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대학에 입학한 위수령 세대의 우리에게 리영희 선생은 큰 어른이셨다. 박정희 군부독재에 의해 대학이 짓밟히던 시절, 우리에게는 참으로 읽을 책이 없었다. 한국에 선교사로 와 있던 부라이덴슈타인(한국명 부광석)의 세미나용 지침서 <학생과 사회정의>나 황성모의 <사회사상사>가 고작이었다. 결국 이미 십여 번 이상 복사했을 법한 파울로 프레이리나 이반 일리치의 영어판 책의 흐린 글자를 짜 맞추며 우리는 해질 무렵의 침침한 강의실에 둘러앉아 세미나를 하곤 하였다. 혹은 운동권 선배들이 지도아래 속성으로 일본어 어학과정을 마친 후 일어판 사회과학 서적을 구해 읽었다. 이런 시절인 1974년에 <전환시대의 논리>가 출간되었으니, 우리에게는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형국이었다.
내게 리영희 선생은 멀리에서 존경과 함께 바라보는 큰 인물이셨다. 나는 천성적으로 소심한 사람이다. 게다가 민주화운동에 치열하게 투신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늘 내면화하고 있었으니, 리영희 선생께 적극적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좋은 기회가 왔다.
나는 리영희 선생을 1991년 3월 7일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열린 남북학술회의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한마당'에서 만났다. 하버드대학교 엔칭연구소에서 주는 연구비를 받아 보스턴에 체류하고 있는 나에게 전 국회의원 이미경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천신만고 끝에 처음으로 열리는 남북학술회의에 참석을 부탁하였다. 박형규 목사, 리영희 선생과 함께 이효재 선생이 참석하려 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미국에 체류 중인 나에게로 소중한 기회가 왔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나타난 젠더불평등을 목도하면서, 한국의 여성운동가들은 분단과 평화실현 그리고 통일과정에서 여성의 참여와 역할에 대해 깊은 고민을 나누고 있었던 분위기인지라 여성계에서 누구라도 이 역사적인 학술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였던 까닭이다.
이렇게 나는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박형규 목사와 리영희 선생, 그리고 북에서 온 박영수, 김경남 선생과 함께 격정의 4일을 보냈다. 박영수 씨가 후일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알려진 날카롭고 냉정한 엘리트였다면,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인 김경남 씨는 해외 활동이나 남측과의 교류에 익숙하지 않은 순박한 인물이었다. 학술대회는 버클리 대학 교회와 남북평화문제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해 온 한인교포·대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마련했다. 감동, 열정, 갈등으로 점철된 이 회의는 미주 한국 언론사들의 악의적인 기사와 우익 교포들의 방해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남과 북이 함께 학술토론을 할 수 있었던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국 언론에서도 대서특필한 이 행사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있었던 박형규 목사의 발언을 문제 삼으면서, 귀국길에 두 분은 큰 곤욕을 겪으셨다. 공항에서 극우세력의 계란 세례를 받았고, 수사기관에 불려가야 했다. 다행히 나는 8월까지 하버드대학에 체류했던지라 이 곤욕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인연으로 나는 박형규 목사와 리영희 선생을 종종 찾아뵈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편찮으실 때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은 지금도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나는 가까이에서 리영희 선생을 뵈면서, 예리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글이 지닌 강점 외에도 선생께서 얼마나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분인가를 발견하는 즐거운 경험을 하였다. 마음이 맞는 상대를 만났을 때, 혹은 유쾌한 일이 생길 때 선생 눈가에 바로 떠오르는 기쁨의 표정과 빛나는, 그러나 때로는 치기어린 눈빛은 늘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희열을 느끼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를 신선하게 수용하는 그 분의 정신세계를 보여주었다. 때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분노를 솔직히 드러내거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논평으로 우리를 늘 긴장하게 하였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유인 리영희 선생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엉거주춤하며 당혹스런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의 우리 모습을 보면서, 더욱 리영희 선생의 그런 모습이 그리워진다.
우리가 살았던 긴 고난의 시대에 문필가이자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리영희 선생이 해 오신 역할은 이미 잘 알려지고 정리되어 있다. 특히 공론의 장을 주도한 선생의 논리와 주장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나는 리영희 선생 책을 찾아보러 내 작업실 근처에 있는 영등포평생학습관에 갔는데, 여기에도 20여 권 이상의 관련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동네에 있는, 주민들이 자주 가는 작은 도서관에도 선생의 저서나 선생에 관한 서적이 이렇게 많이 소장되어 있을 정도다. 그는 여전히 시민들 곁에 살아 있다.
이 지면에서는 사적인 영역에서 만났던 선생의 모습을 언급하고 싶다. 그는 자신의 지적 고민을 숨기지 않은 사람이었다. 1998년 11월 한겨레신문사 북한 방문단의 일원으로 북을 다녀온 이후, 리영희 선생은 이 체제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으셨다. 죽은 누님의 소식을 듣고, 조카를 만나고 오시면서 겪은 감정의 파고를 숨김없이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북한의 경직성을 더 확고하게 비판하셨다. 북한 방문 직후 몇몇 어른들과 함께 만난 저녁식사 자리에서 리영희 선생은 김일성 부자의 시신을 안치한 금수산궁전을 방문한 이후 느꼈던 감정을 "어떻게 인민들이 굶고 있는데, 황금으로 치장된 그런 숭배 장소를 세울 수 있는가"는 지적으로 표현하시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개탄의 심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셨다. 이후 리영희 선생의 글에서 나타난 북한 비판은 민주화운동 내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1998년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가 창설된 이후 거의 십수 년간 이 조직에서 나는 정책위원장이나 상임대표로 활동하였다. 어쨌든 남한의 보수와 진보가 함께 남북 간의 만남을 기획하고, 이 이질적인 집단들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면서, 평화체제 실현을 조금씩 조금씩 진전시키고자 하였다. 지금의 남북관계에 비추어 이런 노력을 실패로 평가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조직을 통해 남북은 서로를 알아갈 수 있었고, 상호 윈-윈하는 체제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전망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개인적 욕망들이 얽힌 복잡한 남남갈등, 그리고 일일이 밝힐 수 없는 남북 간 갈등관계로 점철되었다. 결국 우리는 남북소통과 교류라는 목표 하나를 위해, 더 크게는 운동의 당위성을 위해 자잘하지만, 일상적인 삶에서는 용납하고 싶지 않은 여러 문제들을 수용하고 함구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북한사회가 지닌 1인 숭배, 폐쇄적 사회통제, 개인적 사유의 억제 등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북한 방문 때에도 대외정책 책임자 앞에서 북한의 문제점을 솔직히 지적했던 '비판하는 남한사람' 리영희의 모습은 우리에게나 그들에게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내 생각은, 역시 긍정 반, 부정 반이야"라는 선생의 고백은 그가 지닌 균형감각을 보여줬다. 단체나 조직의 일원으로서 남북교류에 참여했던 우리와는 달리, 문필가로서, 자유인 지식인으로서 선생은 이런 비판자가 되어야 했다. 선생께서 그렇게 보여주신 모습은 우리 현대사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이자 귀감으로 남아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낸시 프레이저가 말한 대로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혼란의 공간이다. 중앙집권적인 정당이 대변하는 노동계급과 혁명적 의식의 발전을 논의하던 과거의 이념정치는 사라지고 있다. 586세대가 주도하는 정치가 끊임없이 비판대 위에 올라오고 있다. 의식구조나 행동양식, 그리고 생활방식과 관련하여 민주화운동 세대가 받기 시작한 비판을 '인간적이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은 일찍부터 예견한 것이 아니었을까?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집회에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시위를 지나오면서, 우리에게 각기 특수한 형태의 억압과 차별에 분노하는 비-조직적인 파편화된 대중,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의 유동성, 주도적인 정치주체의 부재, 그리고 여러 지점에서 우연적으로 결집하는 다중과 그 집단의지의 발현이 거대정치를 움직이는 새로운 세상이 다가왔다. 우리보다 늘 시대를 앞서 가시는 리영희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 이 당혹스런 포퓰리즘 시대에 엉거주춤 서 있는 우리에게 어떤 날카로운 조언을 던지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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