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심과 경쟁심으로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세계에 절망한 나는 선생님께 질문했다. "과연 인간의 이성이 본성을 누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바로 단호한 어조로 답하셨다. "이성도 본성이야!" 오랫동안 어정쩡하게 생각하고 있던 의문이 갑자기 풀리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옆에 있던 학생들이 의아한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 본성을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의 경쟁적 속성에만 주목해서 약육강식이라는 왜곡된 해석을 자연법칙처럼 배웠다. "생물학자들의 죄가 크다"고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도 자책한 바 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오로지 주변을 제압하고 이기는 것이라고 믿도록 했기 때문이다.
적자생존 원리를 권력과 경쟁의 논리로 왜곡한 것은 생물학만이 아니다. 모든 근대 학문이 함께 저지른 잘못이다. 그렇게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고, 자본주의 승자독식 원리를 뒷받침했다. <동물의 왕국>은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포식자를 ‘왕’이라 했고, <오디션>은 극단적인 경쟁으로 사람들을 내몰았다.
그러나 최근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 교육학 분야에서는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인 공감과 협력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다정하고 협력적인 종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지구상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집단을 만들고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약해도 집단은 강하다. 집단을 만들고 협력하려면 공감과 소통, 그리고 갈등을 조절하는 이성이 필요하다. 현생 인류는 이미 전 지구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하고 그것을 관리하며 살고 있다.
맹자는 동물과 다른 인간의 본성은 바로 이성이라고 했다. 이성이란 "진실을 찾기 위해 모든 정보를 모아 결론을 도출하는데 의식적으로 논리를 적용하는 능력"이라는 정의도 있다. 선생님의 평생 좌우명은 '진실'이었다. 그 진실을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온 인간 이성의 화신 같은 분에게서 직접 받은 가르침은 울림이 컸다.
그런 선생님을 모시고 일본에 갔다. 2004년 2월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에서 주최하는 희생자 추도제에서 선생님은 기조강연을 하셨다(이때의 에피소드는 <진실에 복무하다> 권태선 지음, 창비 2020: 396~400쪽에도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강연 다음날 선생님과 삿포로 시내에 있는 조선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화합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을 때였다. 호텔 로비에 모여서 출발하기 직전 학교 측으로부터 저명한 민주화 투사이신 리영희 선생님이 모처럼 오시는 길이니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생님이 갑자기 호텔방에 다시 갔다 돌아와야겠다고 하셨다. 어제 평상복 차림으로 대중강연까지 하셨던 분이 넥타이를 매야겠다는 것이다. 일본 땅에서 억압받으며 자라는 청소년들을 만나는데 조금이라도 소홀한 모습으로 가면 안 된다고. 정장 차림의 선생님은 열렬히 환영하는 학생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자상한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
리츠메이칸대학의 서승 교수는 선생님을 교토로 초청해서 강연과 좌담회 자리를 만들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총련의 한 간부가 <조선신보> 기자를 대동하고 선생님을 찾아왔다. "남조선 민주화투쟁에 앞장서신 리영희 선생님의 혁혁한 업적은 잘 알고 있습니다. (...) 이제 이 <조선신보> 기자에게 잘 말씀해주시면 동포사회에서도 유명해지실 겁니다." 선생님은 바로 정색하고 일갈하셨다. "난 평생 내 이름 내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이 아니외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 건 관심 없어." 그러곤 정면을 보고 딱 입을 다무셨다. 한동안 그 자리에 있던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총련 간부가 다시 말했다. "저 <조선신보>는 동포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신문이라..." 말하는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선생님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권력에 맞서 싸워보지도 못한 것들이..."
이렇게 단호한 선생님은 사실 일상에서는 호기심과 장난기가 충만한 분이었다. "정 교수, 여기 안산 다문화거리인데 전에 말하던 파키스탄 식당이 어디요?" 환갑이 지나서 운전을 배우신 선생님은 그동안 고생만 시킨 사모님의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가까운 식당과 온천을 찾아가는 것이 취미였다. 문화적 편견이 없는 코스모폴리탄 취향의 선생님은 뭔가 새로운 장소,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인류학을 하는 나를 좋아하셨고, 다양한 외국 친구들과의 만남을 즐기셨다.
어느 날 문득 나를 보고 "나 다시 태어나면 인류학 할 거야" 하신다. 우쭐한 마음에 "그렇죠. 재미있겠죠?" 하고 맞장구쳤다. 금방 "아니 정 교수 같은 문화인류학 말고, 고고인류학 같은 게 좋지. 오차 범위가 몇 만 년씩 돼도 트집 잡는 사람이 없잖아." 수십만 년 전의 돌도끼를 연구하는 동료 교수에게 전하니 "허허, 맞는 말씀이네" 하며 얼굴을 붉힌다.
몇 년 뒤, 선생님은 '절필·절언선언'을 하셨다. "선생님, 떨리는 손으로 글 쓰시기 불편해하셨으니 절필선언은 이해가 되는데, 굳이 절언선언까지 하실 건 뭡니까?" 선생님 말씀이 늘 아쉬웠던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여 봐,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모른다니까. 사건 터질 때마다 한마디 하라고 하면 얼마나 힘든지 알아? 허튼소리하지 않으려면, 매일 신문 보고, 잡지 보고, BBC, CNN, NHK 뉴스까지 미리 보고 생각을 해두어야 하잖아!" 선생님께서 인류학, 그것도 고고학이 부럽다고 하셨던 말씀이 그냥 농담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자신에게 엄격한 선생님은 다른 이들과의 농담과 낭만을 즐기는 데 달인이셨다. 선생님께는 "그동안 적조(積阻)했습니다." 따위의 겉치레 인사가 필요 없었다. 자신을 보고 싶으면 바로 찾고, 주고 싶으면 주는 거침없는 관계를 좋아하셨다. 이웃에 살던 나에겐 "한동안 뜸한데 무슨 일 있었어?" 불쑥 전화를 하시고, 맛있는 술이 생겼는데 한잔 하자고 부르시기도 했다. 한번은 불편한 몸으로 우리 집까지 걸어와서 슬며시 우편함에 책을 넣어두고 가셨다. 깜짝 놀라 왜 그냥 가셨냐고 전화를 하니까 "응~ 새 책이 나와서 자랑하려고. 그냥 책장에 꽂아 둬" 하신다.
인류학회 모임을 끝내고 오랜 친구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머리숱이 적어서 밀어버리고 더부룩하게 하얀 수염을 기른 친구였다. 마침 그날 학계 선배로부터 '일본 프로레슬러 같다'고 놀림을 당하고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 둘을 눈을 크게 뜨고 물끄러미 보시던 선생님이 한 말씀하셨다. "친구랑 함께 온다더니, 난 헤밍웨이가 들어오는 줄 알았어." 댁에서 즐겁게 웃고 나오면서 친구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하루 만에 이렇게 다른 인격을 만났다"며 좋아했다.
아직도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생생한데, 벌써 돌아가신 지 12년. 어설프게 늙어가는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실지. 내 인생의 아름다운 거울이 되어주신 선생님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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