문이다(유럽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북유럽 5개국 여성의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게 나타난다).

OECD는 복지 종류별 통계를 작성한다. 그 가운데 '의료를 제외한 사회서비스' 항목이 있다. 보육을 필두로 양로, 돌봄, 간병 등 대인서비스를 망라한다. 모두 고용창출형 복지다. 그 자체가 일자리일 뿐 아니라, 가정사로 인한 경력 단절을 방지한다. 이에 더해 '적극적 노동시장정책'도 있다. 취업알선, 재취업교육 등 현물로 제공되는 실업복지를 의미한다. 북유럽 5개국의 '사회서비스+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단연 최상위권이다. 북유럽 평균이 GDP 대비 6.7%이고 OECD 평균은 2.8%다. 한국은 1.9%에 불과하다. 한국의 GDP로 환산하면 2016년 기준 북유럽이 109조 원, OECD가 46조 원, 한국이 31조 원이다. 안 그래도 여성의 경제활동에 제약이 많고 경력단절이 극심한 한국에서 '핀셋 증세' 따위로 이렇다 할 성과를 기대하는 건 과욕이다.

문 대통령은 소득분배 악화가 매우 아픈 지점이라고 언급했다. 좀 까칠하게 말한다면, 원래 극악한 분배 상태가 악화됐다고 속상할 일도 없고, 자잘하게 좋아졌다고 박수 칠 일도 없다. 혹시 대통령이 '한국의 지니계수가 국제 비교상 괜찮다던데…' 정도로 알고 있다면, 이제라도 진상을 다시 파악해야 한다. 한국의 지니계수는 현실을 감춰온, 오래된 통계 사기였다. 한국처럼 국민의 체감 지표가 열악한데도 소득 분포가 고른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김낙년 동국대 교수와 경제학자 피케티 등이 연구한 각국의 소득 점유율 지표는 여러 격차 통계 중 현실 반영도가 가장 충실하다).

격차를 호전시키는 정치의 최대 역할은 세금과 복지다. '톨스토이적 행복국가'들은 이 대목에서도 같은 이유로 우수하다. 복지 분류에는 '장애, 질병 등으로 인한 근로곤란(Incapacity related)' 항목이 있다. 하위소득층에 속하기 십상인 취약지대를 지원한다. 북유럽 5개국의 Incapacity related 복지 지출은 GDP 대비 3.9%다. OECD 평균은 2.1%, 한국은 0.6%다. 금액으로 보면 61조 원, 35조 원, 10조 원이다. 이거 하나만 '사람 사는 세상' 흉내 좀 내보려 해도, 일부 부유층의 증세로는 어림도 없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내국인도 차별하는 한국에서 난민을 곱게 보지 않는 여론이 드센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평소 자국민 약자도 팽개치는 나라에서 '난민에게 인정을'이라며 호소한다는 게 생뚱맞다.

한국의 부도덕성은 현금복지의 계층별 배분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균등화가처분소득 기준 상위 20% 소득층은 현금복지의 24.6%를 차지한다. 그렇다. 복지가 저소득층에 이롭도록 하후상박 누진적이 아니라, 상후하박 역진적이다(시장소득 기준으로는 미세하게나마 하후상박이 이뤄진다). 이 복지 배분은 북유럽 국가들도 잘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썩 괜찮은 나라들도 제대로 대처한다.

일례로, 하후상박이 가장 강력한 호주의 현금복지는 하위 20%에서 상위 20%까지 차례대로 42.4-29.5-16.0-8.2-3.8(%)로 나눠진다. 스위스는 30.1-22.5-18.9-15.9-12.6(%)다. 덴마크는 34.2-32.1-16.6-10.5-6.7(%)이고, 스웨덴은 27.8-26.4-17.9-14.7-13.2(%)다. 연금 및 조세 체계 등이 달라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복지를 하후상박으로 즉, 상식적으로 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반면에 한국은 24.2-16.8-16.5-17.9-24.6(%)의 비율로 현금복지가 배분된다. 즉, 몰상식한 복지가 시행된다.

금액으로 보면 더더욱 절망적이다. OECD 평균의 하위 20% 현금복지는 41조 원, 하위 40%는 86조 원이다. 이것이 가장 풍부한 10개국은 각각 61조 원과 120조 원을 저소득층에 지원한다. 그러나 한국의 하위 20% 현금복지는 15조 원 남짓이고, 하위 40%까지 넓혀 봐도 26조 원에 머무른다. 칠레, 터키, 멕시코와 함께 OECD 최저 수준이다. 이 4인방은 세금의 양이 가장 적고, (통계가 미비한 터키를 제외하면) 근 20년간 자살 증가율이 가장 치솟은 나라들이다. 특히 한국은 자살 증가율이 200%를 넘어 유일하게 세 자릿수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깨작깨작 부자 증세만 들먹이고 폭넓은 계층의 증세와 연대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 현실이 바로 헬조선의 실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초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며 "중산층과 서민, 중소기업에는 증세가 전혀 없고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또 "(증세로 인해) 중산층, 서민, 중소기업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각료들에 주문했다. 뿌리 깊은 조세 저항을 우려한 전략적 발언이었든, 민생을 위한 진심이었든, 굉장히 위험천만한 실언이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불안을 달고 사는 것은 세금이 늘어날 걱정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알아서 나와 내 가족의 안전망을 악착같이 확보해야 한다는 점, 궁핍한 이들이 발에 치일지라도 세금과 복지가 부실한 상황에서 나 혼자서는 그들을 돕는데 역부족이라는 점, 이 때문에 혹시 내가 추락하더라도 나를 도와줄 이가 없다는 점이 '각자도생 헬조선'의 작동 원리이고, 그래서 한국인들은 기회만 되면 내 밥그릇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된다. 아주 쉽게 생각해서 이번 정권의 기초연금 목표액이 30만 원에 불과하고 다른 정치집단도 대동소이한데, 어떻게 노후불안이 해소될 수 있으며, 무슨 정치를 믿고 사람들을 믿으며 내 몫을 양보할 수 있겠는가?

물론, 부자 아닌 이들의 세금을 올리는 일은 정치 생리상 가장 어려운 과제다. 미루고 회피한다 해도 이해되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산층과 서민의 불안을 더는 것이라고 현실을 호도해서는 곤란하다. 진정 국민을 생각하는 리더라면, 국민 다수의 증세를 호소할 수 없는 역량 부족에 뼈아파 해야 한다. 고매한 인품을 지닌 문 대통령이 이 정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면, 대통령 본인이 이쪽에 너무 무지해서든, '세상 편한' 관료와 지식인, 정치인들이 귀와 눈을 가려서이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하철에서 이따금 목격된다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2015년 한 칼럼에서 하도 답답해 지껄여 본다며 이렇게 썼다. "서민의 세금으로 국공립 보육원을 더 짓자고 (정치가 국민을) 설득하고, 여기에 매칭해서 부자들도 세금을 더 내라고 압박할 용기는 없는가. 금기에 도전해 현안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삶의 질 체감이 뛰어난 복지 강국의 원리는 김 위원장이 말하는 대로이다. 국민에게 연대적인 세금 분담을 설득하는 정치세력이 선거를 승리하고 복지도 발전시킨다. 또 이런 환경에서 부유층은 한국보다 한결 많은 세금을 낸다. 그렇게 조세저항을 이겨내는 정치가 진짜 뛰어난 정치이고, 그런 선진 정치가 국민의 삶을 고루 이롭게 한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정부가 조세·복지 분야에서 선진적인 정치를 펼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고 다른 정치집단들이 앞서가는 것도 아니다. 형편없는 철학과 비전을 내놓는 것은 여기나 저기나 오십보백보다. 종합적으로 둘러보면 현 여권이 그래도 제일 낫다. 이 지점이 한국의 한계이니, 모쪼록 특히 저소득층 이웃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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