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과 장애, 교차되는 범주에 의해 가려졌던 독일 장애 여성들
1906년 독일에서 "절름발이 인구조사"란 이름으로 일반 장애 통계가 최초 시작된 이래, 제2차세계대전 이후로까지 독일의 장애인 통계는 '남성 장애인'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50년에 집계된 장애인 통계에서 남성의 비율은 97.4%였으며, 2차세계대전 피해로 인한 전쟁피해 장애의 경우가 그중 70%를 차지했다. 1950년대 독일(서독) 장애인 운동은 전쟁 피해 장애 남성들의 권리 운동 중심이었으며, 정부의 장애인 정책도 전쟁 상해자들을 위한 것이 주를 이뤘다.
이후 1960년대 중순부터 신체적 특성의 의학적 수준으로 장애를 파악하는 방식이 도입되면서, '여성 장애인'이 전체 통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9년, '중증장애인의 노동, 직업 및 사회 통합을 보장하는 중증장애인법'(Schwerbehindertengesetz)이 제정되면서 그간 장애를 정의함에 있어 주류 원칙으로 여겨졌던 '인과관계 원칙'이 마침내 사라졌다.
인과관계 원칙이란 장애 정의에 있어 '장애를 왜 갖게 됐는지'를 중요하게 보는 원칙이다. 중증장애인법이 제정되면서는 대신 '신체적 특성과 의학적 판단'에 근거해 장애를 정의하는 새로운 원칙이 세워졌다.
이로써 선천적·후천적으로 갖게 된 신체적 특성에 의해 장애를 판정 받은 '여성'들이 장애인 수치상에 포함될 수 있었고, 장애인 통계에 있어서의 성별 비율이 거의 비슷해졌다.
1970년대 독일에서 장애인 당사자 운동이 시작됐을 땐 '그동안의 장애인 운동과 정책은 남성 장애인에게만 초점을 맞춰 왔으며, 사회는 장애와 비장애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라는 구분에 따라 장애 여성에게 특수한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도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발생하는 장애 여성과 청소년들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폭로되었고, 장애 여성이 경제활동에서 배제되고 이것이 곧 경제적인 빈곤으로 이어진다는 문제도 함께 제기됐다.
실제로 당시 독일에선 '장애 남성의 고용률이 비장애 남성보다 낮다'는 지적과 함께 장애 남성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정책들이 시행됐지만, 장애 여성의 고용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1966년 장애 남성 고용률은 57%, 비장애 남성 고용률은 84%로 보고 됐지만, 장애 여성의 고용률은 아예 집계되지 않았다. 1989년 기준 장애 남성의 고용률은 32.9%, 비장애 남성 고용률은 63.8%, 장애 여성의 고용률은 18.6%였다.
장애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국가 폭력
'장애가 있는 여성은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인 요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이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 나치즘 하의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절정에 달했다.(1939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에선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요양원, 양로원, 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는 약 30만 명 이상의 장애인이 살해당했다. 필자 주.) 이 시기엔 국가가 장애인의 혼인 및 성관계, 생식 활동 등의 여부를 결정했다.
나치의 우생학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악치온 T4'(Aktion T4) 조치에 따라 장애인들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으로 식별됐고, 국가적 제거 대상이 되었다. 최대 40만 명 이상의 남성과 여성 장애인들이 그들의 의사에 반대해 불임수술을 받았으며, 그중 6천여 명은 강제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강제 나팔관 수술을 강요받은 여성들이었다.
나치 시대에 행해진 강제 불임수술의 피해자들은 이후 1990년대가 되어도 전형적인 국가 사회주의 박해의 피해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1933년 제정된 불임법(Erbgesundheitsgesetz, '유전건강법'이라고 불림)이 계속 존속했기 때문이다.
1992년 당시 사민당과 기민당 정부가 성년후견법(Betreuungsgesetz)을 제정해 법원이 장애인의 강제 불임을 결정하는 것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연방 법무부에 따르면, 1992년 전까지 매년 약 1000명의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여성 청소년들이 서독에서 불임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성년후견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장애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불임 수술 및 임신중절 수술은 계속 진행됐다. 1998년에 이르러서야 당시 정권을 잡은 사민당과 녹색당 정부가 기존의 불임법을 완전히 폐지했다. 사민당과 기민당 정부가 나치 시대 불임수술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 1990년부터 마련하기 시작한 기금은 2011년 사민당과 녹색당 정부에서 전쟁결과에대한일반법(Allgemeines Kriegsfolgengesetz) 개정이 있고 난 뒤에야 지급되었다.
산전 검사와 이어지는 임신중절 수술, 임신중단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을까?
나탈리 데드뢰(Natalie Dedreux)는 언론인이자 블로거이며, 다운증후군을 갖고 활동하는 장애인 활동가이다. 2017년 연방 선거를 앞두고 독일 공영방송 ARD가 진행하는 총리 후보 토론회에 방청객으로 참가한 데드뢰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 후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다운증후군 아기 10명 중 9명은 독일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임신중절 수술이 됩니다. (장애 판별 이후 시행되는) 임신중절(Spätabbruch)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98년생인 데드뢰는 산전 검사(기형아 판별을 위한 조기 진단용 혈액 검사) 문제와 다운 증후군이 있는 태아의 임신중절에 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서, 2019년 임신한 사람이 산전 검사를 받는 비용을 건강보험에서 모두 지급하는 현행법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작성하는 데 함께했다. 이 탄원서에는 3만여 명이 서명에 참여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독일에선 4주간의 청원 기간 내에 5만 명의 서명을 모으면 연방의회 청원위원회가 이를 검토하고 처리해야 한다. 필자 주.)
데드뢰는 다운 증후군을 가진 자신의 삶은 멋지며, 다운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 같아 두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임신한 사람이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 두려움의 이유는 세상에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소수이고, 이들을 차별하는 구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산전 검사 및 장애 가능성이 있는 태아를 임신중절할 수 있는 법은 여성의 자발적인 임신중단권과 연결되어 독일 사회에서도 가장 어려운 논의 주제 중의 하나이다. 2016년 한 부모는 다운 증후군 아이가 태어나자 '산부인과 의사가 태아의 21번 염색체가 3개 있다는 사실을 출산 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사를 고소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태아의 장애 여부를 알았더라면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소송은 기각되었다. 독일에서 태아의 장애로 인한 임신중절은 1995년 이후로 허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의 임신중단권과 장애
독일에서 임신중절의 원칙은 형법 제218조에 근거한다. 해당 법령은 '임신중절 수술은 임신의 지속이 임신한 자에게 생명의 위협, 혹은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져다줄 경우 가능하다'는 조건을 달고 있다. 산전 검사를 받고 난 뒤 태아에게 장애가 있다고 예상되는 경우, 이것이 임신한 자의 생명이나 신체적 위협을 크게 주지 않더라도, 정신 건강 및 예상되는 어려움 등을 고려해 의사가 임신중절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2022년 6월 개정된 형법 218조는 임신 후 12주 이내에 공인된 상담 기관을 통해 상담받고, 수술 전 사흘간의 숙려기간을 거친 뒤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태아의 염색체에 이상이 있거나 장애가 예상되는 경우 임신중절을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은 삭제되었다.
당시 장애인을 위하는 여러 시민단체와 교회 등이 이 개정안에 찬성했다. 여성의 임신중단권과 더불어 장애가 있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복잡한 이해와 입장이 독일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다.
가령 여성의 임신중단권 보장을 중시한다면, 태아에게 장애의 가능성이 있든 없든 자기결정권 차원에서 임신중절을 보장해야 한다. 반면 유엔아동권리협약 제6조 1항에서 명시하고 있는 아동의 "선천적 생명권"을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다.
데드뢰와 같은 장애인 활동가와 여러 전문가는 장애 예상 태아를 임신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이유가 "장애인에 대한 부족한 국가 지원, 장애인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편견과 거부, 장애가 있는 몸과 정신에 대한 몰이해" 등에 있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장애 아동과 생활하는 것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임신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임신중절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의사기도 하다.
독일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적대감 △장애를 안고 사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가정 △정상성만이 옹호되고 비정상적인 것은 경멸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 등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장애 예상 태아에 대한 임신중절 수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장애 아동과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비정상적인 두려움을 없애고,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를 바르게 이해하고, 장애를 갖고 생활하더라도 불편함 없이 이 사회에 포함되는 통합사회를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장애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과 경제적 빈곤
독일 인권연구소(Deutsches Institut für Menschenrechte)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독일에는 약 650만 명의 장애 여성과 청소년이 살고 있으며, 이는 전체 여성 인구의 약 15%에 해당한다.(로버트 코흐 연구소(RKI)는 2020년 기준 독일의 장애 여성 및 청소년 수는 500만 명, 전체 여성 인구의 약 12%로 집계했다. 필자 주.)
이중 약 8만 5천 명이 장애인이 운영하는 주거시설에 거주하고 있으며, 시설에서 사는 많은 장애 여성들이 차별과 폭력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거기에 농촌지역, 경제 취약계층, 이주민, 난민, 성소수자라는 지표가 더해지면 폭력과 차별의 경험은 더 빈번해진다.
연방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BMFSFJ)에 따르면, 독일 여성의 3분의 1이 일생에서 적어도 한 번은 신체적 폭력 또는 성폭력을 겪는다. 여성의 약 4분의 1이 현재 또는 이전의 파트너로부터 신체적 폭력이나 성폭력을 겪었다고 답했다. 그중 장애 여성은 거의 절반이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 동안 성폭력을 겪었고, 70~90%가량의 장애 여성이 성인이 되어서도 심리적 폭력을 경험한 바 있다.(BMFSFJ, 2022)
1998년 설립된 장애 여성, 레즈비언, 청소년 인권 단체인 바이버네츠(Weibernetz e.V, 직역하면 '여편네 네트워크')은 독일의 장애 여성은 비장애 여성보다 2~3배 더 많이 성폭력에 노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그럼에도 가정과 기숙학교에서 장애 여성이 겪는 폭력의 경험이 '여전히 충분히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장애 여성에 대한 차별금지, 배리어프리 확대, 장애 여성들의 자립강화, 폭력 예방 및 대처와 같은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각 주 정부 및 연방 정부의 장애인위원회(Deutsche Behindertenrat) 위원으로 참여해 적극적으로 장애 여성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인권연구소에 따르면 폭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장애 여성이 처한 사회 경제적 어려움도 독일 정부가 해결책을 찾아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장애 여성의 26%가 전문 자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비고용 상태에 있어 빈곤 위험에 처해 있다. 특히 농촌지역에서는 배리어프리로 된 산부인과 및 의료 시설도 부족한 상태다. 장애 여성의 4분의 3이 자기 자녀를 갖기를 원하지만 이를 실현하는데 재정적·현실적 어려움이 따르며, 장애 여성의 38%는 혼자 살고 다른 38%는 자녀 없이 파트너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거주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발효해 시행하고 있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UNCRPD) 제6조는 각 정부가 여성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집중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는 장애 여성의 자율성과 역량 강화도 포함된다. 이런 기준에서 독일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성적표는 아직 낙제다. 독일 정부가 장애 여성을 위한 다양한 지원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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