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우주의 지구. 2023년 7월 대한민국 서울. 장맛비가 한창 내리는 어느날 아침 8시 50분, 대통령은 푸른 넥타이를 여몄다. 9시엔 기자들이 용산 대통령실 청사 앞에서 대통령을 기다린다. 오늘의 현안은 개각, 장관 내정자 발표 여부다. 용산 청사에 들어서자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기자 : 국무위원 발표는 언제쯤 가능할까요?
대통령 : 아직 발표는 좀 더 기다려 봐야 하겠습니다. 책임총리제 하에서 국무총리가 추천한 장관 후보자와 관련해 총리와 상의할 일이 아직 남았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2021년 4월10일 대통령직 인수위는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가 직접 국무위원 추천서를 작성했다는 내용의 문건을 공개했다. 인수위는 "역대 인수위원회에서 장관을 지명할 때 처음 있는 일이다. '책임총리제'를 실현해 나가겠다는 대통령 당선인의 의지"라고 했다.)
기자 : 장관 후보자 기준은 어떻게 됩니까.
대통령 : 최고의 전문가들을 뽑아서 적재적소에 두고, 저는 시스템 관리나 하면서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소통하고 챙겨야 될 아젠다만 챙기겠습니다. (2021년 10월 19일 부산 해운대구 갑 당원협의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만 빼면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는 분들도 있다"면서 이같이 발언한 바 있다.)
다른 현안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대통령은 "기존 상황에서 특별한 변동 없습니다"라고 했다.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선 이런 식으로 건조한 답변을 내 상황을 넘겼다. 처음엔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실수도 많았지만, '도어스테핑'을 1년 이상 뚝심 있게 하면서 생긴 대통령만의 노하우였다.
대통령 : 더 질문 없으시죠?
대통령은 도어스테핑을 마치고 곧바로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대통령이 자리에 앉자 브리핑이 시작됐다. 국무회의 석상에는 30대 장관들이 여러명 앉아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지난 2021년 12월 19일 "디지털 플랫폼 정부가 되면 아마도 30대 장관이 한두명이 아니고 여러명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1시간동안 이어진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59분동안 장관들의 보고를 경청했다. '30대 장관'이 여럿 나온 첫 내각에서, 이날 국무회의 마지막 현안과 관련해 올해 '만 나이 36세'인 교육부장관이 일어서서 브리핑을 했다. 수능 모의고사 관련 현안이었다. "6월 모의고사에서 '킬러 문항'으로 의심되는 사례들이 발견됐습니다. 킬러 문항은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으로서, 대통령의 공약임은 물론이고 야당도 '킬러 문항 방지법'을 낸 바 있어서 야당의 협조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36세 교육부장관은 대통령이 인정한 '스타 장관'으로 통했다. 전문성과 책임감, 그리고 일을 맡아 하는 뚝심이 대중들에게 소구력을 가졌다고 평가됐다. '스타 장관'은 마지막에 겸손하게 말했다. "대통령은 검찰 초년생인 시보 때부터 수십 년 검사 생활을 하며 입시 부정 사건을 수도 없이 다뤘었죠. 대학 제도의 사회악적 부분, 입시 제도 전반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저도 전문가지만 특히 입시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이 수사를 하면서 깊이 고민하고 연구도 하면서 저도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입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59분간 장관들의 브리핑을 경청하던 윤석열 대통령은 1분동안 마무리 발언을 했다.
"저도 경제 권력 정치 권력 수사를 하면서 뭐 일반 국민들 못지 않게는 많이 익혔습니다마는 그 뭐 조금 아는 거 가지고 할 수가 없어요."(2021년 10월 19일 부산 해운대구 갑 당원협의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만 빼면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는 분들도 있다"면서 이같이 발언한 바 있다.)
대통령의 겸손한 말에 장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일정은 야당 지도부와 비공개 오찬이었다. 대통령은 오찬 자리로 향하며 푸른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맸다. 용산의 회의실엔 도시락이 마련돼 있었다. 야당 대표가 대통령을 반갑게 맞이했다. 현안이 많았다. 대통령은 59분간 야당 대표의 말을 경청했다. 다만 중간 중간 '그것은 이러저러해서 저희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고, 이견이 없는 이슈에 대해선 '야당의 주장과 여당의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조정해 보고, 저희가 양보할 것은 양보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야당 대표의 요구사항이 끝나자 59분간 경청하던 대통령은 1분간 마무리 발언을 시작했다.
"민생을 살리고 국익을 우선하는 정치는 대통령과 여당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의회와 소통하고 야당과 협치하겠습니다. 국정 현안을 놓고 국민들과 진솔하게 소통하겠습니다."(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첫 당선인사 발언)
대통령의 말에 야당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희도 협조할 것은 협조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다음 일정은 국무총리와 면담이었다. 국무총리가 장관 인사 제청안 최종 버전을 들고 왔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의 말을 경청했다. 국무총리는 '지금 내각에 30대 젊은 장관들이 많으니, 노인 세대를 대표할 장관도 필요하다'는 취지로 건의를 했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의 제청권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국무총리에게 '낙하산 인사'에 관한 야당 대표의 우려를 전하며 "캠프에서 일하던 사람을 시킨다? 전 그런 거 안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0월 6일 한 토론회에서 "여기에다가 사장 누구 지명하고 이렇게 안 하고요. 캠프에서 일하던 사람을 시킨다? 저 그런 거 안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총리는 낙하산 인사를 최소화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만족스러웠다. 이후 대통령은 수석비서관들과 회의를 소집했다. 수석들은 대통령에게 "영부인이 집에서 살림만 할 수 없다"며 영부인을 위한 제2부속실을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5월 24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영부인 김건희 전 코바나 대표의 '넷플릭스 한국 투자 계획 보고' 관련 야당 질의에 "영부인이라고 집에서 살림만 하라는 건 아니지 않나"라고 반박한 바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대통령 부인은 그냥 대통령의 가족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2021년 12월 21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대통령 부인은 그냥 대통령의 가족에 불과하다"며 "집권하면 (대통령 배우자를 보좌하는) 청와대 제2부속실을 폐지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영부인은 대선 기간 때 불거진 허위 학력 기재 문제 때문에 "일과 학업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제 잘못이 있었습니다. 잘 보이려 경력을 부풀리고 잘못 적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돌이켜 보니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고 사과하며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대통령은 이 말을 뒤집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석비서관들과 회의가 끝난 후 결재해야 할 서류들을 살피던 대통령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걸이에서 자켓을 뽑아들었다. 최초의 '출퇴근 대통령'답게 그는 일과를 마무리하고 퇴근길에 나섰다. 관용차 안에서 본 서울은 뿌연 풍경 위로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관저에 들어섰다. 대통령은 현관에 물이 들어차 있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은 신발을 벗으려다 다시 신고, 용산 집무실로 되돌아갈 결심을 한 후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각, 용산 집무실에 들어온 대통령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The Buck Stops Here'라는 팻말을 봤다. 새삼스럽게 대통령은 등골이 서늘해 졌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였다. '난 잘 하고 있는 걸까.'
평행우주 속 대통령의 '가상 하루'…'우리 우주'의 윤석열 대통령은 어떤가?
위 글은, 평행우주 어딘가에 또 다른 한국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SF적 가정 하에 완전히 허구로 작성한 소설이다. 단, 인용된 글 중에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후보 시절, 당선 초기에 했던 말들은 그 출처를 밝혀 놓았다. 후보 시절, 당선 직후 대통령의 구상은, 지금 국정운영에 잘 착근하고 있는가? 유권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다만 몇 가지는 짚어야 되겠다.
윤 대통령은 "30대 장관이 여럿 나올 것"이라고 했지만 현재까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국무위원은 '서오남'(서울대 50대 남성)으로 설명되고, '검사 정권'으로 수식된다. 윤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던 책임 총리? 책임 장관? 스타 장관? 역시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대통령실 비서 출신을 다섯명이나 차관 자리에 '하방'시켰다. '차관 직할 통치' 이룬 것은 기괴하기까지 한데, 나아가 이런 '차관 직할 통치'는 장관을 제청해야 하는 '책임 총리'의 약속이 담긴 문서를 휴지조각처럼 구겨버린 일이었다. "이런 국정 운영은 건국 이래 처음"(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라는 이런 구상은 대통령이 본인의 입으로 말한 '책임 장관'과 '책임 총리', 두 마리 토끼를 한 방에 기절시켰다. 아, '스타 장관'(한동훈) 한 명이 배출되긴 했다. 조금 다른 의미지만.
'전문가를 기용하겠다'는 대통령의 공약은 대통령이 스스로 '전문가'의 반열에 오르면서 지켜져 버렸다. 오히려 교육 전문가가 대통령에게 "배우는 상황"(이주호 교육부장관)까지 만들어 냈으니 공약 '초과 달성'인가.
'용산 시대의 상징'이라는 도어스테핑은 진작에 없어졌다. '국민 소통'은 퇴색됐고 남은 건 '청와대'라는 관광상품과 '용산'이라는 새로운 구중궁궐이다. 대신 국민의힘 지도부와 정부 부처는 불리한 언론 보도와 합리적 의혹 제기에 '가짜 뉴스' 딱지를 붙이고 일전불사의 기세를 다잡는다. 야당과 협치는커녕, 야당 대표를 만나지도 않고 있다.
영부인이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했다는 '키링'으로 대통령실 공식 홈페이지를 장식하고, 정부 차원의 중점 과제인 '엑스포 유치'의 상징으로 띄워 올린다. '이럴 거면 제2부속실을 설치해 영부인을 보좌하고 관리하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각종 논란에도 대통령실이 직접 영부인의 활동을 챙기고 보좌한다. 엑스포 유치와 같은 국가 정책에 영부인이 미치는 영향력이 늘어나는데도, "가족일 뿐"이라는 영부인은 "가족"으로서 관리되지 않고, '대통령실'에 의해 직접 관리되는 이유는 도대체 알 수 없다. 선출된 대통령과 선출되지 않은 영부인의 역할은 대통령실이라는 하나의 보좌기구 안에서 어지럽게 겹쳐 있다.
대통령 캠프 출신 김홍일 전 검사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다. '혈서 퍼포먼스'로 유명한 이은재 전 의원은 전문건설공제조합의 이사장이 됐다. 한국전력 사장에 대통령 캠프 출신 전직 정치인이 온다는 설이 파다하다. 공공기관 임원 등에 검사 출신 낙하산이 두자릿수라는 말이 나온다. 심지어 '공공기관 인사는 대통령 주변 실세 OOO가 관장한다'는 소문들이 여의도에서 흘러나온다. "그런 거 안한다"는 대통령은 저 평행우주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까?
취임 1년이 지났다. 대통령이 자신의 과거 발언들과 공약들을 돌아보기 좋은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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