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끝났다. 집권당 참패, 연속 여소야대는 최초의 일이라는데, 그렇다면 뭔가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는 것일까? 하지만 정치판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애초 국정운영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변화의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이 집권당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매력적인 정책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야 정치세력들은 적당히 대립하는 척하며 적당히 거래하고 적당히 쇼를 하며 기존 정치를 이어갈 것이다. 아니, 왜 이런 재미없는 얘기로 글을 시작하냐고?
밑바닥 노동의 정치는 이제 시작
하루하루 힘겨운 노동으로 삶을 지탱해가는 밑바닥 노동자들에게는 좀 다른 가능성 하나가 열렸다. 국정운영 방향이 크게 바뀌진 않겠지만 윤석열 정권의 일방독주의 세기는 총선 전보다 약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야당은 그저 윤석열 정권을 비난하기만 할 뿐 새로운 정책으로 정국을 끌어갈 것도 아니기에, 당분간 어정쩡한 힘의 균형 속에 '주도권의 공백'이라는 열린 공간이 펼쳐지게 된다. 물론 이 공간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닫히게 되겠지만, 적어도 밑바닥 노동자들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를 쏟아내며 진출할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바닥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노동법의 온전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가 전체 일하는 사람의 절반을 넘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노동자 규모는 이제 마이너스 성장을 시작했다. 반대로 플랫폼노동, 특수고용, 프리랜서 등 노동법 적용을 피해가는 고용형태 규모는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공식 통계 따위 의미가 없어진 세상
올해 1분기 체불임금이 전년 대비 40% 늘어난 5718억 원을 기록했다. 이대로 가면 상반기 1조 원을 넘어 연간 최대치를 갱신할 것이 확실시된다. 놀라운 뉴스이긴 하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그 안에서도 일한 대가를 '임금'으로 받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통계수치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노동자보다 일한 대가를 임금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받는 노동자들이 훨씬 많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그나마 임금체불 진정이나 고소·고발이라도 할 수 있다지만, 수수료·배달료·운임·간병비 등 다양한 이름의 보수를 받는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구제를 받을 장치조차 없으니 임금체불 규모는 훨씬 더 심할 것임에 틀림없다.
최저임금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최저임금 영향률' 자료를 살펴보면 최근 데이터에서 매우 독특한 현상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영향률 계산의 모수가 되는 '임금 근로자 수'인데, 최저임금법이 시행된 1988년 이후 매년 증가해왔던 숫자가 올해 사상 최초로 감소한 것이다.
출산율 저하 때문에 줄어드는 게 아니다. 경제활동인구 규모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플랫폼, 특수고용, 프리랜서 등 '비임금근로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임금근로자만을 대상으로 한 각종 노동통계는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포착해낼 수 없다.
줄줄 새는 최저임금, 싱크홀을 막아라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 적용을 피해갈 목적으로 양산되는 각종 고용형태는 노동자라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 시스템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이었지만 점점 커져서 이제 임금근로자 수보다 많아진 비임금근로자를 그 속으로 밀어넣을 정도로 거대한 싱크홀(Sinkhole)이 되어버렸다.
앞서 사례로 든 최저임금 영향률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저임금법과 권리가 보장되는 임금노동자는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이다. 사실 최저임금만이 아니다.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하고 있는 '적정임금'을 받을 권리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정부와 자본가들은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버린 최저임금 제도에 '업종별 차등적용'이라는 다이너마이트를 던져넣으려 한다. 돌봄노동에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하자, 이주노동자를 값싸게 활용하자, 노인들에게 최저임금을 깎아주자 ….
자본가들 입장에선 어떤 업종이냐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어느 곳이든 구멍 하나만 뚫어놓기만 하면 그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마침내 최저임금 제도 전체를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더 이상 구멍을 뚫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미 그전부터 뚫려있던 구멍을 틀어막자고 요구해야 한다. 플랫폼, 특수고용, 프리랜서 등 모든 고용형태와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권리와 제도가 작동하도록 말이다.
구멍 뚫린 4대 보험, 구멍을 막아라
4대 보험도 마찬가지다. 일하는 방식이 아무리 다양해졌다 하더라도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며, 더구나 불안정고용의 형태인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부문에는 그 중요성이 훨씬 더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이들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 필요성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 '전국민 고용보험'과 같은 슬로건 아래 사회안전망 확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플랫폼·특수고용 일부 업종의 경우 고용보험 가입은 가능해졌지만 실업급여와 본인 출산휴직을 제외한 모든 혜택에서 배제되고 있다. 실업에 빠졌을 때 새로운 직종으로 옮기기 위한 직업훈련 혜택도 받을 수 없고, 고용안정 지원사업의 대상에서도 배제된다.
더욱 심각한 점은 육아휴직과 배우자 출산휴직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체 연령대에서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고용형태가 차지하는 비중은 20~30대가 가장 높다. 그동안 모든 정치세력이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얘기하면서 정작 젊은 세대에게 육아휴직·출산휴직 권리가 박탈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왔던 것이다.
다행히 지난 총선 막바지에 국민의힘 측이 플랫폼·특수고용은 물론이고 자영업자까지 육아휴직을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고, 반대할 이유가 없는 더불어민주당과 야당들도 합세했다. 하지만 표가 급해서 던진 공약이다보니 디테일은 형편없었다. 고용보험 가입 확대만 되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은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사실과 다르다. 게다가 재원 마련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도 비어 있는 상태다.
이 문제를 바로잡는 방법도 아주 간단하다. 싱크홀이 더 커지기 전에 이 구멍을 막으면 된다. 시행령에 명시된 업종에만 허용된 고용보험 가입을 모든 노동자에게 확대하는 길이다. 아울러 실업급여 혜택만이 아니라 육아휴직·출산휴직, 직업훈련, 고용안정 지원사업 등 고용보험의 모든 기능이 차별없이 보장되도록 하면 된다.
플랫폼·특수고용 일부 업종에 산재보험·고용보험 가입이 이뤄지면서 이들 보험제도가 사업장 기반으로 충분히 작동 가능하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왜 건강보험 직장가입, 국민연금 사업장가입은 안 된다는 말인가. 아주 오래 전부터 뚫려 있던 이 구멍도 함께 틀어막아야 한다.
노동안전 싱크홀을 막아라
이른바 '김용균법'의 시행으로 플랫폼·특수고용 일부 업종에 산업안전보건법 적용이 이뤄지기 시작했지만, 해당 조항은 극히 일부(77조, 78조)에 머무르고 있다. 대부분이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종인데 이들에게 감정노동자보호 조치는 물론이고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때 작업중지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실질적인 노동안전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문도 해결책은 간단하다. 차별이라는 구멍을 막으면 된다. 플랫폼·특수고용은 물론이고 모든 고용형태와 노동자에게 차별없이 산업안전보건법 전체를 온전히 적용하는 길이다. 이 부문에 구멍이 뚫리고 싱크홀로 커지다보니 어느새 산재 최대 빈발 사업장은 건설업·제조업에서 배달업으로 옮겨온 상황 아닌가. 구멍 뚫린 노동안전 부문에서도 싱크홀을 막아야 한다.
싱크홀 막기 법(Closing Sinkhole Bill)은 불가능한가
지난 대선 때 모든 후보들이 약속했던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법안 제정', 하지만 말만 무성했을 뿐 그 내용과 실체도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이미 활발하게 새로운 시도가 펼쳐지고 있다.
최근 호주에서 안전운임제를 부활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당시 통과된 법의 이름은 구멍 막기 법(Closing Loophole Bill)이었다. 안전운임제는 이 법의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 조항에서는 플랫폼노동에 최저보수 보장, 동일노동 동일임금, 임금체불·산재사고 처벌 강화 등 매우 광범위한 제도개혁 내용을 담고 있다.
<인사이드경제>가 이번 글의 제목으로 선택한 '싱크홀 막기' 역시 호주의 구멍 막기 법에서 차용해온 개념이다. 호주의 경우 노동법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부문, 즉 호주 노동법의 가장 큰 구멍이 기간제(계약직)와 플랫폼노동에서 발생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그 부문의 구멍을 틀어막기 위한 제도개선이 이뤄진 것이다.
우리도 해보자. 구멍 막기, 아니 한국의 경우 구멍이 너무 커서 싱크홀 정도로 비유를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점점 더 낡아버려서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개념을 대폭 확장해서, 일하는 방식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노동법의 보호를 차별없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싱크홀 막기 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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