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전이지만 고 노회찬 의원의 그때 그 연설은 여전히 마음을 울린다. 2012년 7월 진보정의당 당대표직 수락연설에서 그는 '투명인간'들을 불러냈다. 새벽 4~5시 6411 버스는 서울 강남으로 일하러 가는 청소노동자들로 만원이다.
올해 노회찬재단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협력 운영한 '6411 사회극장'은 6차례 판을 펼쳐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투명인간' 취급 받는 이들을 불러들였다. 2030 여성, 요양보호사, 신림동 고시촌 중년 남성들, 학교 돌봄전담사….
이들은 이 무대에서 즉흥극을 만들며 마음에 고여 있던 생각들을 쏟아냈다. 사회극장엔 틀이 없다. 정해진 결론도 없다. 내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처지가 되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과정 자체가 핵심이다. 요양보호사들과 함께 사회극장에 참여했던 정신향 씨는 "자기 이야기를 마음 놓고 이야기해도 안전하고 누군가 들어줘 만족도가 높았다"며 "참여자들끼리 굉장히 친해졌다"고 말했다.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는 '사회극장'을 진행해온 소셜디자이너 '두잉'의 최대헌 이사(드라마심리상담연구소)를 지난 13일 만나 한국에서 사회극장의 쓸모에 대해 들어봤다.
김소민 : 사회극장은 생소한 개념인데.
최대헌 : 사회극장의 전제는 개인의 문제는 사회 문제가 되고 사회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된다. 즉 개인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는 상호적 관계입니다. 다양한 사회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만들기도 하죠. 사회극은 개인의 문제를 이슈화시켜 관심을 가지도록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어 홈리스 문제를 다룬다고 해봅시다. 사회의 구성원인 나는 그 삶에 관심을 안 가져도 되냐는 질문에 부닥치게 됩니다.
그냥 아는 것과 제대로 아는 건 다릅니다. 제대로 알려면 타인의 입장 속에 들어가 자꾸 알려고 노력해야 해요.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높은 발달 수준인 공감이 자라납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려면 공감이 되어야 하니까요. '학교 돌봄선생님들은 왜 아이들을 안 가르칠까' 학부모들은 그런 불만이 있는데 돌봄선생님들 사회극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회극을 시작한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모레네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만나야 한다. 어떻게 만나느냐. 나의 눈을 너의 눈에 넣고, 너의 눈을 나의 눈에 넣고, 너의 눈으로 내가 너를 볼 때, 나의 눈으로 네가 나를 볼 때 우리가 만난다." 사회극 속 역할 경험으로 인식 개선, 인식 확산 또는 구체적인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습니다.
김소민 : 즉흥극을 하는 까닭은?
최대헌 : 말과 글은 표현에 한계가 있죠. 실제를 다 드러낼 수 없어요. 어떤 집단은 어휘력이 낮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사회극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언어 표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요. 또 의식적으로 내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느껴보려고 하는 공감적 노력을 하게 되죠. 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들려주며 나를 객관화할 수 있어요. 또 내 역할을 타인이 할 때 거울을 보듯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요.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한 주제에 많은 사람들이 연결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경험을 입체적으로 하는 거죠.
김소민 : 사회극장에서는 참여자들에게 가상의 인물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최대헌 : 자기 이야기만 하라고 하면 거기에서 그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에도 자기 이야기가 묻어납니다. 사람은 자기 경험 속에서 이야기하니까요. 타인을 이야기하려면 의도적으로 타인의 경험을 알려고 노력해야 해요. 타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경험 세계가 확장돼요. 요양보호사로서 '나'의 경험과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보호사의 경험이 겹쳐지는 거죠. 또 안전함의 문제도 있죠.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으려면 수치감이 드는데 사회극에선 익명성이 유지되니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사이코드라마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다뤄요. 이에 비해 사회극은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주제를 다루죠.
사회극장에서는 참여자들이 그 주제와 관련한 여러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요양보호사 현실에 대한 사회극에는 보호자, 보건복지부, 각 구청, 건강보험공단, 센터 관계자들의 역할도 등장했다.
최대헌 : 자기 입장만 이야기하면 자칫 한풀이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다 연관된 사람들이고 각자의 입장이 있죠. 그 입장을 알고 주장하는 것과 무조건 내 주장을 하는 것은 다르죠. 타인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고, 관계를 맺을 때 어떻게 해야 하며 내 주장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거죠. 창원 노동자들과 산재 문제를 사회극으로 다뤘을 때, 참여자들이 노조의 임원으로서 산재피해자를 본 것과 산재를 당한 당사자로 이야기할 때 간격이 크다는 인식을 했다고 하더군요. 조합이 산재를 당한 조합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고민이 깊어졌다고 해요.
김소민 : 지난 3월부터 10월까지 '6411 사회극장'을 하며 느낀 점은?
최대헌 : 참여자들이 당사자성은 있지만 대표성이 없는 분들이다 보니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6411 사회극장'은 이야기를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기에 좋은 자리였던 거 같아요. '내가 오늘 이야기 할 수 있어 뿌듯했다', '우리도 뭉치면 뭔가를 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런 피드백이 있었어요. 요양보호사들은 우리 사회의 필수 인력인데 그림자 취급을 받아요. 뭔가 한국사회가 잘못 가고 있다는 건 분명하죠. 이 분들이 다 연령대가 높은데 사회극을 하면서 연대의식을 가지고 뭔가 하려고 하는 걸 보며 뭉클했어요.
김소민 : 교육방송 <달라졌어요>에서 갈등을 겪는 부부들을 대상으로 사이코드라마를 진행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교육방송 라디오 <행복한 교육세상>에 출연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이코드라마 전문가인데 사회극장을 하게 된 이유는?
최대헌 : 사회복지를 하다 보니 빈곤계층을 많이 만나게 돼요. 건강하다는 건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영적인 건강성을 이야기하죠. 심리적인 건강성이 낮은데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워요. 개인의 멘탈에는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1990년, 제가 전국에서 집단 상담을 했어요. 구청, 동사무소에서 사이코드라마를 했죠. 개인을 보다보니 구조적인 문제가 보여요. 아무리 노력해도 건강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구조가 변해야 해요.
사회극장은 사이코드라마를 수련하며 접하게 됐어요. 사회극장을 한 지는 20년 되었네요. 노사갈등,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정부기관 간 갈등 등을 다뤘어요. 4년 전에 동국대에서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했는데 노노갈등이 벌어졌어요. 사회극장으로 우리가 어떤 점을 힘들어 하는지, 파업을 유지하려면 조직과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제 해결까지 나아갔어요. 사람들은 상대에 대해 조금씩은 알고 있어요. 내 입장이 크니까 이야기를 안 할 뿐이죠. 그 역할을 해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져요. 지난해엔 집값 등 주제로 온라인으로 사회극을 했어요.
김소민 : 한국에 사회극장이 필요한 이유는?
최대헌 : 한국은 사색보다 검색이 많은 사회죠. 주로 빅마우스들이 여론을 형성하는 편이에요. 진영으로 나눠져서 일단 결론을 내놓고 다투기 시작하죠. 그러다보니 주장만 있어요. 숙의나 숙고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빅마우스가 이야기하면 따라가는 경향이 있어요. 이와 달리 사회극장은 사색의 과정이에요.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하는 과정입니다. 앞으로 지역사회 갈등을 '사회극'으로 다뤄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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