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평등상담실 폐쇄, 성인권교육사업 및 여성폭력 방지 예산 삭감 등 '성평등 정책'에 대한 정부 예산이 일제히 삭감 추세에 접어든 가운데 여성계에서 "무분별하게 추진되는 통폐합, 인식개선 예산 삭감은 우리 사회의 성평등을 퇴보시킨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등 여성단체들은 19일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감축 철회 촉구 공동행동'을 결성하고 "여성가족부의 2024년 예산안은 그나마 일궈온 성평등 사회를 퇴보시키는 예산"이라며 여가부 예산안 전면 폐기를 청원하는 '1만인 시민 선언'에 돌입했다.
정부는 앞서 지난 8월 29일 국무회의에서 2024년 여성가족부 예산안을 1조 7135억 원 규모로 의결했다. 규모로는 올해 예산인 1조 5678억 원에서 9.4% 늘어난 양상이지만, 이는 저출산 대응 등 가족정책 예산이 상승된 결과로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 등 성평등(양성평등) 부문 예산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특히 '여성폭력 방지 및 폭력 피해자지원' 관련 예산은 종합 142억 원 삭감됐다.
정부는 출범 초 가정폭력, 디지털 성범죄 등 5대 폭력에 관한 피해자 보호와 지원 강화를 국정과제로 설정하였으나, 예산안에선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콘텐츠 제작 △디지털 성범죄 특화프로그램 운영 △성희롱·성폭력, 가정폭력, 이주여성 폭력피해, 북한이탈여성 폭력피해 예방을 위한 인식개선 및 홍보 예산 등이 모두 전년보다 줄었다.
여성가족부는 "지출구조 혁신을 통한 사업 효율화에 중점"을 두었다는 입장이지만, 특정 목적을 지닌 사업에 대한 전방위적인 삭감 조처에 단체들은 "폭력 재발 방지와 폭력에 대한 전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예산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라며 "이러한 행보는 종국에는 우리 사회의 성평등을 퇴보시키는 길이 된다"고 지적했다.
여가부는 △성매매 피해자 구조지원 사업 △성폭력 피해자 의료비 지원 △가정폭력피해자 치료회복 프로그램·의료비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운영 △폭력피해 여성 주거지원 운영 등 피해자를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예산 또한 전면 삭감했다. 여가부는 감액 사유로는 △지원 실적 반영 △입소율 저조 △의료비 집행률 반영 및 부정수급 발생에 따른 사업 효율화 등을 들었다.
여가부는 지난 9월 청소년 대상 '성 인권 교육' 사업에 대한 5억 5600만 원 규모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해당 사업을 폐지하면서도 비슷한 사유를 든 바 있다. 교육 대상 인원의 감소와 다른 부처 사업과의 유사성 등 효율성 문제가 있어 사업을 폐지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여성·교육계 등지에선 '사업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효율만을 강조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관련기사 ☞ "성평등 교육 지금도 처참한데"…'성 인권 교육' 없애겠다는 여가부)
이날 단체들은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대한 여가부의 입장에 대해서도 "정부가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보다는 실적과 효율성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며 "지금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실적에 급급한 예산 감축이 아닌, 실질적 피해자 치유·회복을 위한 예산 확보와 예산의 효과성을 도모할 수 있는 제도 정비"라고 꼬집었다.
대표적인 '여성폭력 지대'로 꼽히는 가정폭력 상담소 운영 예산도 전년 대비 31억 9700만 원 삭감됐다. 이는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지원 예산 중 전액 삭감 예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금액의 삭감 폭이다.
여가부는 개별 가정폭력상담소를 대폭 감축하는 대신 '여성폭력피해 통합상담소(가)'를 소폭 증대하여 "가정폭력, 성폭력뿐만 아니라 스토킹, 디지털성폭력, 교제폭력 등 신종 범죄 피해에 대한 사각지대 없는 지원"을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 또한 효율성 재고를 위한 통합운영 기조에 해당한다.
단체들은 "실제 예산안을 살펴보면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을 '가정폭력·스토킹 방지 및 피해자 지원'으로 제목만 바꿨을 뿐"이라며 "실질적 예산 확충 없이 어떻게 피해자 지원이 가능한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가정폭력, 성폭력, 스토킹, 디지털성폭력, 교제폭력, 성매매,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 등 다양한 개별 사안을 포괄하는 여성폭력 분야는 그 개별 사안들이 가진 특수성이 커 심층적이고 장기적인 접근이 필수적인 분야로 꼽힌다. 단체들은 "여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합적 지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충분한 정책적 연구와 피해자 지원 현장단체들과의 논의, 제도 정비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특히 디지털 성범죄 지역 특화 상담소는 성폭력과 성매매라는 문제에 입각해서 의료, 상담, 치유회복프로그램, 삭제 지원 등이 3년간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여가부는 내년 1월부터 이 업무를 아직 있지도 않은 통합상담소로 이관할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라며 "이는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행정 중심적 탁상공론 격으로 예산이 편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성평등 정책과 관련한 정부의 기조가 '정확한 이해도 없이 사업을 폐지하거나 통합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지적은 여가부 밖에서도 이뤄져왔다. 지난 9월 예산운영의 실효성을 이유로 고용평등상담실 예산을 절반 이상(54.7%) 삭감, 전국 19개 상담소를 지역노동청 주관의 8개 상담소로 통합해 운영하겠다고 밝힌 고용노동부의 방침이 일례다.
당시에도 현장 상담가들을 중심으로 '예산과 창구의 절댓값을 줄이면서도 실효성은 높이겠다는 식의 설명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고용평등상담실을 찾는 내담자들의 특성상 정부기관이 운용하는 상담실을 적극적으로 찾기도 힘들뿐더러,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밀착상담을 특징으로 하는 고용평등상담의 업무를 '축소된 형태의' 지청 상담이 대체할 순 없다는 지적이었다. (관련기사 ☞ 尹정부 '고용평등상담실 폐지'에 절규하는 이들 "피해자 고통 알아달라")
이날 단체들은 "(여가부의 내년도 예산은) 실적과 효율을 운운하며 피해자의 일상 회복과 치유를 외면한 예산"이라며 "2024년 여성가족부 예산안 전면 백지화하라"고 정부 및 국회에 촉구했다. 이들은 오는 29일까지 시민들의 연서명을 받아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2024년 정부 예산안에서는 △고용평등상담실 폐쇄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폐쇄 △성인권교육사업 등 성평등예산 삭감 △장애인 권리예산 삭감 △민간단체 보조금 5천억 삭감 △사회서비스원 정부 예산 전액 삭감 △문화예술 지원예산 삭감 등 차별 해소와 공공성, 구조적 개입에서의 후퇴 기조가 두드러졌다"라며 오는 20일 '망국정치에 맞서는 페미니스트 릴레이 말하기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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