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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전투적 자유주의자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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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전투적 자유주의자 리영희

[다시! 리영희] 찬란히 빛난 '리영희 기자'의 외신면

리영희 선생 따님 이미정 씨가 글 청탁을 했을 때 일단 무조건 쓰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우선 내가 리영희 선생을 존경하니까. 나도 그 시대 리영희 선생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리영희의 '공학도적 글쓰기'의 공백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지는 시대라고 생각되기 때문에(리영희는 자신이 글 쓸 때 ‘공학도적 엄밀성’을 추구한다는 점을 많이 강조했다.).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내가 사회학이란 진로를 우겨 진학을 선택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의 겨울에 나보다 1년 앞서 대학생이 된 누이가 읽어보라 건네준 첫 책이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선배 이미정을 좋아하는 그 과 후배로 이미정 씨처럼 전공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지식이 없어 보이지만 사람을 좋아한 내 누이 덕에 내 대학생활 첫 장은 리영희와 함께 시작했다. 나는 리영희 책에서 베트남전쟁과 문화대혁명의 이야기에 꽂혔다. 내가 중국연구자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아마 이 책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시절 많은 중국 연구자들처럼.

그렇지만 리영희를 아는 많은 분들과 달리 나는 개인적으로는 리영희 선생을 알지 못한다. 살아계실 때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다. 나는 살면서 아쉬움으로 남을 세 가지를 섭섭해하고 있었는데, 박현채 선생을 한 번도 직접 뵙지 못한 것, 정운영 선생 강의를 직접 들어보지 못한 것, 그리고 리영희 선생을 뵐 기회가 없었던 것이었다. 선생이 뇌졸중으로 한 번 쓰러지시고 나서인데 비판사회학회에서 2008년쯤인가 학술대회를 하면서 리영희 선생의 특강을 듣기로 결정한 적이 있다. 선생은 산본에 사셨고 나는 평촌에 살고 있어 내가 모시고 가면 되겠다고 기꺼이 자원했다. 행사 장소는 한양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잘 알다시피 선생 댁 입구에는 문패가 걸려있었다. 나는 선생을 처음 만났지만 알던 분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쓴 중국문화대혁명에 관한 작은 책자 <중국 문화대혁명>과 내 동료들과 함께 발간한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라는 책을 들고 가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은 선생 덕이라고 말씀드렸다.

선생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아주 큰 돋보기를 책상 앞에 걸어두셨다. 선생은 돋보기로 책을 보셔야 한다고 이야기하셨고 혈액순환을 위해 하루에 와인 한 잔씩 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하셨다. 집 뒤편 학교에 김연아 선수가 다닌다며 대견해하시기도 했다. 그 날 산본에서 한양대까지, 그리고 한양대에서 다시 산본까지 오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안하고 즐겁게.

리영희의 역사화인가 리영희의 현재화인가

나는 선생과 사적 친분이 있는 다른 분들과는 나름 조금 다른 입장에 서있을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을 글로 알았으니 글을 통해서 선생을 이해하고, 글을 통해 선생을 재해석하는 게 조금은 편하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내 해석을 담은 책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조반의 시대>(2012년)를 썼지만 아쉽게 전해드리지는 못했다. 2013년과 2014년 내 나름의 리영희 선생을 향한 오마주로 리영희와 문화대혁명, 그리고 리영희와 베트남전쟁에 대해 논문을 한편씩 썼다. (<한국 1960~1970년대 사유의 돌파구로서의 중국 문화대혁명 이해 -- 리영희를 중심으로>, <사이間SAI>14호, 105-148쪽, <'해석의 싸움'의 공간으로서 리영희의 베트남전쟁: <조선일보> 활동시기(1965-1967)를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18권 2호, 45-105쪽).

이 오마주 글을 쓰면서 나는 역사학자들과 토론할 기회를 가졌는데, 리영희에 대한 이해가 그들과 나 사이에 근본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발견하였다. 역사학자들은 리영희를 '역사화'하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고, 나는 리영희를 '현재화'하는 것이 과제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 리영희를 읽은 사람들, 그리고 특히 리영희와 사적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리영희가 '무엇'을 말했는지에 관심이 있고 이것을 부각하려 한다. 그러면서 리영희를 역사의 한계 속에 묻으려 한다. 대표적인 것이 당산 대지진과 뉴욕 쇼핑센터의 정전을 비교한 리영희의 짧은 글, 그리고 중국 사회주의 몰락 이후 리영희의 고뇌를 담은 글을 대비시키려는 경우일 것이다. 리영희 훌륭하지만 그 시대의 한계 속에 있던 인물이다. 안녕, 끝.

리영희가 나의 관심을 끌었고 아직도 나를 붙잡고 있는 지점은 거기가 아니었다. 나는 리영희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에 크게 관심이 있지는 않다. 나는 리영희가 '어떻게' 발언하는지, 어떻게 글로 분란의 복판에 개입하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게 사상가 리영희의 핵심이고 리영희를 현재화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루쉰을 스스로 체화한 리영희이기 때문이다. 리영희에 대한 차고 넘치는 많은 글들이 있지만 리영희가 '어떻게' 말했는지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많지 않다. 고병권 정도 아닐까. 그래서 리영희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을 것이다.

전투적 자유주의자 리영희에게 배운 것

'어떻게'의 리영희가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를 개인 경험을 통해 말해보도록 하겠다. 내가 있는 중앙대는 한국의 큰 재벌이 인수해 정말 대학 기업화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학생들이 적나라하게 경험케 했다. 그 극점은 2015년이었다. 재벌 총수 출신의 학교 이사장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다 갈아엎을 수 있다는 확신에 차서 전무후무한 사립대학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신뢰를 쏟을 몇 사람과 더불어 정말 전면적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때 나에게 싸움의 원칙은 '리영희처럼'이었다. 한국에서 교수들이 싸움하면 머리띠부터 매고 천막부터 치고 거리의 시위에 나선다. 내가 안 좋아하는 방식이다. 학자면 학자답게 글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게 학자의 존재의미 아닐까. 그래서 그 중앙대 2015년 싸움은 천막도 치지 않고, 거리 시위도 하지 않고, 오로지 글로만, 성명서로만 싸워서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고 그렇게 승리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이사장은 눈물을 머금고 퇴진했고, 본부 보직교수 전체가 사퇴했고, 좀 더 버티던 총장도 한 학기를 지나서 사퇴했다. 우리는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글로만, 글의 힘에 기대 싸워 이길 수 있다. 리영희를 잘 읽으면, 루쉰을 잘 읽으면, '과녁 없는 화살은 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킨다면 말이다. 우리는 조용히 승리한 그 싸움을 한국 '사립대학 투쟁사의 영웅적 승리'라고 스스로 불렀다. 리영희 선생의 덕이다.

나는 리영희를 한국사회 거의 유일한 '전투적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이다. 누군가는 '전투적'을 읽지 않고 뒤의 '자유주의'에만 매달려 그의 사상 한계를 비난할는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에게는 꼭 되물어야 한다. "너는 어떤 주의자"냐고. 그리고 너의 이상과 현실 개입을 오로지 "글에만 담아서 승리한 경험이 있느냐"고, 그런 넘치는 자신감이 힘이 되어 자유주의자들의 존경을 넘어 경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포부가 있냐고.

보통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쓴 성명서를 보면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이런 내용으로 끝난다. 공격의 상대는 그 성명서 읽어보지도 않는다. "아 그래, 우리는 원래 나쁜 놈들이야. 너희나 우아한 세계에 사세요." 상대가 읽어서 하나도 아프지 않은 성명서는 쓸 필요가 없다. 그런 성명서를 쓰고 만족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리영희의 강점은, 그가 작심해 어떤 글을 쓰고 과녁을 정확히 겨눠 화살을 쏘면 상대는 번민의 밤을 보내야하고 리영희를 잡아서 감옥에 넣지 않고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데 있다. 오로지 글로써만, 글을 무기로 삼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는가? 한국사회가 지금 이런 ‘전투적 자유주의자’들이 넘쳐나야 하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나는 리영희 이후 전투적 자유주의자는 씨가 말랐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불행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리영희를 기억할 것이다.

리영희 전투적 자유주의의 출발점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리영희의 이 전투적 자유주의가 어디서 나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리영희의 중국 분석이 많으니 중국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사람들은 리영희의 '도덕적 낭만주의'만 기억한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이 유토피아적 이상세계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냐는 <8억인과의 대화>의 스토리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오래 영향을 끼친 리영희는 그런 리영희가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말했듯이 '공학도적 엄밀성'을 지키려 했던 리영희이고 사실을 파헤치고 그 뒤에 숨은 다른 면모를 드러내려 끊임없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저널리스트 리영희가 더 중요한 모습이었다.

내가 <리영희 저작집>을 보면서 의아해 했던 것은 리영희 스스로 그의 가장 전성시대를 외신부 신문기자 시절이라고 여겼음에도 신문 기자 시절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고, 리영희를 안다는 많은 분들도 그 시기에 대해서 어떤 분석도 해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리영희 저작집>에는 그의 외신부장 시절 빛나는 작품들이 빠진 것일까?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 등 모두 그의 교수 이후의 글들을 모았을 뿐인데 말이다. 더욱이 1960년대라는 이 '잡지의 전성시대'에 리영희가 <조선일보>의 검열을 피해 자기 주장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세대>, <다리>, <정경연구> 등 새로 창간된 잡지에 기명뿐 아니라 때로 익명으로 많은 글을 실었음에도 이 글들과 외신면 기사를 비교분석하는 체계적 정리 작업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에 대한 두 편의 오마주 글을 리영희의 신문기자 시절, 특히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조선일보> 1965~1967년 시기를 복원해 보는 방식으로 조사해 썼다. 나의 결론은 리영희를 알고자 한다면 이 시기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리영희의 '공학도적 분석'의 백미가 있음을 보아야 하고, 그의 '도덕적 낭만주의'도 이 공학적 분석에 종속되어 이해되어야만 한다.

알려져있다시피 합동통신에서 일하던 리영희는 1964년 <조선일보>로 옮기고 1965년 방우영 체제가 들어서면서 발간부수를 늘리려는 신문 체제개편과 더불어 외신부장 자리에 임명된다. 서북세력인 선우휘가 잠시 물러나고, <국제신문>에서 영입된 편집국장 김경환이 신문 디자인을 주도하고 신문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리영희와 남재희가 핵심으로 영입되었다. 리영희는 외신부를 함께 꾸리자며 합동통신에 같이 근무했던 서동구를 외신부장 대우 차장으로 영입한다. 이 변화는 타오르는 불꽃같은 짧은 시기를 거쳐 금세 사그라지지만 참으로 인상적인 한 시절의 흔적을 남겼다.

1960년대는 지금도 연구가 많지 않고 '유신의 전사' 정도의 그늘에 가려 이해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1960년대는 4.19 이후 시대였고, 사상이 개방하여 정말로 개화했던 시대였다. 그 개화의 자리는 문학과 언론이었다. 이 1960년대의 특징을 두 인물로 정리하자면 그 시대는 시인 '김수영의 시대'이자 언론가 '리영희의 시대'였다. 김수영의 모더니즘과 리영희의 코스모폴리탄한 제3세계주의는 아직도 한국 사회가 되찾지 못한 찬란한 시절일 수 있다.

리영희의 요청으로 <조선일보>에 왔던 서동구는 이 신문사에 지배적인 '서북 세력'의 영향 때문에 변화가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느끼고 6개월 만에 <경향신문>으로 복귀한다. 그렇지만 생각이 잘 맞은 두 사람은 두 신문의 외신부 논조의 방향을 통일시키자고 합의했는데 "미국은 베트남에서 승리할 수 없고 마오쩌둥의 중국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이 보조를 맞추었다고 한다(2014년 서동구와 필자의 인터뷰). 베트남전쟁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 시기 신문들을 비교해 보면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의 외신면 논조만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빛나던 시절 외신면을 장악한 리영희가 어떻게 동시대적 국제정세의 해석에 개입하고 이것을 한국의 중요한 정치적 발언으로 만들려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아직도 이런 수준의 국제면을 다시 보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베트남 전쟁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보기

'공학도적'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리영희는 독특한 전략을 취한다. 베트남전쟁 비판은 주로 그 주동자인 미국 내부의 자료에 일차적으로 의존해서 수행했다. 그에 따라 독자는 이 전쟁에 대한 여론이 단일하지 않고 미국 내에서나 여타의 나라에서도 갈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반공주의의 맹목성과는 다른 관점에 설 때만 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인 북베트남이나 민족해방전선의 내부적 논리를 이해하고 그들의 내적 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논지는 기본적으로 '사실'에 대한 풍부한 장악력으로(일지, 지도, 인물관계도 등의 설명 방식으로) 지탱된다. 1970년대 이후 그의 저작에서 익숙하게 확인되는 이런 접근 방식이 이미 1965~1967년의 <조선일보>에서도 충분히 활용되고 있거나, 또는 이 시기에 정착되고 더 두드러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리영희가 '베트남 전쟁의 기본인식'이라고 불렀던 세 가지 주장, 즉 ①편견과 선입견의 배제 ②베트남 국민의 입장에서 접근 ③베트남전쟁의 현대적 성격의 복잡성 규명이라는 목표도 이 외신면에서 잘 드러난다. 리영희의 외신면과 더불어 우리는 사태의 '국외자'의 자리에서 점점 더 '내부자'의 위치로 옮겨가고 있었다. 우리와 적이라는 구분은 점점 더 의미를 잃게 되었다.

새로운 전환을 위한 준비를 거쳐, 1966년 2월 들어 리영희는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종합분석형 외신기사를 쏟아낸다. 2월 1일에는 북폭 재개에 대해 미국, 소련, 중국, 북베트남의 입장을 심도 있게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여주면서, 동독, 노르웨이, 바티칸 등을 포함해 다양한 국가의 반응도 보도에 넣었다. 2월 6일에는 베트남전쟁을 다룬 최초의 '리영희식 종합보도'라 할 만한 기사가 등장한다. 북폭 1년을 맞아 리영희는 6면 한 면 전체에 걸친 특집기사에 긴 해설을 싣는다(<기사 1>). 이 기사의 구성을 <북폭의 공과>, <막후협상>, <제2전선>, <자료로 본 전황일지> 등으로 세분화하여 체계적 분석을 시행하고 친절한 지도 한 장을 포함했다.

2월 20일에는 외신을 총동원하여 3면 전체에 걸쳐 우측에는 미 의회 내에서의 논쟁을 다루고 좌측에서는 하노이 내부를 분석하는 균형 잡힌 보도를 낸다. 하노이 내부의 소개에는 북베트남 노동당 기관지의 분석까지 실렸다. 이런 의도된 '객관성'은 리영희의 대중적 영향력의 원천을 이룬다. 그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대중에게 영향력을 끼치게 된 데도, 이 객관성은 중요했다.

▲<기사1> 조선일보 1966.2.6 북폭1년 - 월남확전 2년째 접어들어 달라질 양상은. ⓒ조선일보

아래 또 다른 유사한 방식의 기사작성에서도 같은 특징이 확인된다. 해설, 지도, 반론을 보여줄 국제적 학자와 통신사의 활용, 일지 정리 등의 방식으로 객관성을 최대화하는 전략이 일관된다<기사 1, 기사 2>. 우리는 마치 생생한 현장 논쟁에 참여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기사2> 조선일보 1966.4.14 <월남> 군정과 대중과 미국의 이음이곡(異音異曲) 속에 어디로 갈 것인가? ⓒ조선일보

▲<기사3> 조선일보 1966.12.20 월남전 1년 -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나. ⓒ조선일보

<조선일보>에서 리영희의 베트남전쟁 보도는 내부적 투쟁을 넘어서야 했다. 베트남 현장을 다녀온 특파원을 중심으로 편집국 내에 강력한 반공주의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한편에서는 '공학도적' 엄밀성과 폭넓은 국제학계 시야를 활용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외신부 기자들에게 전문성을 부여해 자기 이름의 약어를 다는 방식의 기사 작성을 독려해 이 벽을 넘어서고자 했다. 리영희의 이 경험주의 비판, 꼭 기억해야 한다. 현장을 대충 돌아보고 온 기자보다 현장에 가지 않고 밤새도록 텔렉스 앞에 앉아서 종합적 판단에 도달한 외신부 기자가 현실을 더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고 더 생생한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는 주장을.

문화대혁명과 사회주의의 모순

베트남전쟁보다 조금 늦게 발발했지만 리영희의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정점에 발발한 또 하나의 사건은 중국 문화대혁명이었다. 이 사건 분석의 심층보도에서 리영희의 전문성은 찬란한 성과를 낳는다.

신문 전면을 차지하거나 적어도 한 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기획기사들이 수시로 등장했는데, 앞서와 비슷하게 문화대혁명 분석에서도 확인되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들이 관찰된다(<기사4, 기사5, 기사6, 기사7>). 첫째로, 정보전달 기사라기보다 체계적 소논문 형식에 가까운 방식을 취하고 있고, 둘째로 사건 보도 자체보다는 사건이 드러내는 논리를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맞추고 있다. 셋째로, 외신부 기자 기명 기사인 경우도 있지만, 규모가 큰 기획기사일수록 편집자 명의로 구성된 방식을 취한다. 넷째로, 모든 주장에는 철저한 인용의 근거를 밝히는데, 그 주장의 주된 근거는 각국 통신사(서구, 일본, 사회주의권을 모두 포함)와 중국의 <인민일보>나 <홍기> 같은 공식 기관지들, 그리고 해외 전문가들이다. 다섯째로 기획기사는 핵심 사건의 요점, 외부의 시각, 연표나 조직구도의 소개, 문헌해제, 중요 인물이나 어휘들의 해석, 심지어 역사지도까지 결합하여 작은 자료집의 형태를 취한다. 여섯째, 명망있는 해외 학자와 해당 국가 정치인을 모아 가상 토론 형식을 취해보거나 현장 탐방기사 형식으로 다른 목소리를 담아낸다. 그리고 일곱째로, 이 시기 두드러진 관심인 마오파와 반 마오파의 대립 구도를 보여주려 하며, 그 대립의 사회적 파급 범위와 영향까지 추적하려 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 하나하나 외신면 보도를 한 편의 학술논문으로 발표해도 수준과 완성도를 갖춘 좋은 글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사4> 조선일보 1967.1.10 중공, 권력투쟁격화. ⓒ조선일보

▲<기사5> 조선일보 1966.7.5 중공을 휩쓰는 폭풍. ⓒ조선일보

▲<기사6> 조선일보 1967.2.21 인민공사의 정체. ⓒ조선일보

▲<기사7> 조선일보 1967.1.15 홍위대시위로 권력투쟁에 불지른 중공의 젊은 세대. ⓒ조선일보

이 모든 기사 분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적 도덕'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모순'이다. 이 시기 리영희 기사의 초점은 毛派(마오쩌둥파) 대 反毛派의 대립이다. 이 신문기사의 분석 수준은 지금 평가해도 매우 뛰어나고 객관적이다. 먼지가 가라앉고 자료가 축적된 한참 후에 비교적 차분한 분석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온갖 뒤섞인 보도가 쏟아지고 자기 입장을 옹호하는 상반된 입장이 난무하는 국제적 사건을 두고 동시대에 객관적 시선을 가지고 자기 입장을 세워 '공학도적 분석'을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2022년 지난 한 해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를 보면 1966-67년 리영희 외신부장의 수준을 따라잡은 매체가 과연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아쉬운 것은 베트남전쟁과 문화대혁명 모두 격화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1967년 이후에 리영희는 <조선일보>의 세력 싸움에서 밀려나 짧은 빛나는 시절을 청산하고 더는 외신면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장 인지도를 높이는 데 성공한 신문사와 사주는 리영희를 밀어냈다. 리영희는 1967년 후반기에 외신부장에서 밀려나 실권도 없는 조사부장으로, 다시 1년 후에는 기구에도 없는 심의부장으로 밀려났고 1969년 강제 사직당한다.

다시 공학도적 엄밀성의 글쓰기를 기다리며

리영희가 한양대 교수로 자리를 잡은 이후 시기에 베트남전쟁과 중국문화대혁명 모두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섰다. 학자 리영희는 신문기자 리영희의 입장을 계승했지만,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입장을 정하고, 객관적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학술논문 수준의 신문 기사로 정리하는 긴장성과는 다른 긴장성의 세계에 들어섰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영희 선생을 만났을 때 드린 책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2007년)는 문화대혁명 시기를 경험한 중국 노동자 90명의 구술사를 여러 동료와 함께 연구해 정리한 결과물이었는데, 이 책 서문에서 우리는 리영희 선생을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적고 이 책을 선생께 헌정했다.

절필을 선언한 리영희 선생을 향해 중국의 현실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투박한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연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리영희 선생의 문화대혁명 소개가 그 이후 연구자들에게 그 경험을 하나의 대안으로 인식시키는 계기였기보다는, 문화대혁명 자체를 하나의 핵심적 모순이자 문제로서 인식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고, 그것이 한국에서 비판적 중국 연구를 전개해 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한국에서 중국 연구는 '전환시대'의 산물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 책을 한국의 비판적 중국 연구의 문을 여는 데 헌신한 리영희 선생에게 헌정하는 것이 우리가 선생에게 진 빚을 다소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리영희가 이후 NLL 문제의 분석에서도 보여준 공학도적 엄밀성은 이미 외신부장 시절에 연마됐다. 객관성이 '당파성'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의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는 리영희의 신문기사 작성은 탐사보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미 1950년대 말 익명으로 <워싱턴 포스트> 한국 통신원으로 영문 기사를 작성하면서 신문의 세계적 수준에 익숙했던 리영희가 포스트-4.19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의 발언 공간을 만들어냈는지, 그의 '어떻게'를 어떻게 수용할지는 지금도 탐구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리영희를 읽고 현재화하는 방식은 역사를 '공학도로서' 분석해 결론을 끌어내는 그의 찬란한 시절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역사에 대한 '도덕적' 기대로 기울었던 몇몇 단편에서 출발할 이유는 없다. 그런 단편적 판단에서 시작해 그의 전체상을 나이브한 도덕주의자로 채색한다면 리영희를 굳이 다시 읽을 이유도 없다. 나는 국제정세에 대한 한국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의 태도를 '분석의 부재와 의지의 과잉'이라고 비판했는데(<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2022년), 리영희를 염두에 둔 판단이다.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던 세기 전환기, 해방에서 전쟁까지 치달은 194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이 처한 정세와 지식인들의 무능력이라는 상황은 지금 많이 달라졌을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 한국 내에서 국제정세에 대해 진지한 분석과 토론이 과연 있나? 한국은 미래가 있는가? 그래서 '공학도적 엄밀한 분석'을 보여준 전투적 자유주의자 리영희 선생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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