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동운동, 조합원의 이익만이 최우선인가?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금융노조는 은행을 제외한 보험사, 증권사 등으로 구성된 산업별 노동조합이다. 산하에 있는 사업장에는 퇴직연금 운용관리사업자도 많고, 퇴직연금부서에서 일하는 조합원들도 상당히 많다. 수수료도 많아서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제법 쏠쏠한 수익원이다. 수익이 많아져야 노사간 임금교섭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에 퇴직연금제도에 대해 산별노조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산하 지부와 조합원들은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퇴직연금제도는 금융기관에만 좋은 시스템이다.
퇴직연금 운용관리사업자로 지정된 47개의 금융기관이 노동자들이 맡겨놓은 돈을 경쟁하듯 유치전을 펼치며 영업하고 있다. 2021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총 295조6000억 원이다. 이중 DB형(확정급여형)이 171조5000억 원(58.0%), DC형(확정기여형)이 77조6000억 원(26.2%), IRP(개인형퇴직연금)가 46조5000억 원(15.7%)이다.
현재의 퇴직연금제도가 금융기관에만 좋은 이유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상 기업과 금융기관이 퇴직연금 업무에 관한 계약을 맺고 연금자산을 운용·관리하는 계약형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직연금이 도입된 사업장은 무조건 DB형(확정급여형)과 DC형(확정기여형)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개인형퇴직연금제도(IRP)도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퇴직연금은 관리 형태에 따라 계약형, 기금형, 재단형 등 운영방식이 다양하다. 계약형 이외에 기금형 퇴직연금을 추가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히는 정도이다.
현재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이 정한 계약형에 국한하지 않고,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법적 제약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미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퇴직연금기금을 설립하고 국민연금처럼 일임형 관리 및 투자가 가능해진다. 아직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금융기관만이 퇴직연금 운용관리사업자로 선택받을 수 있는데, 선택지를 넓히면 자신들의 파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제도(중소퇴직기금)가 현재 법에서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기금형 퇴직연금제도이다. 중소퇴직기금은 상시 30명 이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용자 및 노동자가 납입한 부담금 등으로 공동의 기금을 조성·운영하여 근로자에게 퇴직급여를 지급하는 퇴직급여 제도이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이 중소퇴직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만약, 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중소퇴직기금처럼 현재 가입하고 있는 모든 계약형 퇴직연금을 단 하나의 기금형 퇴직연금으로 전환한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까? 물론 산업(업종)별 혹은 기업별로도 기금을 만들 수 있지만 단 하나의 기금으로 전체 노동자의 퇴직연금을 모은다면... 금융기관들은 막대한 수수료를 잃게 되겠지만 노동자들은 무려 300조 원가량의 퇴직연금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구상을 가칭) ‘퇴직연금 대전환 프로젝트’라고 명명하고, 노동운동에 다가올 변화를 상상해보자.
2. 우리에게는 이미 300조가 있다. 남의 수중에 넘어간 것을 되찾아 올 때
현재의 노동운동 진영은 퇴직연금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 임단투를 통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에 머물러,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사무금융노조 역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이익보다 공공의 목적으로 금융을 재편하는 일, 47개 금융기관으로 분산된 돈이 단 하나로 모이는 과정 자체가 전체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되찾는 일이라 생각한다. 비전을 설계하고,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운동으로 조직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가슴 뛰는 일이다. 사적연금의 한 축인 퇴직연금을 공공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개편하는 상상을 조금 더 해보자.
우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만나서 '퇴직연금 대전환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하자고 동의해야 한다. 양대 노총의 대의원대회에서 각각 결의하고, 법 개정안 통과를 요구하는 투쟁도 함께 해야 한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된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이를 운용할 수 있는 별도의 조직(기금)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중소퇴직기금을 운영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처럼 국가로부터 퇴직연금 관리사업자로 지정도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무금융노조는 일자리를 상실할 증권사와 보험사 퇴직연금부서의 조합원들을 기금으로 합류시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은행이 가장 큰 퇴직연금관리사업자이기 때문에 한국노총 산하 금융노조의 조합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더해 300조 원을 운영하기에 걸맞은 전문가집단이 필요하다. 공공운수노조 국민연금관리공단지부 조합원들을 비롯한 기금운용에 특화된 전문가들이 대거 인입되어야 한다.
차라리 국민연금 내에 별도의 퇴직연금 계정을 두고 기금운용을 할 수도 있으나, 국민연금의 기금운용 모델과 조직체계를 참고해서 설계하면 된다. 설립될 퇴직연금기금의 운영방식과 조직체계를 검토하고, 네이밍을 '퇴직연금관리공단'이라고 부르던 어떻게 부르던 나중에 결정할 문제이다.
'퇴직연금 대전환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홍보포인트는 현재의 퇴직연금 수익률과 수수료보다 월등해야 한다는 점이다. 1~2%에 불과한 퇴직연금 수익률을 국민연금 수준으로만 높여도 대전환의 메리트가 커지기 때문이다. 2021년 말 기준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10.77%에 달한다. 3년 연속 10%대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아울러, 한번 계약하면 퇴직하기 전까지 금융기관에 많은 수수료를 납부해야 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규모의 경제를 토대로 아주 저렴한 수수료로 퇴직연금을 적립할 수 있다고 홍보할 수 있다.
기금 운용 원칙도 노동자기금답게 정의로워야 한다. 허울뿐인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보다 더 강력한 공공성의 원칙에 입각해 기관투자가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기금으로 노동자를 탄압하는 기업에는 자금을 빼고,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도 제어할 수 있다. 아울러, 퇴직하는 조합원들을 묶는 틀로도 조직할 수 있다. 현재의 조합원들의 미래를 설계하고, 퇴직조합원들의 멤버쉽을 유지시키는 장치로 퇴직연금이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3. 퇴직연금의 차별을 없앨 때, '퇴직연금 대전환 프로젝트'는 완성된다
현재 퇴직연금 가입자가 낮은 이유는 '근로기준법'에 의해 고용주가 1년 이상 근속하는 노동자에게만 퇴직금 혹은 퇴직연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단시간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들은 현재의 고용도 불안정하고 미래의 노후도 준비할 수 없도록 제도가 설계되어 있다.
기금 설립 이후 두 번째 법 개정 운동은 퇴직연금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노동자들을 모두 퇴직연금기금 가입자로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1년 이상 근속해도 노동자들이 퇴직금을 못받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데, 퇴직금과 퇴직연금기금 중에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퇴직연금기금을 강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퇴직연금기금은 외부유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퇴직금을 떼일 염려가 없다.
아울러, 1년 이상 근속한 노동자들도 은퇴할 때 연금이 아닌 대체로 일시금으로 수령하고 있는데 퇴직연금 계좌기준으로 무려 95% 이상이 연금이 아닌 일시금 형태이다. 사실상 현재의 퇴직연금은 퇴직금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일시금 수령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려워서 그렇겠지만 노후에 쓸 양식을 한 번에 다 털어 먹어서는 안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20년 퇴금연금에서 중도인출한 인원은 6만9139명으로, 금액은 2조6000억 원에 이른다. 중도인출 연령대 중 눈에 띄는 것은 은퇴가 임박한 5060세대가 1만3496명으로 적지 않다.
퇴직연금 가입에 있어 차별을 없애야 한다. 이를 위해 퇴직연금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모든 노동자가 퇴직금이 아닌 퇴직연금에 가입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물론, 영세한 자본의 부담이 클 수 있기 때문에 한번에 강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계별로 시기를 나누어서 퇴직연금에 가입하도록 하면 된다. 또한, 퇴직연금 수급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으로만 받도록 해서 노후소득을 보장하게 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매년마다 약 35조 원 정도를 퇴직연금 보험료로 납부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보험료 수입 48조 원의 70%가 넘는 큰 규모다. 퇴직연금에는 국민연금과 달리 보험료부과 소득상한이 없다. 국민연금은 9% 보험료가 부과되는 반면, 퇴직연금은 8.33%의 보험료가 부과된다. 국민연금 직장가입자는 사업주 4.5%, 노동자 4.5%를 분담한다. 노동자들이 국민연금보다 퇴직연금에 더 많은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다.
퇴직연금제도는 지난 2005년 은퇴 노동자의 생활보장을 목적으로 도입됐다. 2021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전년 대비 40조1000억 원 증가해 295조6000억 원에 달할 정도로 막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운용비용과 낮은 수익률로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퇴직연금이 실질적 국민 노후생활 보장재원이 되기 위해서는 더욱 근본적이고 실효성 있는 개혁방안이 필요하다. 이제 총노동이 나서서 퇴직연금을 공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상상만으로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사무금융노조에서 일하면서 조합원들의 우려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음을 안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새로운 활력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며 '퇴직연금 대전환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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