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정치권에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준석 전 대표와 점심을 먹으며 '당분간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 학부를 공학을 했으니 이번에 미국에 가서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는 말이 퍼졌다. 이 전 대표는 이 정치권 원로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고, 이후 결국 대표직에서 쫓겨났다.
이번 국민의힘 3.8 전당대회에서 이 전 대표가 '천아용인'이라 명명한 천하람·허은아·김용태·이기인 등 친이준석계 후보는 전원 예비경선을 통과해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었으나, 당 대표에 도전한 천 후보는 3위 득표(14.98%)에 그쳤고 최고위원 당선자도 나오지 않았다. 득의양양한 친윤계에서는 "이 전 대표의 정치적 행태에 대한 완전한 청산"(김재원 수석최고위원), "정치적 심판을 받았다"(조수진 최고위원) 등의 반응까지 나왔다.
다만 내용적으로 보면 이들의 선거운동에는 눈에 띄는 면이 있었다. 천 후보는 대통령실 하명에 따라 '윤핵관'이 '금지어'가 된 이번 전당대회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지 않겠다"며 처음부터 끝까지 '윤핵관'에 대해 집요한 저격을 했다. 합동연설장에 선 '아용인' 후보들도 나름 공들인 흔적이 드러나는 지역·정책 공약을 꺼내 들며 민주당 비난과 '윤석열 정부 성공'만 되뇐 다른 후보들과는 차별점을 보였다.
그런데 이 바람을 기꺼운 마음으로만 보기는 어려웠다. '천아용인'을 도운 이 전 대표가 선거 승리를 위해 여성과 장애인을 적으로 돌리는 정치를 한 이력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국민의힘 전당대회일인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기도 했다. 이 전 대표가 그간 내놓은 여성에 대한 적대적 내지 차별옹호적 발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85년생 여성이 변호사가 되는 데 있어서 어떤 제도적 불평등과 차별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보충 못하는 건가? 그냥 그게 뭔지 이야기 하고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닌가? 없으면 망상인 거고. (2021. 5. 3. 페이스북)"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보면서 전혀 공감이 안됐다. 해당 책의 작가는 '자신이 걷기 싫어하는 이유가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보행 환경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는데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 아닌가. (2021. 5. 8. <한국경제>)"
"20대 여성들이 정치권에 전달한 담론들은 구체화가 어려운, 추상적인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여자라서 죽었다', 이런 것이다.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만, '여자라서 죽었다'에 대해서 정치권이 대응해서 공약을 만들기는 굉장히 어렵다. (2022. 1. 20. <오마이뉴스>)"
이 전 대표의 행보는 윤석열 대통령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과도 공명한다. 그의 발언 각각에 대한 반론도 할 수 있다. '85년생 여성 변호사' 발언에 대해 한 변호사는 <프레시안>에 "로스쿨 합격 성비가 52 대 48 정도가 됐으니 일부 맞는 말일 수 있다"면서도 "여성이 육아 부담을 많이 진다. 아직도 육아휴직이 어려우니까 경력 단절이 생긴다. 다른 사건은 남성 변호사를 찾는데 가사 사건만 여성 변호사를 찾는다. 이런 일은 말 안 한다"고 비판했다.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이 전 대표의 주장에 대해서는 성폭력 범죄 비중이 큰 강력범죄 피해자의 약 89%가 여성이라는 2021년 경찰청 통계를 반례로 들 수 있다. 강력범죄 중 살인으로 좁히면 남성 피해자가 더 많지만 실제 범죄가 완성된 살인 기수(旣遂)로 범위를 좁히면 남녀 간 성비는 5 대 5에 근접한다. 이는 보통 남성의 저항력이 크기 때문일 수 있다. 강력범죄와 따로 분류되는 폭력범죄에서도 남성 피해자가 많지만 여성 피해자가 많은 가정폭력·데이트폭력의 신고율이 낮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피해의식'? 한국의 직간접 위해 경험률은 1.5%인 데 비해 범죄 피해 불안율이 23%로 높고, 여성의 불안율은 30.8%로 남성 15.5%에 비해 2배 가량 높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범죄 피해 불안과 인구사회학적 요인>, 2018). 하지만 여성의 강력범죄 피해 사건이 9배 가량 많다는 점에 비춰보면 여성의 불안만 '피해의식'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상하다.
'20대 여성 추상적' 발언에서도 비슷한 편견이 드러난다. 'n번방 사건'으로 대두된 아동·청소년 성취물에 대해 여성계에서는 제작·배포자뿐 아니라 소지자도 처벌하는 대안을 냈고 실현됐다. 스토킹에서 비롯된 '노원구 세 모녀 살해 사건' 이후 제정된 스토킹 범죄 처벌법도 여성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이같은 "담론"이 주로 남성들이 제기하는 '무고죄 형량 강화'나 이 대표 스스로 띄운 '여성가족부 폐지'에 비해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선 뒤로는 이 전 대표가 여성 차별을 옹호한 발언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지난 1월 26일 페이스북에 "평화로운 4호선. 나는 이란보다도 이 평화를 해치는 전장연이 제일 거슬린다"며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겠다고 타인의 불편을 수단 삼는 사람들, 얼마나 비문명적인가"라고 전국장애인철폐연대에 대한 적대 발언은 이어갔다.
절박한 처지에 놓인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때로 사람들의 불편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일반론적 지적은 차치하고라도, '타인의 불편을 수단 삼은 사람'은 이 전 대표 자신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작 이 전 대표 본인에게 '이남자 전략'에 대해 물으면 돌아오는 것은 '그런 적 없다', '여러 번 말씀드렸다'는 답변 회피 혹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이 전 대표 재임시 국민의힘 대변인이 여성 기자에게 '펜스룰(pence rule, 남성이 성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여성과만 만나는 자리를 피하는 것)'을 이유로 만남을 거부했는데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넘어간 일도 있었다.
천하람 후보가 용기 있게 지적한, '윤핵관'에 대한 "눈 가리고 아웅"보다도 위험해 보이는 이런 행태가 지속되는 한 이 전 대표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이 전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언제 또 '소수자 적대' 구호를 꺼내 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 대표 선거 출마 후 천 후보가 "여가부 폐지 공약을 충분한 설명과 설득 없이 파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띄운 "천하람 후보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는 응원에 자신은 "성별갈등을 조장하고 무책임하게 비동의간음죄 통과시켜달라고 억지 부리지도 않는다"라고 적반하장격으로 선을 그은 걸 보면 그런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색깔론, 부정선거 음모론 등 보수진영의 낡은 담론에 관한 한 이 전 대표는 합리적 입장을 갖고 있다. '자유'에 대한 그의 언행도 적어도 윤 대통령보다는 일관돼 보인다. 하지만 보수의 금기를 건드리겠다며 '노동조합이 무조건 악인가'라는 질문도 나오고 '박정희역 개칭 시도' 비판도 나온 '천아용인'의 캠페인에 유독 여성과 장애인만 빠져 있는 것은 단지 아쉬움을 넘어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정치 영재'로 불리던 이 전 대표에게 굳이 분과 학문인 정치학 대신 '사회과학'을 공부하라고 한 김종인 전 위원장의 고언을 곱씹어 볼 만 하다. 보수진영 내에서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이 '이준석식(式) 정치' 대신 소수자에 대한 전향적 입장을 고민했으면 한다. 그게 어렵다면 누군가는 이 전 대표와 다른, 합리적 보수 정치를 들고 나오기를 바란다. 숫자로도 사례로도 드러나는, 사람들의 뻔한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더 넓은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보수 정치의 출현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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