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산업화와 그 다음에 성장체제를 만들어온 세대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돌아보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장의 엄청난 그늘에 대해서, 그리고 그 그늘 안에서 살아갈 많은 약자들과 청년들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어요." (윤정숙 60+기후행동 공동대표)
책임에서 비롯된 마음일까. 추운 날씨였지만 초록색 목도리를 두른 60대 나승인 씨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종이 한 장을 나눠주고 있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역에 위치한 포스코타워 앞이다. 19일 12시 점심시간에 맞춰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들에게 나 씨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며 종이를 건넸다. 포스코그룹 계열사인 삼척블루파워가 강원도 삼척에 건설 중인 석탄발전소 건설 중단을 촉구하는 서한이다.
양복을 입고 사원증을 두른 이들은 슥슥 몸을 피해가며 나 씨의 손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오히려 초록색 목도리를 두르고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노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기 바쁘다.
속상할 법도 하지만 나 씨는 "날씨가 추우니까 주머니에서 손을 안 빼는 거지"라며 되려 웃었다. 뽑아온 종이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지만 "두고두고 나눠주면 된다"며 차곡차곡 모아 다시 챙겨갔다.
나 씨는 이날 전라북도 무주에서 올라왔다. 원래 교직에 종사하던 나 씨는 지역 마을교육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다가 퇴직 무렵, 기후위기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를 실감했다. 어느 정도 마을교육 기반을 닦았다고 생각한 그는 노년의 새로운 목표로 '기후운동'을 선택한 채 '60+기후행동'에 가입했다.
기후위기 대응하는 할아버지·할머니...탑골공원에서 포스코타워로 오기까지
작년 1월19일, 탑골공원에서 모인 실버세대가 "기후위기 대응 노인이 함께 하겠습니다" 외친 일은 한국의 그레이 그린(Grey Green) 운동의 상징이 됐다. 60세 이상의 노인들로 구성된 60+ 기후행동은 '노인 보호구역'이라고 불리는 탑골공원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겨내는 동시에 기후위기 시대 노인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 이후 1년 뒤인 2023년 1월19일, 여전히 지구가 불타고 있는 시급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어 '119' 역할을 하겠다는 노인들이 119(1월19일)에 다시 모였다. 이번엔 포스코타워 앞이다. 본인들이 경험했고, 만들어온 '산업문명'의 두 얼굴을 다시 한 번 직시하겠다는 위치 선정이었다.
초록색 목도리와 모자를 쓴 60+기후행동 회원 20여명은 철강 산업으로 산업화를 함께 이끌어온 포스코에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산업화 세대가 '산업역군' 기업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충고였다.
"우리는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이끌고 친환경·저탄소 경제를 구현하기 위한 포스코의 노력을 알고 있다. (그러나) 포스코는 온실가스 위에 쌓아올린 성이며, 지금도 그 성을 높여가고 있다.
포스코의 탄소 중립 노력을 수포로 돌려 기업의 성장에 걸림돌이 될 삼척 석탄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중단하고 대신 진정한 시민기업으로서 지구와 미래, 그리고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탄소중립의 실현에 앞장서 주길 요청한다."
산업화 세대로서 충고를 보낸 회원들은 느린 걸음으로 피켓을 들고 건물 앞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60+기후행동만의 특별한 움직임인 '어슬렁 시위'다. 각을 맞춰 행진하고, 구호를 외치는 보통의 행진과 달리 이들은 손수 적어온 피켓을 들고 건물 앞을 그냥 돌아다닌다.
삼삼오오 짝을 맞춰 돌아다니는 이들은 별다른 구호를 외치지도 않고 그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어슬렁 어슬렁 건물 주변을 돌아다닌다. 가끔씩 신명나는 소리의 꽹가리를 치기도 하지만, 배회하는 걸음은 차분했다.
노인들이 만들어가는 누구보다 젊은 기후운동
"어떻게 보면 제일 '꼰대'스러운 집단인데 그 반대로 운동 방식이 제일 젊고 재밌다고 하시더라구요."
윤정숙 60+기후행동 공동대표가 어슬렁 돌아다니며 말했다. 윤 대표는 "Only one earth(하나뿐인 지구) 너희도 지구도 행복한 세상을!"이라고 파란색,초록색으로 적은 피켓을 들고 있었다.
'젊은 기후운동'이라 말하는 건 본인의 평가가 아니라 주변의 평가라고, 연말과 새해에 소위 말하는 '386' 운동권 출신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그렇게 연락이 왔다고 덧붙였다. 한 활동가는 "2022년 가장 '핫'한 시민운동"으로 60+기후행동을 꼽았다고도 말했다.
윤 대표는 60+기후행동이 얼마나 재밌게 활동하는지, 얼마나 '핫'한지에 대해 웃으며 설명했다. 대표적인 것이 60+기후행동 회원들로 구성된 밴드 '방탄노년단'이다.
단체 창설 이후 전체 모임을 기획했더니 120명의 회원들이 모였다. 처음 회원들을 만나는 자리니까 재밌는걸도 해보자라는 생각에 악기를 다룰 줄 아는 회원들이 밴드를 꾸렸다. '광야에서' 등 3곡을 부르며 밴드는 '대박'이 났고, 회원이었던 한 시인이은 '방탄노년단'(BTN)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윤 대표는 회원들과의 만남을 설명하며 "너무 재밌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누구보다 젋게 활동하는 60+기후행동을 이끄는 대표 중 한 명이 윤정숙 공동대표다. 현재도 녹색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한국에는 없던 새로운 운동방식"이라고 지난 1년 간의 60+기후행동을 평가했다.
지금까지는 없던 노년들의 젊은 기후행동에 60세 이상의 그레이 세대가 반응했다. 활동을 기획했을 때부터 "하루에도 수 십명씩" 가입 문의가 쏟아졌다. 현재는 200명이 넘는 회원이 함께한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2주마다 '줌'(화상회의)을 통해 만났고, 올해에는 지역 지부 설립도 앞두고 있다.
회원들은 1년 동안 '기후현장'을 바쁘게 돌아다니기도 했다. "산호초가 죽어가는 제주 해변, 구상나무가 쓰러져 가는 지리산 정상, 석탄발전소가 들어서는 삼척 해변 등지"에서 60+기후행동 회원들은 어슬렁거렸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불러주셨어요. 안 간 곳이 없어요. 부산도 가고, 충남도 가고 그랬죠. 그리고 청년들이 그렇게 많이 불러줘요. 저번에는 청년기후기후긴급행동과 두산중공업의 재판 현장에도 회원들과 찾아가기도 했죠. 피켓에 뭐라고 적을까 생각하다가 '너희들이 옳다', '고맙다, 사랑한다' 이렇게 적어서 찾아갔죠."
윤 대표는 청년들과의 연결점을 강조했다. "기후위기는 미래세대의 일"만은 아니라며 기후위기 앞에서 '세대갈등'은 없다는 게 60+기후행동의 목표이자 지향점이다. 10대~50대로 구성된 자문위원을 두고 활동을 공유하고, 조언을 받기도 한다. 노년층만의 운동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문제'인 기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일이다.
"늘 세상에서 세대갈등이 어쩌고, 제로섬(Zero-sum) 게임처럼 말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잖아요. 이 새로운 사회를 위해서 (노년과 청년이) 손잡을 수 있고, 손 잡자고 우리가 얘기를 하고 있어요. 기후위기에서 세대 갈등만 얘기하지 말고 세대 연결, 연대, 협력 이런 거 만들고 싶어요."
기후운동의 '뒷배'이자 노인들과의 동행
60+기후행동 회원들은 함께 어떻게 청년들의 '뒷배' 역할을 해주면서 함께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작년 회의에서 '전체 재산의 10%를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상속하자'라는 논의가 나온 이후 올해는 '청년 기후활동가 기본소득'도 구상 중이다. 모두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나온 아이디어들이다.
"기후운동을 하다보니까 기본적인 생활의 안정이라는 게 활동을 지속가능하게 해주는 것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 때와는 다르게 지금 세대는 학생운동하고 감옥갔다 오고 그런 세대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활동가들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기후운동을 하는데 다시 생계 문제에 봉착해서 다니고 싶지 않은 회사로 돌아가야 하고 그런 것들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 세대 운동권 친구 중에 돈 많이 번 친구들도 많거든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자'라고 생각했어요. 이 일은 개인을 위한 일이기도 하면서 사회 전체를 위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유형·무형의 상속을 앞으로 계속해나갈 겁니다."
은퇴하는 동년배들을 위한 교육도 기획 중이다. "성인이 된 이래 30~40년간 자신을 지탱해온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깊이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할 수 있는 교육이다. 이른바 60+인생전환 아카데미다.
윤 대표는 이 교육을 통해 “다른 세대랑 어떠게 손잡을 것인가, 사회적 불평등이나 자기 삶의 방식을 어떻게 전환해볼까” 고민할 수 있는 ‘신바람’ 나는 플랫폼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세대가 다급함, 책임감, 연대감 가져야죠"
인자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 행동과 회의를 계속해나가는 60+기후행동이지만 현재 상황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점은 회원들이 공유하는 의식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이유도 "열정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돌아가는 걸 보니 마음이 너무 급하다"라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 에너지 계획보니까 너무 좌절스럽더라고요. 재생에너지 줄이고, 석탄 유지하고, 원전 올리고 이런 거는 너무 좌절스럽더라고요. 그런 거에 대한 다급함을 느껴요. 세계적으로는 청년들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막 나오고 있잖아요. 그런 것에 비해 지금 우리 기존 세대, 시니어 세대들은 그것에 대한 다급함, 책임감, 연대감 이런게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뭐라도 하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죠."
뭐라도 해야겠는 60+기후행동은 올해도 다급하게, 그러나 재미있는 활동을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적게는 5000원부터 연금을 많이 받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이, 회비를 내면서 시인,언론인,교수,활동가,예술인 출신의 노인들이 기후운동을 해나가고 있다. "우리는 민주화 시대를 돌파해오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었던 저력이 있어요. 올해도 본격적으로 뭔가를 해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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