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공적연금, 그저 무겁기만 한 회색코끼리
오는 2023년은 제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이 실시되는 해다. 5년 주기로 한국 사회는 연금개혁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들이 펼쳐진다. 이미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금개혁 이슈들이 쏟아지고 있다. 연금개혁 이슈들이 연일 포털 메인을 차지하고 있으며, 댓글 수 역시 상당하다.
연금개혁은 힘든 일이며, 한국에서만 유독 난항을 겪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연금학자 칼 힌리히스는 연금개혁을 '회색 코끼리(grey elephant)' 옮기기에 비유한다. 회색에, 덩치 큰 코끼리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다. 공적연금도 이와 같아서 일단 제도가 만들어지면 이후에는 매우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한국의 공적연금도 회색 코끼리라고 할 수 있을까? 서구와의 차이는 생각보다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기금고갈로 인해 미래에 약속된 급여를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다. 2018년 제4차 재정계산 이후, 정부의 지급보증 명문화 요구가 거세진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두 차례 연금개혁을 통해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평균소득자가 40년 가입 시 70%를 보장하던 것에서 40%로 크게 낮아졌다. 쉽게 움직이기 어려운 코끼리라기에는 강도 높은 개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서구에서도 일부 남유럽 국가들을 제외하면 이렇게 큰 폭으로 급여삭감을 단행한 국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의 공적연금, 특히 국민연금은 재정적 지속가능성도, 적정성도 둘 다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이 둘의 관계는?
2007년 국민연금 개혁의 결과로, 국민연금 사각지대와 급여 감소분을 보완하기 위한 한시적 제도로 기초노령연금이 도입되었다. 이후 명칭이 바뀌며 2014년 7월, 20만원으로 인상된 기초연금은 이제 40만원으로의 인상을 논의하는 중이다. 복지정치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공적연금의 급여삭감은 정치인들이 피하고 싶은 이슈 중 하나다. 반면, 현금성 급여의 도입과 인상은 신뢰획득(credit claiming) 차원에서 선거 또는 정당정치의 포퓰리즘 수단으로 활용되기 쉽다.
그런데 기초연금은 여전히 그 역할이 매우 모호하다. 도입 초기부터 이것이 공공부조인지, 보편적으로 확대될 제도인지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거주 기반으로 제공되는 시민권적 기초연금도 아닌, 소득비례연금의 부족분을 메우는 방식의 최저연금(minimum pension)도 아니다. '소득·재산 하위 70%'라는 누구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기준으로 대상자를 선정한다. 또한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재분배 기능 중복은 제도 간 부정합성 문제로 이어진다. 국민연금 급여를 결정하는 산식에는 가입자 간 소득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는 A값과 소득비례 기능의 B값이 존재한다. 서구 국가들의 공적연금도 이러한 모습인가? 오랜 공적연금의 역사를 가진 국가들은 노후소득보장체계를 구성하는 제도들의 기초보장과 소득비례기능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향후 장기적 관점에서 공무원연금과의 제도 통합까지 바라본다면, 재분배 기능 중복은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이다. 아울러 A값이 당초 목표로 했던 소득재분배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이 함께 논의되어야
이뿐만이 아니다.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의 형평성, 즉 민·관의 노후소득 격차 문제가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2000년 공무원연금법 개정으로 도입된 정부보전금은 2001년 599억 원이던 것에서 2022년에는 1.4조 원이 정부 일반회계에서 지출될 예정이다. 군인연금의 경우, 이보다 더 큰 규모인 1.7조 원이 정부보전금으로 투입될 예정이다. 세 차례 연금개혁을 거치며 공무원연금의 수익비가 국민연금과 어느 정도 비슷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급여지출 부족분에 투입되는 정부예산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국민연금 가입자와의 형평성 문제를 발생시킨다. 지난 2015년에도 공무원연금개혁 논의 당시 국민연금 적정성 강화가 이야기된 바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공무원연금에 국한된 점진적 모수 조정에 그쳤다. 이번 연금개혁은 공무원연금을 비롯한 특수직역연금까지 비록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큰 틀에서 포괄하는 종합적 논의가 필요하다.
계속 표류 중인 퇴직연금의 방향
퇴직연금이 4년 전 연금개혁 논의에서 제외된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퇴직연금은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수수료 이익만 남기는 금융상품의 하나로 여겨져 왔으며, 주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임금근로자에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2020년 기준, 퇴직연금 가입자 수는 약 664.8만 명이다. 3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률이 90.8%에 달하는 것에 반해, 10인 미만 사업장의 도입률은 17.8%에 그친다. 매월 8.33%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보험료로 납부하고 있으나, 전세자금, 주택구입 용도를 목적으로, 연금이 아닌 일시금(lump-sum)을 선택하는 비율이 95%를 상회한다. 정부는 2014년 8월 '사적연금 활성화 방안', 2019년 기획재정부 발표 등 여러 차례 퇴직연금 가입 의무화 계획을 제시하였으나, 실제 이행에 관한 사항은 구체적이지 않다. 2021년 3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개정하여 올해 4월부터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제도를 실시할 예정이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퇴직연금은 정말 고소득 상용근로자들에만 제한되어야 하는 사적연금일까? 서구 국가들은 오랜 고민 끝에 디폴트옵션, 자동등록장치(Auto Enrollment)와 같이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가입촉진 및 유지를 위한 장치들이 도입되어 소정의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다층노후소득보장체계에서 마땅히 하나의 층을 구성해야 하는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의 관계 정립, 특히 노후소득의 적정성 확보를 위한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퇴직연금 지급의 연금화는 물론이거니와, 장기적으로는 공적 목적을 부여하고 건전하게 규제할 수 있는 장치까지도 함께 검토해야만 한다.
연금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과정의 중요성
연금개혁은 개혁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과정 역시 중요하다. 정치인, 노조, 사용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이해관계자 및 전문가들의 풍부한 논의는 물론이거니와, 공청회 등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미흡한 연금개혁은 개혁 결과의 정당성을 갖지 못하고, 제도 불신, 나아가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는 개혁의 성공 여부를 떠나, 경사노위 연금개혁특위, 공무원연금개혁을 위한 국민대타협기구 등 지금까지 공적연금 개혁에서 단일안 도출을 목적으로 한 사회적 합의체들이 여럿 존재하였다. 위원회 구성, 개혁안 도출 방식, 합의체 운영의 투명성 등 사회적 합의체 구성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4년 전 연금개혁 논의는 위원회 내에서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에 관한 입장 차이만을 확인하며, 이렇다 할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윤석열 당선인은 대선후보 당시 대통령 직속 연금개혁위원회 설치를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그만큼 새 정부에서는 연금개혁을 반드시 성사시키겠다는 입장이 어느 정도 표명된 것이겠지만, 인수위 단계에서는 그 내용과 절차가 훨씬 더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새 정부에 바라는 연금개혁
일각에서는 보수정당의 집권으로 이번 연금개혁이 지나치게 재정안정화에 방점을 두고 진행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일부 언론에서도 연일 당장 연금개혁을 실시하지 않으면 마치 후세대가 징벌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재정부담을 떠안을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한 편에서는 미래 생산성 저하가 심각하게 우려할 일이 아니며, 장기 재정목표를 기준으로 공적연금의 지속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공적연금의 재정안정화는 현 세대와 미래 세대 모두에게 안정적으로 노후소득을 지급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 과거 연금개혁에서처럼 급격하게 급여를 삭감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4년 전 연금개혁을 둘러싼 논의들은 다수의 국민에게 실망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새 정부가 집권과 동시에 가장 먼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인 연금개혁은 목표 설정, 그리고 어떻게 논의해 나가느냐에 따라 험난한 가시밭길일 수도, 조금 돌아가지만 평탄한 길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제는 연금개혁의 모범사례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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