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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민중항쟁에서 <놀이패 신명>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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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광주 5.18 민중항쟁에서 <놀이패 신명>의 태동

[탈춤과 나] 윤만식의 탈춤 2

광주는 전쟁 중이였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우리는 만화나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상대는 M16 자동소총에 대검까지 착검하고 곤봉까지 휘두르면서 시민들을 몰아세우는데 우리는 겨우 돌맹이나 화염병 밖에 손에 쥐는 게 없었다. 마침내 큰일이 터졌다. 1980년 5월 21일 도청 정문에서 금남로쪽 시민 군중들을 향해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 사태가 발생했다. 그 전에도 간간히 총소리가 나고 사상자가 한 두명씩 발생했지만 이렿게 집단으로 총을 발사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수십명의 시민들이 쓰러졌다. 이에 시민군들도 무기를 들어야 할 기회와 명분과, 우리도 당하고만 있을수 없고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광주 인근의 화순군, 나주군 등의 예비군 무기고를 급습하여 M1, Carlbine소총을 확보한 것이다. 시민군들이 무기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계엄군들에게 전해지자 탱크까지 동원하여 도청을 장악한 공수부대원들이 탱크를 몰고 시 외곽으로 철수해 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6.25 때 사용한 구식 총기에 맞서 최신의 무기를 갖춘 공수부대원들이 도망을 간 사실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광주민중항쟁에서 문화선전대 역할을 수행하고

이에 우리 <광대> 단원들은 도청을 장악한 시민군 홍보부장으로 박효선이, YWCA 소심당(강당)에 투사회보, 대자보 제작팀에 필자와 후배 몇 명, 그리고 <들불> 야학팀, 도청 분수대 궐기대회 진행팀에 필자와 김태종, 김선출, 김윤기, 이현주, 최인선 등이 나누어서 문화선전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당시 광주 국세청 주차장에서 현수막 제작에 필자와 김정희 등이 합류하였다. 필자는 군대에서 챠드사 직책을 수행했기에 글씨를 잘 쓴 탓에 대자보와 현수막을 도맡아서 작업을 하였다. 분수대 궐기대회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서로 분수대 위로 올라가 자기 가족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연을 토로하려하였다. 

우리는 분수대 밑에서 정리하는 작업을 하여 궐기대회가 원만히 진행되도록 혼신의 힘을 쏟았다. 당시 모든 신문과 방송은 시민군들을 폭도로 몰아가는 뉴스만 나오고 국내외 정세에 대한 뉴스는 전무한 상태에서 투사회보와 대자보 내용은 주로 단파방송과 외국어 방송 등을 듣고 그 내용을 철핀과 매직으로 작성하였다. 현수막 내용은 “전두환 찢어죽이자”, “ 계엄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등으로 글자를 페인트로 작성하였다. 특히 분수대 위에서의 궐기대회는 한 판의 정치 마당극을 보는 느낌이였다고 당시 참석했던 지인들의 후일담으로 듣기도 하였다. 당시 분수대 주위의 광장에는 수 백명의 시민들이 열렬히 반응을 하였다. 

그러나 광주 외곽으로 퇴각한 게엄군들이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잔인하게 쳐들어 올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표정은 두려움이나 며칠 전 가족과 친지들을 계엄군의 학살로 잃은 당사자로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광장에 모인 대다수 시민들의 표정은 오히려 더 밝았고 더 의연해 보였다. 광장 옆에 위치한 상무관에서는 수십 개의 관이 놓여 있고, 희생자들의 신원을 확인한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는데도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분위기는 그곳의 상황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광주시민들의 힘으로 계엄군을 물리쳤다는 자신감도, 궐기대회의 열기와 함께 달아오르는 데서 오는 표정이라고만 할 수 도 없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시민들을 광장에 모이게 하였고 그들에게 저 마다의 뜻을 표현하게 만들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도로를 치우는 작업에 몰입했다. 도로마다 널려있는 상흔과 곳곳의 상처를 치우고 메꾸어 가고 있었다. 길거리를 치우는 시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확실한 믿음이 서려 있었다. 수많은 피를 흘리고도 눈물에 얼룩져 있거나 무작정 분노에 휘말리지 않는 묘한 평온의 인상이었다. 여러 개념으로 표현되는 광주 공동체가 도청 앞 광장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광주는 27일 새벽까지 10일 동안은 평온한 공동체의 해방구였다. 5월 27일 새벽 시민군들의 본부인 광주 도청을 진입한 계엄군에 의해 무참하게 쓰러져야 했던 광주의 상황이 더욱 고통스럽고 무겁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도청 시민군 본부와 YWCA에서 작업하던 <광대> 단원들은 거의 대부분 26일 밤과 27일 새벽에 도청과 YWCA를 탈출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필자는 26일 밤 페인트가 너무 많이 옷에 묻어있어 옷도 갈아입고 씻으러 집에 갔다가 도청이 계엄군에 함락되었다는 가두 방송을 듣고 27일 새벽에 도망을 가게 되었고, 후배 집에서 10여 일 동안 숨어있다가 회사에 출근하였다.

ⓒ윤만식

ⓒ윤만식

살아남은 자의 항쟁 기억이 광대 가슴에 억압 기제가 되어있어

이러한 기억은 <광대>를 포함하여 그 이후 민중문화운동과 예술의 창작 과정에서 항상 참담한 의식구조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가슴과 머릿속에는 열흘 동안 광주에서 벌어졌던 각가지 일들로 가득차 있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글과 말로는 한계가 없을 수 없었다. 이미 열흘 동안의 광주는 신군부 세력에 의해 폭도요, 불순분자들의 난동으로 왜곡된 채, 모든 진실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5월 광주’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순분자가 되는 상황이었다. 현장을 경험한 <광대> 단원들은 이렇듯 표현의 한계와 외부로부터의 통제, 두 가지 억압 상황을 체험하였다. 표현의 한계는 또다시 죄책감으로, 외부로부터의 재갈은 어디에도 말할수 없는 공포로 작용했다.

우리들의 경험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말하려 하면 응어리진 가슴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자신의 말이 너무나 무의미해져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단원들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말은 초라한 배신자로 전락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건을 규정하는 타인의 폭력적 언어 앞에서 초라해져 5.18의 경험은 찌그러지고 마는 것이 ‘광대’로서5.18 담론의 현실이였다.

당시 나는 3월부터 모 제약회사 광주사무소에 다니면서 <광대> 활동을 겸하고 있었는데 직장 동료가 5.18 때 내가 시위에 참여한 모습을 목격하고, 8월말경 소장에게 일러 바치는 바람에 권고 사직을 당하였다. 타 회사로 이직하여 직장을 계속하여 다녔는데, 이듬해(1981년) 9월경 보안대에서 수사관 2명이 사무실로 찾아와 조사한 후 별다른 문제가 발각되지 않았는데도 소장에게 압력을 넣어 또다시 사직을 강요 당하여 그해 12월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즈음 광주는 민청학련 선배들은 거의 예비검속 당하고, 항쟁에 참여한 학내운동권 학생들과 졸업한 선배들은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폭도로 몰려 거의 도망 중이고 더러는 수배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광주 시내가 너무 조용하여 꼭 태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느낌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몇 년간 이어졌다.

광주 학살의 미국 책임을 풍자적으로 추궁하는 박지원의 ‘호질’을 마당극으로

그러다가 저랑 광주에 남아있는 <광대> 단원 중 대표였던 김정희가 나서서 전남대, 조선대 탈춤반 후배들이 의기투합하여, 문화의 힘을 발휘하기로 하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연암(燕巖)’ 박지원의 ’호질(虎叱)’을 각색한 마당극 작품이 그것이다. 이 적품은 1981년 5월 9일 금남로의 광주 YMCA 무진관에서 공연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80년 5월까지의 현대 정치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중심 내용은 신제국주의 침탈과정과 이에 대항하는 민중의 투쟁을 코커국(미국)이란 나라의 침략과 만만국(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민중들의 투쟁을 ‘호질’의 전통적 틀을 인용하여 웃음으로, 부정적인 사회현상을 날카롭게 폭로 비판하는 풍자마당극이엇다. 신제국주의의 본질을 뚜렷이 드러내고 부정적인 인물의 본질을 조소와 해학으로 폭로한 우화적 기법이었다.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전두환에게 대한민국 군대 이동을 승인 줘,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했다는 결론으로, 결국 광주항쟁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보여준 공연이었다.

그때의 공연장의 풍경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공연장의 객석을 전투경찰들이 빙 둘러 서서 공연무대 반대편을 보고 서 있고,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나갈 때에는 공연장 밖 인도에 통로를 만들어 일렬로 나가도록 배려(?)를 해주기까지 하였다. 이 공연을 끝으로 YWCA 극회 <광대>는 해체하게 된다.

그렇게 1981년 12월에 접어들어 회사에 사표를 내고 1982년 봄에 다시 <광대>의 정신을 이을 공연단체를 만들자는 후배들과 의기투합하여 3월경에 구청에 신고를 하고 조직한 극단이 현 <놀이패 신명>이다. 창단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봄날 어느 날 서울에서 임진택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광대>의 <돼지풀이> 재공연 요청이었다. 국립극장에서 ’마당극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토론회를 하는데 <돼지풀이> 공연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7월에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토론회에 참석한 관객들을 무대 위로 올라오게 하여 거기서 마당판을 만들어서 공연을 하였다.

ⓒ윤만식

ⓒ윤만식

머슴 출신 의병장 안규홍의 활약을 담은 마당극 ‘안담살이 이야기’로 <놀이패 신명>을 창단하다

그리고 10월에 YWCA <소심당>에서 극단(후에 놀이패로 개정) <신명> 창립공연으로 <안담살이 이야기>를 공연하게 된다. 원래 명칭은 <의병굿>이고 부제는 <동소산 머슴새>였는데 동부경찰서 정보과에 대본심사(당시는 경찰서에서 대본심사는 필수사항)를 하러 기획 보는 후배를 보냈는데 ’의병굿‘이라는 제목만 보고 부결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나서 시높시스를 다시 쓰고 제목을 바꾸고 구두로 ’깔담살이‘(머슴 중에서 계급이 제일 낮은)가 고생 끝에 성공한 이야기라고 거짓말로 둘러치고 승낙을 받아서 제목이 <안담살이 이야기>가 되었다.

작품 내용은 구 한말 전라도 보성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했던 머슴 출신 의병장 ’안규홍‘의 활약상을 외세침탈의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구성한 작품이다.

*윤만식 :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1기, 73학번. <놀이패 신명> 전 대표, 문화학 박사, 사)한국민족극협회 전 이사장, 현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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