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후보가 연일 내놓는 정책이나 민심 탐방의 행보에서 또렷한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후보끼리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기 보다는 자신이야말로 사회 통합과 상생의 적임자임을 알리고자 상호 경쟁하면서 생겨난 반가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세 후보 모두 반드시 극복해야 할 트라우마를 한 가지씩 떠안은 채 분투하고 있기도 하다.
▲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는 각자의 트라우마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프레시안(최형락) |
첫째, 박정희 트라우마. 세 후보 중 과거사가 가장 강력한 장애로 작용하는 이가 바로 박근혜 후보다. '유신공주', '유신의 딸'이라는 별칭처럼 그녀는 독재자 박정희의 딸로서 유신시대에는 어머니를 잃은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렇게 그녀 역시 유신독재의 일 주체였다는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는 뉴라이트적 시각에서 시민에게 아버지 박정희를 조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만 기억하자고 설득했다.
그건 명백한 오산이었다. 박정희의 공적만을 기억하며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준 시민보다 그의 과오에 여전히 비판적인 시민이 다수였다. 박근혜 후보가 유신 시대 머리 모양을 고집하며 노인세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그 당시 박정희의 폭거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망자들의 가족 역시 당시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시민들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시민의 민주주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이후에도 5·16군사 쿠데타를 옹호하고 인혁당 사건에는 '두 개의 판결이 있다'며 우회적으로 무죄 판결을 공박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박정희가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했다. 시민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혹독했고 박근혜 대세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후보는 "5·16,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박정희 시대의 과오에 대해 사과했다. 유신 체제 붕괴의 기폭제가 되었던 부마항쟁에 대해서는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고 피해를 입은 분들과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드린다"며 사과하는 동시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약속했다.
둘째, 노무현 트라우마. 문재인 후보의 언행 역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궤적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문재인 후보도 자신의 책 '운명'을 통해 참여정부의 공적을 알리는 데 치중했을 뿐, 과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곤 했다. 그런데, 10월 들어 대통령 후보 문재인 후보는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전북 홀대에 대한 사과를 시작으로 한미FTA 비준 강행을 사과하고 나아가 "경제 민주화와 재벌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할 철학과 비전, 구체적 정책과 주체의 역량이 부족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며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그럼에도 참여정부를 둘러싼 논란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NLL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의 진위 문제를 놓고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간 논박이 오히려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정문헌의 발언이 사실이면 노 대통령 대신 자신이 사과하겠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박근혜 후보가 사과해야 한다며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앞으로도 문재인 후보는 참여정부의 과오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되, 사실 왜곡을 불사하는 정치적 공방에 대해서는 강경한 자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 무경험·무소속 트라우마.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의 지근거리에 있었던 박근혜 후보나 문재인 후보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안철수 후보가 넘어서야 할 트라우마다. 그는 출마선언문에서 자신의 스승인 시민들이 "국민들의 삶을 외면하고 국민을 분열시키고, 국민을 무시하고, 서로 싸우기만 하는 정치에 실망하고 절망했다"며 "이제 좀 정치를 다르게 해보자, 새롭게 출발해보자"는 뜻에서 정치 경험이 없는 자신을 국가 리더에 도전하도록 격려하고 지지해 준 것에 힘입어 출마했다고 밝혔다. 반시민적 정당정치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의 지지로 나선 시민후보라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검증이라는 가혹한 터널을 갓 지난 지금, 정치경험이 없는 무소속대통령 후보라는 이유로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무소속대통령 프레임 공격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민주당 지도부의 선제 공격에 이어 새누리당은 아예 '무소속 대통령은 국가적 재앙이다'라는 공식 논평을 내놓았다. 안철수 후보의 대답은 간명하다. 자신이 당선된 후 여야를 설득하면 충분히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 후보는 어떻게 멍에가 되어버린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하고 있을까. 박근혜 후보는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통해 박정희 트라우마를 넘어서려 한다. 하지만 그 사과의 진정성 여부가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박근혜 후보 대선 캠프에는 유신독재가 근대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이 엇박자를 해결하지 않고 박근혜 후보만이 독자 플레이로 사과 발언을 거듭하는 것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정치적 제스츄어에 불과할 뿐이다.
문재인 역시 사과를 통해 노무현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한다. 허나, 문재인 후보가 참여정부의 과오를 적극 사과하고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약속한 것이 못내 미덥지 못한 것은 참여정부 인사들이 문재인 후보 대선 캠프로 속속 귀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후보의 사과에 걸맞게 참여정부의 과오에 대해 책임져야 할 인사들이 재집권을 위해 결집하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대선 승리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절박감에 제 발로 찾아온 옛 동지들을 솎아내야 하는 인적 청산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문재인 후보는 이런 뼈를 깎는 인적 청산보다는 시민 사회로부터의 수혈을 통한 인적 쇄신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어렵게 영입한 정치 신인들이 부각되기 위해서라도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들의 퇴장은 불가피하다. 문재인 후보 역시 개인의 거듭되는 사과만으로는 시민의 신뢰를 얻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정치 신인으로서 빚진 것이 없기에 머리 숙여야 할 과거사는 없지만, 박근혜 후보나 문재인 후보처럼 일단 원맨쇼를 통해 비전을 제시하고 역량을 입증하며 시민의 신뢰를 얻으려 하고 있다. 사실 안철수 후보의 트라우마는 그 자체가 초유의 사태로 난해한 방정식이다. 일단, 정치경험이 없는 무소속 대통령의 출현 가능성에 대해 여론 주도 집단은 여·야,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정당정치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 시민운동 내 전문가와 활동가 집단 중 대선 후보 캠프에 들어간 다수도 민주당 후보 문재인을 선택했다. 안철수 후보는 이렇게 견고한 기성의 정당 프레임을 논파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후보단일화라는 당위적 압박 역시 안철수 자신이 무소속대통령 후보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설득하는 데 걸림돌이다. 게다가, 대안적 시민후보로서의 입지를 지향하는 안철수 후보의 주변에 아직은 그를 헌신적으로 지지하는 대안 시민 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무경험·무소속의 트라우마는 끊임없이 시민의 공간을 확장해 가면서 시민을 만나고 대화하고 조직하며 시민적 대안 세력과 정책을 만들어 가는 시민 혁명을 통해 늘 시민과 함께 할 때 극복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후보나 문재인 후보 등과 같은 기존 정당 후보와 자주 조우하는 행보는 구태스럽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다수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당선되지 않는다. 나 혹은 우리의 희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을 인물을 찍는 세대, 집단, 계급, 계층의 결집을 통해 최다득표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민주주의의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이 결집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과범이라는 전력과 BBK사건이라는 시한폭탄은 외면한 채 이명박 대통령에게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번 선거에서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시민에게 희망과 신뢰를 받으려 노력하는 후보가 당선될 것이다. 지지율 고착화 현상에서 드러나듯 지금 세 후보 모두 그런 점에서 고전 중이다.
박근혜 후보는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배운 게 독재정치밖에 없으니 분명히 민주주의를 퇴행시킬 것이라고 의심하는 시민에게 자신이 불통과 독선의 독재형 지도자가 아니라 소통과 공감의 민주주의적 리더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시민이 박근혜 후보에게 거는 기대는 딱 그만큼이다. 지지여부와 관계없이 시민은 박근혜 후보에게 민주주의의 진전, 경제의 지속적 성장, 복지 구현의 미래를 열어갈 그야말로 혁신형 지도자 상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에게 박정희트라우마는 양날의 칼이다. 지지자도, 반대자도 모두 박정희의 그림자 안에 있는 그녀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후보는 참여정부 시절에 한층 극심했던 이념적 편가르기를 우려하는 시민에게 사회 통합형 리더로서의 자질과 전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더불어 정봉주 가석방조차 불발시킬 정도로 무능하고 무기력한 민주통합당에 분노한 시민의 정당 혁신 요구를 구현해야 한다. 개인적 트라우마와 조직적인 업보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통합과 혁신이 인적 쇄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재인 후보의 어깨가 가장 무거워 보인다.
안철수 후보는 정치경험이 없는 무소속 후보로서 대통령 선거 레이스에서의 완주 여부와 국가 리더로서의 국정 운영 능력을 놓고 연일 정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허나, 시민이 안철수 후보에게 갖는 관심은 완주 여부가 아니다. 완주는 후보 단일화와도 연동된 사안이므로 양자 중 어떤 길을 가든 시민이 납득하고 신뢰할 만한 정의로운 선택이길 바란다. 또한 사실상 검증 불가능한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시비보다는 안철수 후보가 반시민적인 정당정치 이 내놓는 로드맵과는 차별화된 미래상을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혁신의 주역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무경험·무소속의 안철수 후보를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한 시민의 기대와 바람은 여전히 '안철수 현상' 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안철수 후보에게 시민은 일관되게 우리 앞에 와 있는 미래를 향도할 새로운('New') 길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의 어깨도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지금 세 후보 모두 국가 리더로서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며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지만, 시민에게 각자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뢰를 주지는 못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앞으로 딱 두 달 남았다. 시민은 '트라우마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후보에게 당선의 월계관을 씌워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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