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하게도 한국 보수 정치인들에게 더 많이 인용되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 이론은 그들이 말하는 '한국 좌파 운동권'의 주류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고, 지금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람시의 이론을 교시로 삼지도 않는다. 최근 국정원이 원훈석 글씨를 '신영복체(어깨동무체)'로 사용한 걸 빌미로 원훈석을 갈아치운 이유도 짐작가는 바가 없지 않다. 신영복이 생전에 '진지전'을 중시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지금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회 곳곳'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신영복의 교시를 받고 하는 것이오'라고 묻는다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어떤 사회 현상 속에 강력한 '의지'가 존재한다고 상정하고 가상의 '적'을 구체화해 인격을 부여하는 건 음모론자들의 일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보수 정치인들이 그들이 비판하는 '음모론적 좌파'들 이상으로 '음모론'에 열광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허수아비 때리기'가 보수 진영 소수파의 신경질적 반응이 아니라, 집권 여당의 단골 레파토리 수준으로 격상된 것을 우린 목도하고 있다. 극우 유튜버의 슬로건들은 이제 국정을 논하는 여당 최고위원회의 테이블이나 국가 고위 인사들의 공식 발언에도 섞여 올라온다.
"문재인이가 간첩이라는 걸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70% 이상의 국민이 문재인이 간첩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박인환 검찰제도발전위원회 위원장)
개인의 일탈일 줄 알았으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최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 창립 69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윤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서다.
"현재 우리는 많은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 조직적으로 지속적으로 허위선동과 조작, 가짜뉴스와 괴담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흔들고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자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하거나 자유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로막으려는 세력들이 나라 도처에 조직과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 위장한 혁명 세력이 대한민국 체제 전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이론은 생소한 것은 아니다. 전광훈 류의 극우 인사들의 주장이다. 이런 논리는 '민주화운동 기념일'에도 등장한다. 내친김에 올 들어 주요 민주주의 기념일을 대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를 살펴보면 독특한 기류가 발견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우리가 오월의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한다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과 도전에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한 달 전인 4.19혁명기념식에도 참석해 "거짓 선동과 날조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들은 전체주의를 지지하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행세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거짓과 위장에 절대 속아서는 안 된다"며 "4.19혁명 열사가 피로써 지켜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기꾼에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4.19, 5.18 기념식에 참석해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과 '가짜 민주주의 운동가'를 비난한 윤 대통령은 4.3추모식, 6.10항쟁기념식엔 불참했다. 우연이라기 묘한 시사점이 있다. 4.3은 '공산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윤 대통령 주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6.10은 그야말로 '586 운동권 세력'의 상징과도 같은 민주화운동 아닌가. 윤 대통령이 생각하는 '합의된 민주화 운동 기념일'은 헌법에 담겨있어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 4.19나, 대통령 공약으로 '헌법 정신 수록'을 언급한 바 있는 5.18 정도인 것 같다. 우연이라 치기엔 공교롭다. 민주화 운동 기념일도 본인이 가진 모종의 잣대로 '격'을 나누고 있는 것 아닐까. 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는 만날 수 있지만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조화'를 보낼 사람과 안 보낼 사람을 골라냈다는 것처럼.
민주화운동 기념일 연설들을 포함해,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메시지는 대체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는 지난 4월 27일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의회 연설에서 "전체주의 세력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부정하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인 양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튿날 미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한 연설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들은 민주 세력 인권운동가 등으로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발언은 "전광훈 목사가 우파 진영을 천하통일 했다"는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의 인식과 맥이 닿아 있다. 지난 3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북미주자유민주주의수호연합 주최 강연회에서 김 최고위원은 "곳곳에서 이른바 자신들의 정권이 바뀌어도 나는 다음 정권이 등장할 때까지 그대로 남아 내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진지전을 계속 하고" 있다며 "공산주의 이론가 중에 그람시의 진지전 이론이 있는데, 그 진지전 이론이 가장 정확하게 적용되는 게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전광훈 목사는 "현 국내정세는 6.25전쟁 직전의 상황과 같다"며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자유우파는 대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람시의 '진지전' 이론을 받아들여 '공산 혁명'을 위해 사회 곳곳에 '좌파'들이 대한민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보자.
"자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하거나 자유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로막으려는 세력들이 나라 도처에 조직과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휴전선 너머 존재하는 북한이 만약에 사라진다고 쳐도, '대한민국 체제 위협'은 거의 항구적이다. 대통령의 인식 속 대한민국은 사실상 내전 상태다. 표면적으로 전광훈과 결별했다지만, '전광훈 정신'은 용산에 살아 있다.
'문재인은 간첩'이라는 박인환 위원장은 전광훈 목사의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전광훈 추천 당원을 내보내야 한다는 논란이 일자 "황교안 전 대표나 홍준표 시장은 한 때는 표를 얻으려고 전광훈 목사에 스스로 접근했던 사람 아닌가? 지금 와서 자기 생각에 안 맞다고 몰아내자고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고 전 목사를 옹호했다. 전 목사가 '문재인 하야 집회'를 하는 도중에 보수 정당을 찍으라고 말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전광훈 목사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다. 여기엔 석동현 변호사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석 변호사는 윤석열 대통령의 절친으로 잘 알려져 있고, 지금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임명장을 받았다.
'문재인은 간첩'이라는 박인환 위원장이나 '양민 학살' 진상규명을 비판한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 등을 정부에 기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극우 유튜버 안정권 씨가 초청된 것도, 안정권 씨 누나인 극우 유튜버가 대통령실에 채용된 것도, 뉴라이트 김성회 씨가 대통령실 종교다문화비서관에 기용된 것도, 극우 정당 자유의새벽당 출신 강기훈 씨가 대통령실에 근무한 것도, '북한 체제 파괴'를 주장한 김영호 씨를 통일부장관에 내정한 것도 모두 설명이 된다. '문재인이 군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지시했다'고 주장한 극우 유튜버가 공무원 교육을 담당하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에 내정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지전' 이론대로 '자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 하는 세력들'이 나라 도처에 조직과 세력을 구축하는 걸 막기 위해 '극우 유튜버'들 대동한 '진지전'을 펴려는 것인가.
요컨대 윤석열 정부는 가장 지독한 이념 정권이라고 규정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박근혜도 못한 것을 윤 대통령이 이룬 것이다. 언제부터 그가 '전광훈류'의 음모론에 경도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태극기 부대'나 '극우 유튜버'들이 사회 곳곳에, 고위 공직 곳곳에 '진지'를 파고 들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내년 총선 목표를 170석으로 잡았다고 한다. 극우 유튜버들을 적극 기용해 중도로 뚜벅뚜벅 나아가며 170석을 달성할 수 있길 바란다. 무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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