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하나가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어쩌면 끝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내 불순한 의도를 미리 눈치 챈 걸까? 기다리는 이유는 그 자료에 나온 데이터를 참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잘못된 수치인지 들이받을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데이터와 실태도 모르는 노동약자?
"플랫폼·프리랜서 근로자들 …. 배달라이더로 대표되는데 많습니다. 웹툰작가도 있고요. 사실은 이게 전부 노동자거든요. 자기 노동을 판매해서 대가를 받으니깐요."
지난 5월 14일 민생토론회에서 '노동약자 지원법'을 얘기하며 윤석열 대통령이 쏟아낸 말이다. 대표적인 노동약자로 직접 배달라이더와 웹툰작가 등 플랫폼 노동을 언급한 것이다.
이런 행사의 성격상 대부분의 워딩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한 내용일 가능성 백 퍼센트다. 당일 행사에 배달라이더를 직접 참여시킨 걸 봐도 분명한 얘기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대표적인 노동약자로 꼽은 플랫폼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실태조사라던지, 규모나 수입에 대한 데이터가 있지 않을까?
고용노동부 홈페이지 '보도자료' 란에 들어가서 '플랫폼종사자 규모'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보면 위 그림처럼 자료 리스트가 등장한다. 한국 정부는 지난 2020년부터 플랫폼종사자 규모 및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여 연말에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2023년에 진행했을 결과 발표가 2024년 하고도 무려 5개월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3월 경이었나? 하도 궁금해서 이 조사에 대한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고용노동부 담당부서에 전화를 해서 문의한 적도 있다. 돌아온 답은 "조만간 공개하겠다"는 것.
그 사이 담당부서는 아예 해체
플랫폼노동 관련 고용노동부의 주무부서는 근로기준국 산하 '디지털노동대응TF'이다. 정식으로 '과'로 승격되기 전에 TF 형태로 부서를 운영하는 경우들이 있다. 민생토론회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노동약자 지원 관련 주무부서가 될 미조직근로자지원과장을 소개했는데, 얼마 전까지 이 부서 역시 '미조직근로지지원TF' 형태로 운영된 바 있다.
여하튼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발언도 나온 만큼 당연히 5개월이나 늦어진 플랫폼종사자 규모 및 실태조사 보고서가 나오겠거니 기다렸지만 전혀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이 조사의 담당부서인 디지털노동대응TF가 해체된다는 것이다.
민생토론회 1주일쯤 뒤 발표된 고용노동부 인사에서 디지털노동대응TF 팀장(과장급)이 다른 부서로 옮긴다고 발표가 나왔는데, 후임 TF 팀장 인사는 없었다. 나중에 듣게 된 일이지만 TF는 해체 수순을 밟고 있고 관련 업무는 미조직근로자지원과로 흡수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아니, 이게 대체 뭐지? 플랫폼노동이 노동약자의 대표주자라고 소개해놓고, 그와 관련한 법률도 만들라고 지시해 놓고, 플랫폼노동 규모와 실태조사 실무를 맡은 TF는 해체해 버린다니? 2023년 연말에 나왔어야 할 실태조사 결과는 발표되기는 하는 걸까?
이런 얘길 다 떠나서, 규모와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면서 이들 노동약자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한다는 걸까? 이들에게 어떤 지원이 가장 절실한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2년 사이 4배로 늘어난 플랫폼노동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한 것과 다르게 플랫폼노동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2020년부터 조사되어 발표된 고용노동부의 플랫폼종사자 규모를 살펴보더라도 이 부문이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정부는 플랫폼종사자를 '넓은 의미(광의) 종사자'와 '좁은 의미(헙의) 종사자'로 나누고 있는데, 사실 이건 말장난에 불과하고 실제 우리가 말하는 플랫폼노동은 '좁은 의미(협의) 종사자'를 의미한다. 넓은 의미 종사자의 경우 알바몬이나 알바천국 같은 구직 플랫폼을 통해 일자리·일감을 얻는 노동자까지를 포함한 것이라 엄밀한 의미의 플랫폼노동이라 보기 어렵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발표된 플랫폼종사자 규모의 변화를 보면 2020년 말에 22만 3천 명이던 좁은 의미(협의) 종사자 수는 2년 뒤(2022년 말)에 80만 명으로 무려 4배 가까이로 증가하게 된다. 2023년 말 데이터가 나왔다면 100만을 훌쩍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태조사 결과는 단순히 전체 규모만이 아니라 여러 업종별 분포, 성별 분포와 연령대별 분포 등 매우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각 업종별 수입규모를 비롯해 근무시 애로사항이나 법·제도 개선 요구사항 등의 항목도 조사된다.
이토록 급증하는 고용형태, 게다가 대통령이 직접 '노동약자'의 대표적 형태로 호명한 플랫폼노동 관련 매년 진행하던 실태조사 결과도 나오지 않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노동약자 지원'을 하겠다는 것일까?
훨씬 좋은 데이터를 옆에 두고도
배달·대리운전 등 대부분의 플랫폼노동자들은 보건의료 종사자들과 함께 코로나19 팬데믹을 이겨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노동자'라 불린 바 있다. 그러나 아무런 사회안전망조차 없다는 점이 쟁점으로 떠오르며 '전국민 고용보험'을 비롯해 산재보험 적용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플랫폼노동에 대한 훨씬 좋은 데이터가 확보된다.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가입자 데이터를 비롯해 엄청나게 중요한 자료들이 축적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21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윤건영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이 고용노동부에 요청해 받았던 자료들 몇 가지만 소개해 보겠다.
먼저 위 자료는 2022년 4월 기준 플랫폼·특수고용 각 업종별 고용보험 가입자 현황이다. 물론 여기에는 플랫폼노동이 아닌 특수고용이 함께 포함되어 있고, 비용을 제외한 실소득이 월 80만 원을 넘어야만 가입이 가능하다는 허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우선 플랫폼·특수고용 중 시행령에 명시된 일부 업종에 한해서만 이른바 '노무제공자' 트랙으로 고용보험 가입이 시작된 지 1년 만에 가입자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대부분이 플랫폼노동이라 할 수 있는 퀵서비스기사(배달라이더 등), 대리운전기사를 합해 26만여 명이 고용보험 가입자로 확인된다.
한 달 만에 확인된 플랫폼노동 65만 사각지대
고용보험보다 산재보험 관련 데이터는 훨씬 드라마틱하다. 고용보험에 있는 월 80만 원 실소득 허들보다 훨씬 높은 산재보험의 '전속성' 장애물이 작년 7월 1일자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본래 산재보험은 단 한 명의 사용자에게 전속성이 있어야만 가입이 가능했다. 이를테면 배민·쿠팡이츠 등 2개 이상의 앱을 통해 일감을 구하는 플랫폼노동을 원천봉쇄 했던 것)
흥미롭게도 이 전속성 조항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당선이 확정된 후 구성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에 쟁점이 되었고, 인수위 주도로 법안 논의가 이뤄지면서 대통령 취임식 직후에 열린 5월 16일 임시국회에서 마침내 전속성 기준이 폐지되었다. 이 법안의 효력 발생일인 2023년 7월 1일 전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도록 하자.
위 자료 역시 윤건영 의원실이 확보한 연도별 산재보험 가입자 데이터이다. 전속성 기준이 폐지되기 직전과 직후인 2023년 6월과 7월의 수치를 비교해보면, 한 달 사이에 가입자 규모가 무려 65만 명이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 2020년 7월부터 법이 적용된 방문판매원, 대여제품점검원, 가전제품설치원, 화물차주, 2021년 7월부터 적용된 소프트웨어프리랜서, 2023년 7월부터 적용된 관광통역안내사·어린이통학버스기사·건설현장화물차주는 아직 수치가 크지 않고 표가 너무 길어져 생략하였음.)
가입자 증가의 핵심은 단연 대리기사와 퀵서비스(배달 라이더) 등 플랫폼노동이었다. 특히 대리기사의 경우 지난해 6월에 23명(23만 명이 아니라 23명!)이던 가입자가 한 달 사이 28.6만 명으로 무려 1만 배 이상 폭증했다. 라이더는 2~3개의 앱을 사용하지만 대리기사는 6~7개의 앱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속성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용행정 통계만 활용해도 수많은 데이터가
고용보험 가입자는 2022년 4월에 100만 명을 넘어섰고, 산재보험 가입자는 작년 7월에 145만 명을 돌파했다. 물론 이중에는 플랫폼노동이 아닌 특수고용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업종별 세부 데이터를 활용하면 매우 중요한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이들 행정통계를 활용하면 굳이 설문조사와 표본조사를 통해 전체 규모를 추정하는 실태조사의 수고로움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왜냐? 우선 가입자 관련 데이터는 표본조사가 아니라 전수조사에 해당하는 행정통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고용보험·산재보험 모두 가입자의 성별·지역별·연령대별 데이터를 모두 분석하고 있어서, 플랫폼노동의 전체 규모만이 아니라 성별·지역별·연령대별 분포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표본조사를 통한 추정치가 아니라 완벽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험료 액수를 통하면 가입자 소득 규모도 알아낼 수 있다. 고용보험료·산재보험료는 소득과 수입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보험료율 0.9%로 책정되어 있는 고용보험의 경우, 고용보험료를 9000원 냈다면 월 수입을 100만 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노동약자 지원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
민간 연구자들의 경우 국회의원실을 통하거나 정보공개 청구라는 번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정부 정책 담당자라면 이런 훌륭한 데이터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굳이 실태조사라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낼 수 있는 데이터가 옆에 널렸는데, 매년 발표하던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마저 누락하는 정부가 무슨 노동약자를 지원한다는 걸까?
2022년 말에 발표된 플랫폼종사자 실태조사 결과에서 플랫폼노동 규모는 80만 명이었다. 그런데 2023년 7월에 확인된 산재보험 가입자 통계에서 플랫폼노동이 대부분인 대리운전기사와 퀵서비스기사만 합해도 65만 명이 넘는다. 다시 말해 표본조사를 하는 것보다 행정통계를 활용하는 것이 정확도는 물론이고 훨씬 양질의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직 프리랜서로 오분류되어 있는 수많은 플랫폼노동은 아직도 산재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들의 오분류를 시정해내는 방향의 정책 설계는 '노동약자 지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놓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시행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산재보험 전속성 기준 폐지는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 제1호 법안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성과이자 치적이라는 것이다. 그 조치 하나만으로 수십만 명의 플랫폼노동자들이 산재보험 제도 안으로 들어왔는데, 정작 본인들이 그 데이터와 자료는 활용하지 않는다니 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다. 노동약자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그 데이터와 실태도 내놓지 못하면서 뭘 지원한다는 건지? 그 대표격인 플랫폼노동 관련 주무부서도 해체한 마당에 디지털 전환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디지털노동에 대한 대책은 또 어떻게? 또다시 실패한 정책에 국민 혈세만 투입될 것이 확실해 보여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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