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과 나와의 인연은 50년 전인 1972년인 것으로 기억된다.
제대로 입학을 했으면 71학번인 필자가 재수를 하러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의 대성학원과 종로3가의 종로 학원을 다니면서 재수, 3수를 할 때다. 마침 종로2가의 YMCA를 지나갈 때 탈춤 강습회 광고 포스터를 보고 공부는 하기 싫고 탈춤이나 배워 볼까하고 지하 강당으로 갔다. 탈춤 배우러 왔다고 하니 어느대학 다니냐고 묻길래 재수생이라고 하니 대학생만 가르킨다고 하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들어가고 나서 배우러 오라고 하면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얼마나 창피한지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뛰쳐나온 것이 탈춤과 나의 첫 경험이었다. 그리고 73년에 3수 끝에 군대 문제 때문에 일단 대학에 적을 두고 군대를 갔다와서 새로이 진로를 모색해 보기로 하고 전남대에 입학을 하고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35개월 동안 군복무를 마치고 76년 9월에 1학년 2학기에 복학을 하여 대학을 다니던 중 77년 11월쯤 가을에 대학 게시판에 탈춤 강습회 광고 포스터를 보고 강습 장소인 광주 금남로에 있는 YMCA에 가서 탈춤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탈춤 강사로 오신 분이 채희완(부산대명예교수, 현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님과 유인택(전 예술의 전당 사장, 현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김봉준(화가, 신화박물관 관장) 등 서울 <놀이패 한두레> 소속의 탈꾼들이었다. 그리하여 4주 가량 봉산탈춤과 봉산 탈 제작기법을 배우고 이듬해 필자가 3학년 재학 중인 1978년 4월경에 전남대에 ‘민속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 등록을 하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동아리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지도교수 두 분을 모셔야 하는데 교수들이 좀처럼 지도교수를 사양, 거부, 고사를 하기에 겨우 민속학 전공교수 두 분을 설득하여 승락을 받고 등록을 하는 바람에 4월에야 등록을 하게 되었다.
신입생을 모집하고 봉산탈춤을 열심히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6월 말경이었다. 연세대 성내운 교수와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 11분의 교수님들께서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이념으로 전국 학생들에게 외우고 숙지하게끔 강요했던 ‘국민교육헌장’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헌장을 발표하였다. 일명 '우리의 교육지표'인데 이것이 1978년 6월 29일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보도가 되면서 서명한 교수 전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일명 6.29 교육지표 사건) 이에 전남대 운동권 학생 전원이 교수님들의 구속이 부당하다고 데모를 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 민속문화연구회 회장 김선출군과 부회장 김윤기군도 참여하였는데 다행히 구속은 안 당하고 수배를 당하면서 도피를 하게 된다. 이에 복학생인 저와 재수, 3수하여 입학한 후배들과 계속해서 탈춤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어느날 지도교수 두 분이 민속문화연구회 동아리 지도교수직을 사퇴하시고나자, 동아리는 학교측에 의해 강제로 동아리 등록이 취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탈춤을 지도하는 일은 가을까지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그런 와중에 광주에서 또 다른 농성 사건이 발발하였다. 일명 함평 고구마 사건이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하다. 전남지방에서는 물고구마는 해남, 밤고구마는 함평, 무안이라는 풍문으로 전해져왔는데 기실 밤고구마는 함평, 무안지역의 황토흙에서 잘 자라고 특히 밤고구마라 전분 생산이 많이 추출되기 때문에 대한제분에서 전량 수매하기로 약속했다면서 해당 지역 농협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다. 함평, 무안지역 농민들이 너나없이 엄청 고구마를 식재하였는데 수확기가 다가오자 대한제분인가, 농협인가에서 전분 수입을 하면서 결국 전량 수매하기로 약속했던 농협에서 거짓말을 한꼴이 되었다.
이에 항의하려 함평 카토릭농민회 회원들 수백명이 광주에 올라와 광주 북동 성당과 계림 성당에서 농성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전대 탈춤반과 연극반들이 고구마 부대(포장지)를 뒤집어쓰고 마당극을 함으로써 농성하는 농부들에게 격려와 함께 용기를 북돋아 주어 결국 농협에서 전량 수매하기로 약속을 하여 농성이 성공하는 것으로 기록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 결과물로 다음 해에 YMCA극회 <광대>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겨울방학 때 지역탈춤 전수소에 탈춤을 배우러 가려고 하는데 동아리 등록이 취소되어 탈춤전수소를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침 조선대 탈춤반이 학교에 등록을 해논 상태에서 조대 탈춤반 명의로 고성오광대로 전수를 가게 되었다. 전수 중에, 후에 윤상원 열사와 영혼 결혼식을 올린 박기순 열사가 연탄가스로 운명을 달리 했다는 비보를 듣고 그날 저녁 엄청 술을 마시고 한없이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남아있다. 박기순 열사를 잠깐 소개하자면,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중 시위에 관련하여 제적 처분을 당하고 광주의 공업단지인 광천동 모 제조업에 최초로 위장 취업하여 광천동의 천주교 성당에서 ‘들불야학’을 윤상원 열사와 함께 강학으로 활동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전수를 무사히 마치고 이듬해인 1979년에 필자가 4학년 졸업반인데 새로운 지도교수 두 분을 모시고 ‘향토문화연구회’란 이름으로 대학 본부에 등록을 하고 신입생을 뽑고 탈춤을 가르치면서 동아리 활동을 다시 하게 되었다. 6월에 전남대학교 용봉축제 때에는 학생회 초청으로 봉산탈춤 2과장 8먹중 춤을 추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대에는 치대, 약대, 간호대, 인문대 학생들로 탈반을 조직하여 봉산탈춤을 가르치는 작업을 병행하게 된다. 그 해 여름 방학 때는 양주별산대놀이를 전수받으러 남양주까지 가서 배우는 도중 도피 생활을 하던 회장과 부회장이 막걸리를 통으로 몇 말 사가지고 와서 신나게 마신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79년 2학기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 긴급조치 9호까지 발표하면서 점점 더 학생들의 탄압이 거세졌다. 9월경에 사회조사반 후배들의 전남대학교 본부 건물에 있는 상담지도관실(국정원과 경찰 정보원이 상주하면서 학생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곳)방화사건이 미수에 그치고 그 여파로 전남대 운동권 전원이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전 발각되어 2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대 운동권 전원이 서부서에 연행되어 거의 한 달 가까이 구치소에 불법 수감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간수들에게서 얻은 정보로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부마항쟁), 며칠이 지나니 박정희가 사망, 서거 등 확실하지 않은 정보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보과 형사들이 들여 넣어준 신문에서 확인하니 김재규가 쏜 총탄에 박정희가 맞아 서거했다고 대문짝만하게 정치면 1면에 실려있었다. 박정희가 죽은 후 경찰서의 분위기가 전면 바뀌어 결국 주모자급인 사회 선배 윤한봉(5.18이후 미국 망명)은 이미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검찰로 송치되고 재학생들은 거의 3일에서 30일까지 각각 구류를 살고 나오게 되었다. 윤한봉 선배도 몇 달 살다 출옥하였다.
그리고 79년 12월경 사회문화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학내 문화패들이 재학생 포함, 졸업생 위주로 광주 YMCA 극회 <광대>를 신고하고 활동하게 된다. 단원으로는 전남대 탈춤반, 연극반, 국악반, 조선대 탈춤반으로 구성되었고 뒤에서 후원한 인물로는 황석영 선배 그리고 윤한봉 선배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현대문화연구소(소장 정용화)가 기획업무를 주로 맡아서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창립공연으로 농촌 사회극 ‘돼지풀이’를 광주 YMCA 무진관에서 공연하게 된다. 이 공연도 함평 고구마처럼 정부에서 국민들의 단백질 섭취를 취하도록 농민들에게 사육을 권장을 하여 집집마다, 혹은 집단으로 엄청난 돼지사육 두수가 늘어났는데 갑자기 외국에서 돼지 고기를 수입을 해버린 탓에 국산 돼지가 남아 돌아가 가격이 폭락하여 농민들이 엄청나게 피해를 본 사건을 마당극화한 작품이다.
이 공연 연출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황석영 소설가, 채희완 교수, 임진택 형님이었고 공연 전 식전행사에는 김민기, 김영동, 양희은 등이 참석하였다. 18년 동안 장기독재정권의 원흉인 박정희가 죽은 후의 한풀이 식의 공연이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마당극 역사에서 ‘돼지풀이’만큼 대본, 연출, 배우들 연기가 잘 된 공연은 없다고 할 정도로 짜임새 있는 공연이었다. 이 공연의 기획은 현대문화연구소에서 맡았는데 광주공연의 성공에 힘을 얻어 순회공연을 하였다. 첫 번째가 광주 카톨릭에서 운영한 광주 카톨릭피정센터에서 카톨릭 농민(카농)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그리고 전남 무안의 당시 노금노 카농 회장 댁 마당에서 한 공연, 다음으로는 기독교 농민(기농)들을 대상으로 한 전남 강진공연 등을 수행했다. 이러한 현장공연의 성과는 농민회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극단 광대>의 첫 공연이 성공리에 마무리가 된 후 당시 광주에서 살고 계신 황석영 선배가 본격적으로 문화운동으로써 공연을 활성화하자는 취지로 동구 장동의 모 병원 건물 지하에 소극장 용도로 계약을 하였다. 명칭을 ‘동리 소극장’으로 잠정적으로 부여하고 본인의 소설 ‘한씨 년대기’를 공연하기로 잡고 있었다. 이 작품은 남북 분단 문제를 다룬 중편 소설로서 무대극으로 각색하여 소극장용으로 공연하기로 하였다. 당시 극장 조명, 음향시설은 서울의 심재찬씨가 내려와서 작업중이었다. 우리 단원들은 5월 초부터 매일 시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오후에는 다시 모여 들어 광주 YMCA 2층 양서협동조합 옆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리딩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5월 중순경 어느날 오후 연습실 건너편 2,3층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무등학원에 공수부대원들이 M16 소충에 착검을 하고 학원에 진입하였다. 수업 중인 젊은 학원생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나와 무참히 곤봉으로 내려찍고 발로 차면서 해산을 시키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고 화가 나서 연습을 중단하고서는 시위에 전원 참여하기로 결의하고 그날부터 <극단 광대>는 5.18광주민중항쟁에 적극 뛰어들게 된다.
*윤만식 :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1기,73학번. <극단 광대> 전 대표, 문화학 박사, 사)한국민족극협회 전 이사장, 현 상임고문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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