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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트램 운행 막은 독일 '전장연', 그들이 독일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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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트램 운행 막은 독일 '전장연', 그들이 독일을 바꿨다

[장애인 운동, 독일에 묻다 ①] 독일의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배리어 프리'의 실현

한국의 '장애인 이동권' 시위, 독일에도 있다

2022년 8월, 토요일 오전 9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서부역에서 휠체어 이용자 두 명을 포함한 네 명의 활동가가 기차역 플랫폼 난간에 끈을 묶어 매달렸다. 이 기차역은 지역 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이용객이 많지만, 여전히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사용자들이 승강장까지 이동하기가 고역스러운 곳이다.

장애인 이동권 직접행동 단체인 '롤펜더 비더슈탄드'(Rollfender Widerstand)의 활동가들은 "독일철도(Deutsche Bahn)와 프랑크푸르트시가 역에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주지 않으니 직접 이동 수단을 가지고 왔다"며 도르래 시위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3시간가량 해당 역을 지나는 근거리 지역 철도교통에 지장을 미쳤다. 시위는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기차 플랫폼에서 역 입구로 이어지는 난간에 몸을 매달고, 통행을 막으며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시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시위는 한국만이 아니라 독일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독일의 장애인들 또한 여전히 '이동'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승강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고장일 때가 많고, 버스 내 휠체어를 위한 공간은 하나뿐이어서 유아차 이용자와 나눠 써야 한다. 배차 간격을 이유로 휠체어 승차를 돕는 발판을 내리지 않는 기사들마저 있다.

다른 지역으로의 출퇴근이나 등하교를 위해, 혹은 도시 간 장거리 여행을 위해 자주 이용하는 독일철도의 경우, 장애인은 전날 저녁 8시 전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승하차를 돕는 직원을 연결하는 서비스 등록을 해야 한다. 직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오전 6시에서 오후 10시(작은 역의 경우 오전 8시에서 오후 8시)로 제한적이다. 장애인 지정석은 보통 화장실 옆일 때가 많고, 화장실 입구는 여전히 좁으며 고장도 잦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들은 궁극적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기차에 탑승하고 이동할 수 있도록 더 나은 배리어 프리 시설을 요구하고 있다.

▲도르래에 매달려 시위하는 롤펜더 비더슈탄드 활동가들. 당시 이들은 "2013년 독일 연방정부가 여객자동차운수법(PBefG)을 개정하면서 2022년 1월 1일부터 대중교통에 배리어 프리를 적용하도록 규정했고, 이 법을 프랑크푸르트가 속한 헤센주도 통과시켰는데, 이것이 아직까지 시행되고 있지 않다"고 항의했다. ⓒRollfender Widerstand 제공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일의 대중교통은 배리어 프리 시설을 갖춰가고 있으며, 이를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많은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 단체의 투쟁과 더불어 노조, 종교, 여성, 환경 단체 등을 포함해 차별에 반대하는 많은 시민단체의 연대가 있었으며, 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법안과 정책이 마련되면서 배리어 프리는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정책은 만들어졌을지언정 너무 더디게 시행되고 있다'는 게 장애인들의 입장이다. 시민의 권리 중에서도 일상생활, 사회참여, 노동 및 경제 활동에 기본이 되는 이동권을 보장받기 위한 투쟁은 독일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독일 장애인 운동의 시작과 이동권 투쟁 … '트램'을 막은 장애인 사회복지사

독일의 경우 68운동의 일환으로 장애인 운동도 시작됐다. 저항과 해방, 자유를 열망하는 것은 비장애인 대학생들만이 아니었다. 1968년 젊은 장애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클럽 68'(Club 68)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청년들이 함께 모여 여가 활동을 즐기며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같이 사는 사회를 도모하기 위해 시작됐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동 여가 활동에 중점을 두고 시작한 활동 과정에서 이들은 장애가 있을 시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장벽을 계속 경험했다. 그 경험 속에서 이들은 장애인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이 신체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점점 더 정치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클럽 68을 전신으로 1970년 '장애인과 그들의 친구 클럽'(Club Behinderter und ihrer Freunde, CBF)이 독일 전역에 만들어졌고, 이들은 각 지역 단위에서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들과 동일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장애인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는 장애인 활동가도 등장했다. 독일 장애인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인 구스티 슈타이너(Gusti Steiner)는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장애인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점들에 대해 알리고, 특히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시 발생하는 이동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념했다.

열한 살 때부터 진행성 근육 위축 장애로 휠체어 생활을 한 슈타이너는 정규학교에 다녔고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당시는 특수학교 제도가 없는 상황이었다. 1956년 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실습기회를 얻지 못했고, 이후 직장을 잡기가 어려워 개인교습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1972년, 자신의 모든 돌봄을 담당하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배리어 프리 아파트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또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경험으로 배웠다. 이를 계기로 슈타이너는 장애인 일상생활의 어려움, 특히 이동권 문제를 독일 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1974년 5월, 슈타이너는 사회복지사로서 자기 수업의 참가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독일 공영방송인 ZDF와 WDR이 이를 동행 취재했다.

당시 그는 정부와 지자체의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성인 교육 센터 폴크스호흐슐레(VHS)에서 장애인들의 자활과 재활을 위한 성인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외출은 해당 수업의 일환으로, 프랑크푸르트 시내의 건물 접근성과 대중교통 이용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먼저 슈타이너와 학생들은 우체국을 방문했다. 우체국은 예상대로 배리어 프리로 되어 있지 않았고, 이들은 간단한 우편 업무를 보기 위해 우체국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부서장 면담을 신청해 하루라도 빨리 우체국에 배리어 프리 시설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다음 이들은 트램 정류장으로 이동했는데, 첫 번째 트램은 휠체어를 탄 무리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 두 번째 트램 운전자는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도록 입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태울 수 없다'는 이유로 승차를 거부했다.

반복적인 승차 거부가 이어지자 슈타이너는 선로를 봉쇄하고 확성기로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제약받고 있는지 설명했다. 토요일이었고, 매우 붐비는 거리였다. 많은 사람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경찰들이 슈타이너를 옮기려고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30분간 이어진 시위와, 이를 지켜보는 행인들의 연민과 경멸 섞인 반응이 카메라에 담겨 전국에 방영됐다.

독일사회에서 이 일은 장애인의 이동권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사람의 공감도 일으켰다. 이후 독일 곳곳에서 장애인들이 제한된 이동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진행 중인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당시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는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서울시, 여당 및 일부 시민들에게 '비민주적인 폭력 시위'라는 비판을 받았다. 아래에서 소개될 과거 독일의 장애인 이동권 시위도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지만, 독일사회는 결국 '협의'를 도출해낸다. ⓒ연합뉴스

"불구에 정신질환" … 모욕적 판결에 분노한 장애인들, 거리에 모이다

1977년 브레멘에서 결성된 절름발이그룹(Krüppelgruppen)은 '모든 절름발이는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저마다의 곤봉을 가지고 있다'는 다소 도발적인 모토로 비장애인 사회복지사들이 주를 이뤘던 장애인 운동권에서 '당사자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사민당(SPD)이 주도하는 브레멘 의회가 최초로 장애인을 위한 차량 서비스를 도입했다가 예산상의 어려움으로 이 서비스를 제한하려고 하자, 이들은 거리로 나와 브레멘 시내 중앙 교차로에서 버스와 트램을 막고 시위했다.

이날 시위는 브레멘 시민들과 대중들에게 비민주적이라고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이들을 다음날 브레멘 의회를 점거하고 쇠사슬을 몸에 묶어 이틀 동안 단식 농성을 벌였다. 결국 사흘 뒤 절름발이그룹과 의회 간 합의가 도출됐고, 장애인 차량 서비스 예산삭감 계획은 철회됐다.

1980년 5월 8일, 독일 장애인 역사상 가장 큰 시위 중 하나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난다. 1년 전 제기된 한 소송이 발단이 됐다.

프랑크푸르트 지역에 사는 한 원고가 여행사를 통해 그리스 단체여행을 하던 중 '장애인이 포함된 스웨덴 단체여행객들과 함께 숙소를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한 불쾌감을 이유로 여행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법원이 원고에게 여행경비 750마르크(약 50만 원)를 감면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원고가 숙소의 열악한 시설로 불편함을 겪었던 것도 소송 이유 중 하나였다.) 이에 여행사가 항소했는데 1980년 2월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은 이 항소를 최종 기각했다.

이 일은 전국에 있는 장애인들과 장애인 차별에 반대하는 단체들, 노동조합, 성직자, 지역 정치인 등 많은 시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전국적인 시위로 촉발됐다. 특히 당시 담당 판사였던 오토 템펠(Otto Tempel)이 기각 사유를 말하면서 장애인 단체 여행객들에 대해 "불구에 정신질환(verunstaltet und geistesgestört)"이라고 표현한 일은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불문하고 모든 장애인이 거리로 나온 것은 독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5000 명 이상의 장애인이 거리로 나와 행진했다. 이날 시위는 프랑크푸르트 장애인과 그들의 친구 클럽에서 주최했지만, 절름발이그룹과 같은 다른 장애인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인 계기가 됐다.

장애인들의 대규모 시위는 그다음 해도 있었다. 유엔이 1981년을 '국제 장애인의 해'로 지정하고 12월 3일 '국제 장애인의 날'(International Day of People with Disability) 행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이를 반대하는 광범위한 동맹이 또다시 결성되었다.

장애인들은 해당 행사가 △장애인들의 관심사와 필요가 반영되지 않은 채로 진행되는 점 △장애인을 사회 시스템의 도움이나 배려를 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수혜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 등을 비판했다.

개막 행사가 있던 날, 이들은 독일 전역에서 장애인 작업장, 장애인 주거시설, 정신과 병동, 특수학교 등이 '장애인을 어떻게 사회와 분리시키는지' 알리며, 또한 그곳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사례들을 비판하며 국제장애인의날 반대 시위를 진행했다. 1981년 12월 13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절름발이재판(Krüppeltribunal)에서는 장애인시설 내 인권침해, 특히 장애 여성과 여성 청소년에 대한 성폭력 문제를 폭로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8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장애인 시위. 프랑크푸르트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중에 구스티 슈타이너(가운데 휠체어 이용자)도 있었다. ⓒArchiv der behindertenpolitischen

장애인 운동이 바꾼 독일사회 1980년대 후반, '진짜'배리어 프리가 대중교통에 등장하다 

이 시위들을 계기로 독일의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고, 장애인 정책과 관련해 중요한 사안이 결정되는 자리에 직접 참여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이동권과 관련해서는, 지역 수준에서 일상생활과 사회참여를 할 때 겪는 불편함을 얘기하고 이것을 실제로 바꿀 수 있도록 '정치'에도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작지만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절름발이그룹의 일부는 서독 녹색당(Die Grünen)에서 활동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주거환경 개선, 공공시설 이용 및 이동권 개선 등을 포함한 장애인 평등법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특히 '자기 결정적인 삶'에 기본이 되는 이동권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권리 중 하나였다. 1980년대 말까지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하노버 등지에서 이동권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이들의 요구는 지역의 버스와 트램을 배리어 프리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987년 5월 바이에른주 뮌헨시에서 세계에서 최초로 휠체어 탑승자의 교통 정의에 부합하는 저상버스가 도입되었다. 한해 전인 1986년 1월 뮌헨 시의회는 뮌헨 장애인과 그들의 친구 클럽의 수년간의 요구에 응답해 추후 만들어지는 5개 버스 노선에 휠체어 이용자도 문제없이 탑승할 수 있는 버스를 도입하겠다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당시 버스 탑승구의 바닥 높이는 80~110cm에 달했기 때문에 휠체어뿐만 아니라, 노약자나 유아차가 탑승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뮌헨시도 처음에는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휠체어용 승강기가 있는 고상버스를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1986년 3월 뮌헨 장애인과 그들의 친구 클럽 대표, 시의회 대표, 도시교통회사 대표가 함께 승강기가 설치된 고상버스를 체험 탑승하면서 프로젝트의 방향은 변경되었다. 체험 탑승에 참여한 대표단은 이 버스로는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장애 없이 이용하기가 어렵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당시 장애인 대표로 참여했던 뮌헨 장애인과 그들의 친구 클럽의 디이터 리히터함머(Dieter Richthammer)는 시각을 바꿔서 휠체어를 승강기로 버스 탑승구 높이까지 올릴 것이 아니라, 바닥 높이를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탑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출 것을 제안했다.

1987년 4월 뮌헨의 저상버스는 시민, 언론, 장애인 단체, 환경 단체 등의 많은 관심 속에 최초로 소개되었다. 이 버스는 두 개의 차량이 연결된 형태인 굴절형으로 만들어졌으며, 탑승구 바닥 높이가 34cm, 입구 넓이는 86cm였다. 앞쪽 차량의 입구는 계단이나 층이 없어 휠체어 탑승자를 포함해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노인, 유아차 등 다양한 교통 약자들이 무리 없이 버스에 탑승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네오플란(Neonplan)사가 만든 이 버스는 1987년 가을 프랑크푸르트 국제 모터쇼에서 소개되었고, 독일의 다른 도시들의 주목을 받았다. 브레멘과 게젤키르헨(Gelsenkirchen)시는 전시회 행사에서 즉시 저상버스를 주문했고, 여러 도시에서 저상버스의 도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버스 회사들도 저상버스 모델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1990년대에는 독일 전체 노선버스의 흐름이 저상버스로 변하게 되었다.

저상트램을 가장 먼저 도입한 도시는 절름발이그룹의 활동 근거지인 브레멘이었다. 1986년 브레멘 시의 요청으로 뮌헨에 본사를 둔 만(MAN)사는 브레멘에서 운용할 트램으로 바닥 높이가 기존보다 50% 낮아진 35cm 바닥 높이의 트램을 개발했다.

이 트램은 도어가 작동될 경우 발판이 작동해 30cm 높이로 바닥이 낮춰져 정류장 턱과 이어졌다. 이후 도어 작동 시에도 높이 차이가 없는 100% 저상트램이 개발돼, 1990년 2월 9일 세계 최초로 브레멘시 대중교통 서비스에 도입됐다. 이어 본, 베를린, 마데부르크, 슈페린 등에서 이 저상트램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후 독일 트램 제조회사들이 저상트램 모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80년 말 프랑크푸르트시는 2000년까지 기존 트램을 폐지하고 저상트램으로 완전히 전환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1993년 사민당(SPD)과 녹색당(Bündnis 90/Die Grünen)이 첫 적록연립 주 정부를 구성한 뒤, 곧바로 뒤바그(Düwag)사에서 개발된 저상트램을 도입했다. 작지만 실질적인 변화였다. 

▲지난 1월 서울지하철4호선 삼각지역에서 지하철 탑승을 두고 경찰과 대치 중인 문경희 세종보람센터 소장. 현재 전장연 측은 지하철 탑승 시위를 4월까지 유보한 상태다. 한국사회는 독일과 같은 협의와 변화를 도출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한예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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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어진

한국과 독일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정치/사회 부문 기고, 번역, 리서치, 팟캐스트 제작, 라디오 방송 리포팅을 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삶'이란 키워드로 독일에 사는 한국 녹색당원들과 만든 <움벨트>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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