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교수님에 관해서는 국내의 많은 분들이 훨씬 더 잘 알고 계실 터이니, 재외국민인 내가 단편적인 몇 가지 에피소드를 가지고 글을 쓴다면 주제 넘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글 하나 쓰라는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의 부탁에 못 이겨 교수님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간단히 내 소개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재일동포 2세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에 모국유학을 왔다가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 위반 혐의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복역했다. 당시 약혼녀였던 민향숙도 함께 구속돼 3년 반의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13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풀려난 지 20일도 채 되지 않은 1988년 10월 말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한참 뒤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는 오사카에서 살면서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이하 동우회)라는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 동우회는 당시 질식할 것 같았던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려고 조국을 찾았다가, 날조된 간첩사건으로 투옥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한 재일동포 양심수들의 모임이다.
터무니없게 간첩 낙인이 씌워졌던 재일동포 양심수들은 감옥 안에서도 냉대를 받았다. 그나마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대면서도 오랜 수감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구속된 지식인을 비롯해 청년 학생들과 제한적이나마 교류했기 때문이다. 재일동포 유학생사건 피해자들은 대부분 민주화 운동의 원로들을 감옥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내가 리 교수님을 서대문구치소에서 처음 뵙게 된 것은 1977년 겨울 무렵으로 기억한다. 공안기관이 교수님의 역저인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의 내용을 트집 잡아서 구속한 직후였다. 당시 나와 가까운 방에 수감돼 있던 교수님은 추운 날 운동장에 나갈 때면 두 손에 양말을 끼고 계셨다. 자세히 보니 그 양말에는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양말에 구멍이 나 있는데요."라고 하니, 교수님은 "책을 읽을 때 엄지손가락이 나와 있어야 책장을 넘길 거 아니야."라고 하셨다. 훨씬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교수님은 그 무렵 노모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식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암울하고 비통한 상황에서도 교수님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김지하가 옥중에서 읽어보라고 당부한 테이야르 드 샤르댕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었다. "교수님, 가을 하늘이 이렇게 높은데 우리한테는 철창의 손바닥 만한 하늘밖에 허용되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더니 잊을 수 없는 명답이 돌아왔다. "무슨 소리야, 하늘은커녕 땅도 허용되지 않네!"
마침 어떤 젊은 수인이 운동을 마치고 교도관의 감시 아래 걸어오다가 "리영희 교수님 아니십니까. 그간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했다. 교수님은 "그래, 자네도 잘 지내고 있나?"라고 답하셨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분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었더니, 교수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자네는 김지하도 모른단 말인가."
그날이 내가 김지하 시인을 처음 알게 된 날이다. 김지하 시인은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975년 2월 일단 석방됐으나, <동아일보>에 인혁당 사건 조작이라는 글을 써 다시 수감됐다. 김 시인은 당시 감옥 안에서도 철저한 격리대상이었다. 구치소 당국은 김 시인을 넓은 3사 상에 혼자 수감했다. 당시 서대문구치소의 1관구 쪽은 2층짜리 수용건물이 6개 나란히 있었는데 3사 상은 3번째 사동의 2층을 의미한다. 김 시인이 다른 수감자들과 일체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주변 옆방들을 다 비워 놓은 것이다.
김 시인이 수감된 방 앞쪽에는 3각형 모양의 마당이 있었는데 어느 때부터 재소자의 운동장으로 쓰이게 됐다. 나는 교도관의 눈을 피해 몇 번이나 그와 통방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재일동포 유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으냐."고 묻고서 "일본에서 그의 책을 구해서 꼭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가톨릭 사제인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였다. 김 시인의 사유의 폭이 얼마나 폭넓은지 알 수 있었던 대목이다.
양심수동우회와 리영희 교수님과의 만남
재일동포 양심수들은 국내 민주화 투쟁의 성과와 일본 시민들의 헌신적인 석방운동에 힘입어 감옥에서 풀려나 다시 일본에서 힘겨운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는 연락이 닿는 사람들 중심으로 동우회를 결성하고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행사를 벌여왔다. 1992년도부터 일본 5대 도시에서 다섯 차례 개최한 '한국양심수서화전'이 대표적이다. 또한 일본의 양심수구원운동 단체들과 함께 '문익환 목사 추도식', '재회의 밤 콘서트'를 개최했다. 한국 가톨릭인권위원회와의 교류회를 만들었고 6차례에 걸친 '북한 주민들에게 사랑과 식량을! 캠페인'을 열었으며 '김수환 추기경 추도식'을 했다. 6·15공동선언 5, 6주년 민족통일대축전(평양·광주)에 참가했고, 최승호 피디가 제작한 영화 <자백> 상영회와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을 기록한 <조국이 버린 사람들>의 일본어 번역판 출판기념회도 벌였다. 박형규 목사 강연회(1994년 5월), 문호근 선생 강연회(1997년 4월), 강용주 선생 강연회(1999년 2월) 등 본국의 민주인사들을 모셔서 이야기를 듣는 자리도 마련했다.
민주인사 초청 강연을 추진하면서 리영희 교수님을 먼저 모시고 싶었지만 시국이 좋지 않아 유산된 적이 있다. 리 교수님을 초청하기로 하고 전화로 여쭤보았다가 오히려 꾸지람(?)만 들었다.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문제가 폭로돼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교수님은 사찰 대상 명단에 주요 인사로 들어 있었다. 국내 정황에 어두웠던 내가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강연 요청을 드렸으니 교수님은 아마도 어이가 없으셨던 것 같다. 교수님은 "자네는 지금 어떤 때인지 알고서 그런 요청을 하는 거야?"라고 나무라셨다.
그러다가 2000년 8월 서승 선배가 리 교수님의 책 <한반도의 신밀레니엄-분단시대의 신화를 넘어서>(사회평론사 발행, 서승 감수, 원제는 <반세기의 신화>)를 일본에서 번역출판하면서 동우회에서 기념강연회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우리는 바로 찬성했고 그해 10월29일 오사카에서 기념강연회를 열었다. 강연 다음날 교수님을 모시고 서승 선배와 동우회 몇 사람이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온천여관에 갔는데 그때 들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케네디, 책상 위에 다리 올린 채로 박정희 맞아
모처럼 교수님을 모시고 식사하며 술도 들어가니, 우리 기분은 최고조였다. 교수님은 그 자리에서 5·16쿠데타로 전권을 쥔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1961년 11월 방미했을 때 <합동통신> 기자로 수행 취재하던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대충 다음과 같은 얘기였다.
박정희 장군 일행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안'을 가지고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갔을 때다. 백악관 집무실로 들어간 일행을 케네디는 의자에 앉은 채로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케네디는 박정희를 '제너럴 박'이라고 호칭하면서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그는 박정희가 가져간 계획안을 설명하려고 하자 "당신들은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말고, 계획을 세워 줄 테니 우리가 보내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동행 취재하던 다른 기자들은 한국이 준비한 경제개발안을 미국이 모두 승인했다는 정부 발표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보도했다. 그러나 교수님은 자신이 취재하고 확인한 내용을 그대로 써서 본사에 보냈다고 한다. <합동통신> 간부들은 교수님이 보내온 기사 내용에 난감해하다가 그대로 출고했다. 박정희의 눈 밖에 난 교수님은 결국 수행기자단에서 쫓겨나 중도 귀국했다고 한다. 나는 그때부터 교수님이 문제 언론인으로 당국에 낙인찍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서 <조선일보>의 김 아무개 기자에 관해서 여쭤보았더니, 교수님은 자기가 아는 기자 중 가장 수준이 낮은 사람이라고 호쾌하게 말씀하셔서, 모두가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교수님이 귀국하고 나서 몇 달 뒤 자택에서 쓰러지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조마조마했다. 혹시 일본 강연 때문에 너무 무리해서 병이 나신 것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됐다.
김승훈 신부 선종과 명동성당에서의 재회
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었던 김승훈 신부는 내가 수감돼 있을 때부터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따뜻한 사랑을 주신 분이다. 김 신부가 2003년 9월초 갑자기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민향숙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바로 한국으로 들어와 명동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때 명동성당의 많은 인파 속에서 지팡이를 짚고 돌계단을 내려오시는 리 교수님과 윤영자 여사를 만났다. 교수님은 우리가 김 신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줄 아시고 입관식이 시작되기 전에 빨리 가 보라고 하셨다. 나는 교수님의 몸 상태에 관해 여쭤볼 겨를도 없이 지하성당으로 달려갔다.
윤영자 어머님과의 반가운 만남, 졸저 <장동일지> 전달
인연이란 것은 생각지도 않은 데서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한겨레> 신문에 오래 근무했고 책도 여러 권 낸 김효순 이사장한테서 2021년 10월 한 통의 메일이 왔다. 김 이사장은 간첩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재일동포 문제를 다룬 <조국이 버린 사람들>을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했고, 내가 오래전에 써 놓은 옥중수기를 정리해 일본에서 <장동일지>란 제목으로 출간했을 때 사전에 원고를 검토해준 관계로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던 터였다. 메일의 내용은 혹시 교수님 따님이 운영하는 베트남국수집에서 식사를 하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노잣돈'을 전달한 일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걸 보자 머리 한구석에 치워놓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2018년 12월 양심수동우회가 제3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뜻밖의 영예를 안게 됐다. 나는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몽양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기금 마련을 위해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개최한 도자기 전시회에 들렸다. 그 자리에서 우연히 이부영 선생을 만났다. 이부영 선생은 반갑다고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면서 연희동에 있는 한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 자리에 가서 안 것이지만 교수님 따님이 하는 베트남국수집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2010년 12월 돌아가셨을 때 조문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식사를 마친 뒤에 나는 따님에게 교수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니 오늘은 '향값'을 드리고 싶다며,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건넨 적이 있다.
코로나 역병이 전 세계를 돌면서 한국과 일본의 왕래는 사실상 거의 중단됐다. 2022년 5월 코로나 사태가 다소 안정되고 의무적인 격리조치가 해제되자 나와 민향숙은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을 달래고 바람도 쐴 겸 한국을 방문했다.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모란공원에 모신 장모 조만조 님의 성묘였다. 장모님은 사위를 잘못 둔 탓에 오랜 기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의장을 하면서 궂은일을 도맡으셨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재일동포 양심수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을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몇 분들에게만 방한 소식을 알렸다. 여기저기 소문내지 않고 잠시 조국의 숨결을 느꼈다가 조용히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뜻밖에 윤영자 어머님으로부터 인편을 통해 만나고 싶으니 시간을 낼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나와 민향숙은 따님이 하는 베트남국수집에서 사모님을 뵙게 되었다. 사모님은 민향숙을 끌어안고 반가워하셨다. 90세가 넘었다고 하는데, 훨씬 젊어 보이셨다. 기억력도 또렷해서 김승훈 신부 장례식 날 명동성당 계단에서 우리와 만난 것도 기억하고 계셨다.
즐거운 재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민향숙은 "당시는 이해동 목사님 사모님이 제일 젊으셨고, 리 교수님 사모님은 두 번째로 젊으셨는데..."라고 회상했다. 1970~80년대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인 공덕귀 여사,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 박형규 목사의 부인인 조정하 여사 등 재야 원로 여성들이 민가협 활동을 지원해주셨다.
윤영자 여사와의 만남이 나로서 더욱 뜻 깊었던 것은 졸저 <장동일지>를 직접 드릴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내가 감옥에서의 오랜 수감 생활을 기록한 책을 내리라고는 수년 전만 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장동일지>의 토대가 된 것은 1995년 무렵에 옥중 생활을 회고하며 쓰기 시작한 수기였다. 당시 4살, 6살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들을 보면서 처와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진다면 아이들이 부모를 어떻게 기억할지가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래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고달픈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이 커서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밑도 끝도 없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작업 중 자투리 시간에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틈틈이 쓰곤 했다. 써놓고 보니 노트 7권의 분량이 됐다. 세상에 드러낼 글도 아니어서 서랍 깊숙한 곳에 집어넣고는 쭉 잊고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 끝에 한국에서 민주화가 단계적으로 이뤄져 가면서 재일동포 조작사건에 대한 본국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인권변호사들이 애써준 덕분에 재심을 통한 무죄판결이 이어졌고 우리들의 억울한 사정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나 영상 다큐물이 국내에서 나왔다. 국내의 시민단체들과 교류가 확대되면서 나를 비롯한 양심수동우회 회원들은 조국에 대한 귀속감이 더욱 강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노트가 떠올랐고 용기를 내서 수기를 다듬어 2021년 6월 출판까지 하게 된 것이다.
재일동포 조작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커지자 일본 언론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장동일지가 나온 그해 10월24일 우리 부부 얘기를 1, 3면에 걸쳐 크게 다뤘고 12월에는 마이니치 영문판이 같은 내용의 기사를 1, 2부로 나눠 게재했다. 내 얘기가 신문 1면에 실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올해 2월에는 <아사히신문>이 '독재가 빼앗은 청춘'이라는 타이틀로 동포 유학생 사건 등 공안 사건을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일본의 대형 신문이 재일동포 사건을 이 정도로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은 거의 유례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은 리영희 선생을 비롯한 본국의 민주인사들이 우리가 좌절하지 않도록, 고립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따듯한 시선을 보내준 덕분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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