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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이 차별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⑨ 박명애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차별금지법(평등법)은 여성만을 위한 법도,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도, 장애인만을 위한 법도, 인종적 차별을 겪는 자들만을 위한 법도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법이다. 사회 각계 각층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이 참여한 '평등의 에코-100(echo-100)' 캠페인의 취지가 그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부터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죽음, 밥벌이 때문에 견디는 직장갑질, 저 멀리 북극곰의 문제, 미친 부동산 가격 문제 등등. 이것들은 이제 평등에 관한 문제와 연결돼 있다.

<프레시안>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100명의 선언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자가 고민한 차별에 대해 물었다. <프레시안>은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시민들을 릴레이로 인터뷰 해 싣는다.편집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① "조주빈 처벌하면 만사 끝?…성차별 끊어내는 게 폭력 근절의 전제" (☞바로가기)

② "죽음 마저도 차별당하는 사람들…장례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바로가기)

③ "'저렴한 목숨'은 죽어도 되나…산재와 차별은 같은 뿌리" (☞바로가기)

④ 기후위기 최대 피해자들에 "학교는 어쩌고 왔니"라 묻기 전에 (☞바로가기)

⑤ "대한민국의 부동산 경제, 청년들 등에 빨대를 꽂고 있다" (☞바로가기)

⑥ "'지잡대 나오니 그렇지'?...직장 모욕과 갑질은 차별의 다른 이름" (☞바로가기)

⑦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사업'이 아직도...'매매혼'이 차별을 생산한다" (☞바로가기)

⑧ "동물 차별, 사람 차별과 정말 상관 없을까요?" (☞바로가기)

▲박명애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연합뉴스

차별이 심할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장애인은 그런 존재다. 출퇴근 길, '기본교육 과정'이라는 학교도. 박명애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47세 장애인 야학에 가기 전까지 집에만 있는 게 당연하고 학교에 못가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고 했다. 못하고 못가는 게 너무 당연해서 차별인 줄도 몰랐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투쟁의 현장에서 앞자리에 나서 싸우는 박 대표.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이 한이 찬다"며 "살아서 세상을 바꿔놓을 거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안 살게 해야겠다"고 말한다.

박 대표는 "이 세상에는 '장애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벽이 쳐져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장애인만 그런 게 아니고, 옛날에 양반 상놈 갈라놓은 것처럼 그대로 그렇게만 살게 한다. 비정규직이면 돈 적게 받아야 하고 위험한 일 해야하고, 그렇게 살게 만들어 놨다. 힘든 사람은 암말 못하고 힘들게만 살게."

프레시안 :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박명애 :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장애인은 장차법이 있다지만 비장애인으로서 차별을 받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장차법이 2008년 시행됐는데, 아직 그 법이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 한해 두해 가면서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차별금지법도 생기면 서로가 조심할 것이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리고 장차법만으로 미흡한 부분도 있다. 차별이 한가지 이유만으로 한 번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알게 모르게 겪는 차별들이 있다. 차별인 줄도 모르고 산다. 학교 가기가 힘들어서 못 다니고 또 비정규직으로만 고용해서 그렇게 다니다가 해고당하면 비정규직 차별이 된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대표로 있는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이돈명 인권상을 탔다. 지난해 대구 지역에 코로나19가 확산됐을 때 큰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박명애 : 그때 대구는 완전 난리였다. 갇힌 섬에 있는 것 같았다. 대구 시내가 텅 비고 유령도시 같았다. 혼자있고 완전히 고립돼서 막연한 두려움만 커져가고 있었다. 그럴 때 전국에서 대구가 힘들다고 마스크나 소독약, 이런 걸 많이 보내주셨다.

코로나 사태 처음에 장애인들은 마스크 그런 것도 사기 되게 힘들었다. 길에 줄 서도 못살 때인데 나는 나가지도 못했다. 그때도 상근자들이 조를 짜서 집집마다 마스크와 소독용품을 배달했다. 혼자 너무 두려웠는데 그런 손길들이 옆에 있어 참 고마웠다.

장차연 상근자 국장 비롯해서 전체 직원들, 회원들이 일요일도 없이 너무 고생 많았다. 상근자가 서른 몇 명 된다. 다른 일은 다 손놓고 여기에 매달렸다. 한 명이 천몇백 가구를 돌았다고 했다.

프레시안 : 나가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했을 것 같다.

박명애 :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일하고 있는데, 나가서 힘을 보태야 하는데. 일 많이 돕지도 못하면서 돕는다고 나갔다가 안 그래도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또 일을 더 보태줄까 봐 나가지도 못했다.

그리했던 그때 정말 우리가 세상 같이 사는구나, 그래야 하는구나. 정말 아무 희망도 없는 거 같았는데 코로나도 이겨낼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의 용기가 생겼다.

프레시안 : 그런 건 당연히 정부에서 할 거라고 생각했다. 장애인 대책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박명애 : 그때는 시청이나 이런 데서도 아무 대책이 없었다. 손이 모자라서 그렇겠지만.

그때 탈시설한 한 분이 확진자가 됐다. 그분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장차연 상근 직원들이 직접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서 그분을 살폈다. 그 뒷날인가, 상주의 병원에 자리가 돼서 직원들이 대구에서 상주까지 그분을 보내드렸다. 그분은 나중에 퇴원하시고 장애인 공동체에서 직접 확진자를 도왔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활동보조 서비스 이런 게 있지 않나.

박명애 : 활동보조 서비스가 있다. 하루 몇 시간 이런 식으로 활동보조인이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도와준다. 활동보조 서비스가 없어지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분들이 확진자 간호하고 그럴 순 없으니까.

활동보조 서비스를 계속 받아도 무서운 병이 도니까. 활동보조 분들이나 받는 입장에서 다 걱정되지 않겠나. 서로 불안함 속에서 하루하루 지냈다.

휠체어 타는 장애인은 확진자가 되면 병원을 가더라도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병원이 사람 밀려오고 엄청 바쁜데 나를 다 케어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활동보조와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을까.

프레시안 : 장애인 콜택시가 비장애인 확진자 이송에 투입되기도 했는데, 장애인 확진자는 어떻게 했나. 콜택시 몇 대 없는 것마저 없어져서 더 힘들었을 것 같다.

박명애 : 장애인 대책은 뭐 없었다. 그럴 때 너무 대책이 없다. 우왕좌왕하는데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몇 년 전에 메르스 때도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때도 별다른 대책이 없이 넘어갔다. 그때 대책이 있었으면 이번 코로나에 그렇게 공백은 없었을 텐데. 걱정이다 앞으로 그런 일이 닥치면 또 어떻게 되는 건지.

프레시안 : 백신 맞을 때는 어땠나. 요양병원에 계신 분들이나 기저질환자는 먼저 맞았다.

박명애 : 저는 나이 순서대로 오는 걸 맞았지 장애인이라고 먼저 맞거나 하지 않았다. 기저질환자나 요양병원은 먼저 맞아야 한다고 했는데 장애인은 그런 대책에 포함되지 못했다.

장애인 기저질환자 많다. 저도 그렇고. 몸이 약하다 보니까 저는 당뇨, 혈압 이런 거 있고 기관지가 많이 약한 편이다. 폐에 병이 있는 그런 건 아닌데 기침이 잦고 매년 가을마다 독감주사 맞는다. 코로나는 갑자기 생겨서 그런가 그런 게 없었다.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고 그럴 때 기준을 잘 모르겠다.

프레시안 : 활동보조가 있어야 하고 또 일대일로 있다. 병원은 백신 맞고 더 감염 없다고 했는데 좀 뭔가 싶다. 마치 장애인은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박명애 : 작년에 청도 대남병원에서 코로나로 많이 돌아가셨다. 시설에 갇혀있던 분들이다. 코로나 백신 요양병원 이런 데 먼저 집중적으로 맞은 게 아마 시설 집단감염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갇혀서 살면 아무래도 취약하다. 시설 밖 식당 같은 곳에선 4명 이상 식사도 못 하게 하면서 그분들은 한곳에서 뭉쳐있게 한다. 밖에서는 거리두기도 하고 그러는데 시설 안에서는 그런 조치를 전혀 할 수가 없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탈시설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탈시설, 시설 밖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장애계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다. 작년 보궐선거에서는 서울에선 '탈시설장애인당'이라는 가짜정당도 있었다.

박명애 : 서울에서 여러가지 재밌는 운동을 많이 한다. 우리 박경석 대표님. (웃음) 탈시설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왔다. 매번 진전은 안 된다. 알겠다, 하겠다 하면서도 예산이 없다고 한다. 근데 시설에는 돈 안 들어가나. 시설에 돈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가둬놓을 돈은 있는데 나와 살게 할 돈은 없다는 게 이상하다.

우리나라는 예전에 6·25, 88올림픽, 그럴 때 장애인들이나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시설에 많이 가뒀다. 그런데 탈시설은 세계적인 추세다. 유엔에서도 한국에 탈시설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예산이 안된다고 한다. "밖에 있는 것보다 안에 있는 게 안전하다"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누굴 위한 안전인지 모르겠다. 장애인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고 그게 편하고 안전하다고 하는데. 시설에 있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프레시안 :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한다. 그냥 막연하게, '시설'이라면 왠지 다 갖춰진 곳이라 편리할 것 같다. 시설보다 수용소에 가까운 것 같다. 사람이 숨 쉬고 있다고 사는 게 아니지 않나.

박명애 : 시설 가보면 눈에 보인다. 안 편하다. 병실 같은 곳에 열 명씩 있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다. 저녁에 잠 안 자면 약 먹여서 재우고. 나이 어린 분들도 세상 의욕이 없다. 생기가 없는 눈을 보면 마음이 언제나 너무 아프다.

탈시설한, 시설에서 나오신 분들은 몇 개월만 지나면 표정이 달라진다. 그런데 지난 세월 동안 꿈도 못 꾸고 살았던 분들이 꿈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뭘 하고 싶다거나 어떻게 해야겠다는 욕심도 안 생긴다. 그게 많이 슬프다.

나이라도 좀 어리면 모르겠는데. 너무 늦게 나온 분들, 내가 67인데 내 나이 비슷한 나이에 나온 분들이 많다. 그분들은 어떡하나. 그냥 담배나 피우고 하루를 무의미하게 지내고 그러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안 좋다. 어떻게 해야 그분들이 자기 삶을 살 수 있을지 그게 큰 고민이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나. 위험할 것 같다.

박명애 : 저도 이렇게 장애가 심해도 밖에서 잘 산다. 그분들이라고 밖에서 못살 이유가 없다.

혼자 있으니까 너무 좋다. 지금 독거장애인이다. (웃음) 육십몇에 처음으로 혼자됐다. 어릴 때부터 내내 이렇다 보니까 우리 엄마가 꼼짝도 못 하고 내 옆에만 있었다. 동생들도 그렇고.

어떻게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인데, 애들 결혼해서 다 나가고 육십다섯살에서야 혼자됐다. 한 이삼년 전에. 활동보조 분이 10시 되면 가신다. 가시고 나면 혼자 있으니까. 할 게 좀 있으면 밤에 늦게 자고 아침에 좀 일어나기 힘들면 늦게 일어나고. 내 마음대로 이것저것 한다. 혼자서 살살 화장실도 갔다가. 내 혼자 있는 우리집이니까 내한테 맞춰놓은 화장실이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게 내가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 게 있다. 누가 같이 있으면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도 나한테는 간섭으로 들리고 눈치 보이고 그런 것들이 많이 있다.

프레시안 : 신경쓰일 것 같다. 챙겨주는 사람 있으면 좋지만 또 독립하고 싶고 그런 게 사람 심리다.

박명애 : 저 아니고 다른 분들도 만나보면, 시설에 계신 분도 그렇지만 집에 계신 분들도 눈치 보고 그렇게 된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니까. 내가 철이 들어가니까 엄마 힘드신 거나 동생들 그런 거나 다 눈에 보이니까 암말도 안 해야하고 그랬던 게 완전히 습관이 돼 버린 것 같다.

혼자 있으면 내가 혼자 조용히 좀 생각도 하고 하는데. 생각해봐야 내일 아침되면 성질대로, 급하면 급한대로 움직이겠지만. (웃음) 혼자 있는 게 별거 없어도 되게 편안하고 좋다.

프레시안 :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처음인가.

박명애 : 처음이다. 내가 이렇다고 우리 어머니는 저를 혼자 둘 수 없어서 어디 친구들하고 모임도 만든 적 없이 평생을 사시다 가셨다. 그렇게 어머니 죄업으로. 어머니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장애를 가지게 했나보다" 이 소리를 했었는데. 내가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그게 우리 엄마의 죄도 아니고 내 죄도 아니란 걸 알았다.

거리라도 내가 혼자 다닐 수 있게 돼 있었으면. 장애가 있어도 손가락질 안 받고 살았을 텐데. 나라 전체가 다 그랬다. 내가 일곱 살에, 학교 들어갈 나이가 됐을 때 학교를 못갔다. 엄마가 내 학교 못 보내서 그걸 미안해했다. 엄마는 나한테 미안해 해야하고. 나는 내가 당연히 학교도 안 가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 줄 알고 살았다. 지난 세월들이 다.

장애인들을 가둬놓지 않으면 무방비 상태로 '너희가 알아서 책임져라' 한다. 가족들한테. 형제들, 부모님, 그 책임으로만 남겨놨다. 장애가족 돌보다가 일 해야하면 시설에 보내고. 그런 식이다.

프레시안 : 활동보조 서비스가 많은 걸 바꾼 것 같다.

박명애 : 활동보조 없었으면 지금 같은 코로나에는 더 어떻게 됐을까 싶다. 장애계에서 활동보조 도입하자고 삭발하고 단식하고 엄청 투쟁했다. 나는 그전까지 활동보조 같은 게 있는 줄 몰랐다. 그때 이미 세계적으로 활동보조가 보편화 된 제도였다. 일본에서도 그때 이미 30년 전에 생겼다 하고.

내가 한 30년 전에 활동보조 쓸 수 있었으면 내 인생이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도 하고 경제력도 가지고. 세상 살아갈 용기도 그렇고. 그 세월이 지나버렸다. 난 내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마흔일곱살에 야학을 시작했다. 아까 꿈 얘기가 있었는데, 야학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고 생긴 꿈이 있나.

박명애 : 꿈이라기 보단 처음에는 집에만 있었으니까 학교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냥 막연하게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아, 내가 건강한 아가씨로 컸으면 국문학을 공부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마흔일곱에 질라라비 장애인 야간학교에 들어갔다. 가서 보니까 학생들이 다 장애인들인데, 나는 그래도 이렇게 말도, 잘 하는 말은 아니지만, 말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학교에는 말이 힘든 분도 있고 손이 힘든 분도 있고. 장애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내 불편함은 내보다 나은 사람이 도와주고, 내가 또 그분보다 더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내가 돕고.

학교 가서 내가 누굴 도울 수 있구나, 나는 이걸 할 수 있구나, 이런 걸 느꼈다. 장애인하고 이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학교 가서 제일 좋은 게 그런 거였다.

학교를 다니고 나서는, 공부를 하면서 '이동권'을 알게 됐다. 내 꿈이라면 그거다. 내가 나중에 집에 들어가도 옛날처럼 밖에도 못 나오고 사는 게 아니고, 나오고 싶을 때 나오고 사람도 만나는 거.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다 만들어놓고 학교를 졸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투쟁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 (웃음)

프레시안 : 야학 다니기 전까지는 어떻게 지냈나.

박명애 : 집에만 있었지 뭐. 내가 방 안에서만 살아갈 때, 나는 하고 싶은 게 생겨도 못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생각도 전혀 안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엄마하고 집에 있으면 그게 내 하루의 제일 좋은 날이고. 그것만 이리 생각했지 큰 꿈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뭐라도 좀 해봤으면 밖에 나가고 싶고 누구를 만나도 보고 그랬을 텐데.

저는 전화로 바깥 사람들과 소통했다. TV보다가 전화번호 나오고 그러면, 어디서 누가 꽃 예쁘게 키운다 이런 거 나오면 거기 전화해서 물어보고 그랬다. 사람을 보고 싶었다. 사람이 정말, 내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다. 야학을 가서야 사람을 만났다.

프레시안 : 저는 학교 그냥 다녀야 해서 다니고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보니 학교가 주는 의미가 참 크다.

박명애 : 질라라비 장애인 야학은 대구에서 시민운동 하던 비장애인 활동가분들이 만들었다. 야학이 있으면, 학교 간다고 하면 장애인들이 아무래도 밖에 나오기 쉽겠다 싶어서. 다른 걸로는 못 나오니까.

진짜 그렇다. 어디 놀러가자, 바람 좀 쐬러 가야겠다 그런 거 못한다. 우리 아버지부터 어렸을 때부터 저한테 "누구 등에 업혀서 뭐하러 나가려 하느냐"면서 막았다. 나가봤자 다른 사람한테 피해 준다고.

그런 게 있는 거 같다. 부모님들이, 우리 아버지만 그러신 게 아니고,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니가 불편한데 다른 사람한테까지 피해 주면서 다니지 마라', 그렇게. '니는 그냥 집에 있으면서 테레비나 봐라', '전화나 받아라' 이리된다. 장애인 자식은 집에만 있어야 하고, 시설이면 시설에 갇혀서 못 나오고 그랬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지금 질라라비 학교의 교장이다.

박명애 : 학교 졸업하고 투쟁도 하고 대표도 하고 그러다 교장도 됐다. 공부를 잘해서 된 게 아니고. (웃음) 제가 2살 때부터 지금까지 65년을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아무래도 체험을 해도 하나 더 했을 거 같고 그렇지 않나. 다른 장애인한테 공감하고 용기도 주고, 같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본 거 같다. 이제 내 임기는 곧 끝나고 새로운 교장이 온다.

프레시안 : 교장으로 있으면서 어떤 교육철학이 있었나.

박명애 : 철학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시간만 갔다. 우리 학생들한테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 나는 일단, 우리 학생들이 공부를 늦게 시작하다 보니까, 그래서 그런지 자신감이 안 생긴다. 나 역시도 그렇고.

내가 철이 없을 때 세상에 나갔으면 실수도 하고 '아 실수였구나' 하겠는데. 지금 나이가 이렇게 되다 보니까 지금처럼 인터뷰하는 것도 말하다 실수하는 거 아닌가 이런 걱정이 든다. 용기가 참 안 생긴다. 그래서 '내가 좀, 한 서른살에만 세상에 나왔다면 더 좀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교육 철학은 그거다. 우리 학생들이 밖에 나오는 거 자체가 어렵고 뭘 해볼 기회가 잘 없었다. 그분들이 내가 이렇게 생활하고 하는 걸 보면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저도 내 아닌 다른 사람들 보면 '저분은 어떻게 저렇게 잘하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분도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고 같이 해 나가는 속에서 점점 변화한 거다. 학생들이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많이 했었다.

프레시안 : 야학에서 이동권을 공부하고 투쟁하게 됐다고 했다.

박명애 : 이동권 투쟁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막 버스 정지시키고 그러면서 크게 투쟁하고 그랬는데, 대구에서는 그렇게는 못하고 한 번씩 버스를 직접 타는 걸 했다. 선생님들과 한 분씩 짝지어서.

저상버스 없을 때 저상버스 도입하자는 투쟁을 했다. 저는 그때 수동휠체어 타고 다녔는데 선생님이 내 휠체어를 들어 올려서 버스에 실었다. 그렇게 해서 저상버스가 도입됐다.

근데 뭐, 저상버스가 생기긴 했지만 그랬다. 생겨도 어느 노선 하나, 사람들 잘 안 타는 노선에. 내가 가는 곳으로는 없고. 어쩌다 있어도 한 대라 버스 타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이동권을 특별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박명애 : 내가 이동권을 그렇게 강조하는 게, 제가 학교에 처음 생겼을 때 못 갔다. 갈 수가 없었다. 장애인학교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참 반가웠는데. 집에 갈 때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봉고차로 데려다줬는데 학교 갈 때는 직접 가야했다. 그래서 몇 개월을 못 갔다.

학교에 가고 싶어서 혼자 여기저기 물어보고 알아보고 그랬다. 콜택시에도, 그때는 장애인 콜택시가 없었고 비장애인 콜택시만 있었다. 콜택시 회사 몇 군데에 물어봤다. 내가 이러저러해서 학교에 가려 한다고 하니까 다 안된다고 했다.

그러다 한군데서 한번 해보겠다고 해줘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사랑실은교통봉사대라고, 심장병 어린이 돕는 봉사도 하고 손님도 모시는 그런 교통이었다.

그분들이 고생 참 많이 하셨다. 우리 학교가 2층에 있었는데 그분이 날 2층까지 업고 올라갔다. 나를 업고 올라가서 자리에 앉혀놓고 다시 내려가서 휠체어 가지고 오셨다. 그렇게 학교를 일주일에 3일, 월수금 이렇게 갔다. 2년 동안 그 택시 덕분에 제가 학교에 다녔다. 오늘의 제가 있게 된 시발점은 그 교통이다.

프레시안 : 학교 가는데 교통수단을 찾는 데만 몇 개월이 걸린 셈이다. 그것도 스스로 찾았다. 택시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박명애 : 학교를 그래 2년 다니고 나서 제가 이사를 갔다. 택시비가 7~8000 원 나오는 데로 가서 도저히 학교를 못 다니겠는 거다. 그래서 '아 이제 학교 그만둬야 하나' 그러고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는데 KBS에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다. 토요일마다 하던 <사랑의 리퀘스트>라고.

그때 거기에서 장애인들이 밖에 나가서 공부하거나 일하거나 그런 확실한 무엇을 하는데 이동이 안 되고 그렇다면 전동휠체어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저는 몰랐는데 누가 '누나 니 거기 사연 올려봐라' 해서 사연 보냈더니 바로 연락이 왔다. 거기서 사람이 와서 내가 몸이 어떤지도 보고, 내가 또 이 나이에 공부한다 그러니까 그분 마음이 되게 그랬던 거 같다.

거기에서 전동휠체어를 지원해 줘서, 2년 동안 택시 타다가 그때부터 전동휠체어 타고 내 혼자 학교 다녔다. 2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택시 타고 학교 갈 때도 그랬지만 전동휠체어 타니까 더 세상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 전동휠체어 타고 서울도 가게 됐다. 활동보조 제도 도입 투쟁도 했고. 이동권이 이렇게 우리한테 큰 힘이 되고 있다.

프레시안 : 코로나 전에 서울 자주 왔다. 지금까지 서울 분인 줄 알았다.

박명애 : 서울에 많이 갔다. 활동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학교에 오면서 용기가 생기고 세상 보는 눈도 완전히 달라졌는데, 서울에 오면서 또 달라졌다.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차별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고도 하는데. 제가 그동안 그렇게만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살지 않았나. 두 살 때 그렇게 되고 걷거나 그런 생각을 꿈에도 못했으니까. 저는 꿈에서도 걸어서 서울 가는 그런 꿈을 안 꾼다. 손오공도 아니면서 순간이동 하는 꿈을 꾼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못 걸어서 불편하다'는 것도 잘 못 느낀다는 뜻 같다. 차별도 늘 그렇게 겪어왔으니 '이게 차별이구나'라는 생각을 잘 못한다.

박명애 : 진짜 그랬다. 장차법이 4월에 제정됐다. 그래서 해마다 4월이 되면 차별사례를 조사해서 인권위에 넣는다. 처음에 그거 쓰라고 하는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쓸 게 없었다. 나는 휠체어 타고 잘 다니고 있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떤 사람들은 몇 장씩 쓰는데 저는 한 장도 쓸 게 없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 있었다. 식당에서 휠체어 타고 들어가면 못 들어오게 하고 그런 거. 그렇게 밖에서 문전박대 당해온 일들. 또 어디 갔을 땐 화장실이 안 돼 있어서 화장실 못 간 거 생각나고. 이런 것들이 다 차별이었는데, 나는 내가 차별을 당해도 그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고 차별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프레시안 : 서울 갈 때 음식이나 물도 줄인다고 들었다.

박명애 : 화장실 한 번이라도 안 가야 하니까. 여성 활동보조인이랑 가는데 활동보조인분이 나를 이래 변기에 앉히고 그럴 때 나를 옮기기가 힘들고 그래서.

그럴 땐 남자들이 좀 부럽다. 화장실 꼭 안 가고 깡통 하나 있으면 후미진 곳에 가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여자는 못 그러니까. 서울 갈 때는 화장실 참고 밥도 작게 먹고. 하루 그렇게 가서 투쟁도 하고 면담도 하고, 서울에 있는 사람도 만나고 그래 갔다 온다. 한가지를 참으면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다. 근데 나이가 들어가니까 그런 것도 어려워지고 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서울도 못가고.

프레시안 : 이동권 투쟁은 우선 저상버스 같은 게 생각난다.

박명애 : 아직 투쟁하고 있다. 나라에서는 저상버스도 돈 많이 든다고 한다. 장애계에서는 노후버스 교체할 때 저상버스로 하자고 얘기하고 있는데 매번 예산이 부족하다고 한다. 한다고 약속을 해놓고서도 막상 돈 없다고 못한다고 하고.

저상버스가 휠체어 타는 장애인만 편한 게 아니고, 노약자도 편하고 애기 있는 부모님도 편하고 우리도 탈 수 있는 건데. 우리가 특혜를 달라는 것처럼, 특별한 돈을 쓰려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냥 우리도 시내버스 타고 다니면서 할 일 할 수 있게 하자는 건데. 못 걸어도 할 수 있는 일들 할 수 있게. 손이 되면 손으로 하고 입이 되면 말로 하고.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죽어 살 필요도 없고 차별이나 이런 말 받을 필요도 없이, 내 뜻으로 할 수 있는 그런 게 될 텐데.

프레시안 : 저도 저상버스가 좋다. 높은 차 멀미난다.

박명애 : 저상버스 처음 도입됐을 때도 차 한번 타기가 힘들었다. 전광판도 잘 없었을 때라. 저상버스가 언제 오는지, 왔는지 지나갔는지 전혀 모르고 기다려야 했다. 노선도 이래 골고루 안 돼있고.

그래서 또 우리가 '도대체 몇 시간이나 걸리나 보자'해서 그런 운동도 했다. "너는 이쪽 노선 타라, 나는 이쪽 노선 탈게" 이렇게 갈라서. 얼마나 기다려야 차가 오고 오면 또 어떻게 하는지, 그런 걸 우리가 직접 조사했다. 해보니까 2시간 반을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버스회사에 전화하고 참 그렇게까지 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도입했다고는 하는데 한 노선에 겨우 하나, 언제 올지도 모르고. 도입했다고 말하기 좀스러운 수준이다.

박명애 : 그 차가 비싸다 보니까. 그때는 특별교통수단 이런 것도 없었다. 저상버스 겨우 도입됐는데 어느 노선에 있는지도 모르고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길에서 몇 시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고. 그런데도 시청에서 그러는 거다. 장애인들 그 비싼 버스 만들어줘도 안 탄다고.

저상버스도 운전하는 분들이, 교육을 받긴했지만 휠체어 장애인을 잘 안 태우다 보니까 잊어버리는 거다. 그 버스가 원래 한쪽으로 비딱하게 기울어서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게 숙여준다. 경사로도 나오고. 그런데 안 쓰다 보니까 쓸 줄 모르는 거다. 대구에 그런 일들이 좀 있었다. 휠체어 장애인 태울 줄 모르니까 정류장에 서 있는데도 그냥 지나가 버리고. 그래서 고발도 하고 막 그랬다. 지금 많이 편리해졌다.

이동권 투쟁이 그런 운동들이 알게 모르게 많았다. 건물 입구에 경사로 만드는 그런 운동도 했고 참 여러 가지 많이 했다. 그게 다 학교를 다녀서 할 수 있었던 거다.

프레시안 : 이동권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모든 게 다 연결된다.

박명애 : 이동권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동할 수 있는 게 마치 피가 몸에 흐르듯 자연스러운 거다. '내일 아침에는 내가 일어나서 뭘 어떻게 어떻게 할 거다', '어디서 몇시까지 이거 해야 하고 그거 마치면 뭐 해야겠다', 이런 거 할 수 있는 게 이동권이다.

많이 편리해졌지만 많이 남았다. 버스는 아직까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시간이 안 맞는다. 주로 특별교통수단 이용한다. 근데 특별교통수단도 차가 충분하지 않아서 오래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오늘 아침엔 비가 많이 와서 3시간 기다렸다.

이동권을 가지고 내가 이리 변화한 걸 보면 다른 사람은 분명 더 변화할 거다. 기회를 평등하게 줘야 한다면서, 버스도 못 타고 있다. 누구나 버스 타고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 돼야 한다. 지금이라도 공부하고. 야학도 민간에서 만들었다. 어려운 사람들이 힘들 모아서 이렇게 야학도 만들고 나를 이렇게까지 변화하게 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최근까지도 투쟁하고 있다. 벌금이 쌓여서 구치소 갔다 오고 그랬다.

박명애 : 서울에 있는 우리 이형숙 대표가 고생 많이 하고 있다. 이형숙 대표하고 박경석 이사장, 권달주 대표 이 세 분이. 아 최용기 회장도.

그분들 구치소 갔다 왔지만 또 벌금 올라갈 거다. 얼마 전에도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 온다는 행사에 갔다가 경찰서 갔다. 네 명이 구속됐다고 하더라. 박능후 전 장관 때부터 1년이 넘도록 면담을 요청했는데 안 만나주고 있어서 간 건데.

서울이 시장이 바뀌고 그래서 그런가 또 달라진 거 같다. 전엔 그렇게 잡아가고 그러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서울은 법을 만드는 데라 더 치열하게 투쟁한다. 대구에서 한 번씩 가서 연대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분들이 더 많이 투쟁한다. 참 마음이, 미안할 때가 많다.

우리 몸들이 그리 안 편한 몸들인데도 왜 거기 들어갈라 그러겠나. 또 싸우러 나가야 하니까 벌금이라도 면해놓으려고. 나도 예전에 재판가서 그랬다. 판사가 "앞으로 자숙하고 안 그러겠습니까" 그러는데, 내가 "근데 그 말을 하면 거짓말이 될까 봐 약속을 못 하겠습니다" 그랬다. "내가 살아서 이래 움직이고 먹고 살려면, 사람은 움직여야 하는데 그게 또 막히면 싸워야 하는데 어떻게 '안 하겠습니다. 선처해주세요' 그러겠습니까. 하더래도 제가 자숙하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앞으로 안 한다고 얘기는 못 합니다" 그랬다.

프레시안 : 차별금지법 제정되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나.

박명애 : 누가 막 "그거 된다고 다 바뀌겠냐" 이런 말을 하는데, 근데 조심은 하지 않겠나 사람들이. 차별 많이 당하는 사람들, 성소수자나 감염인들, 비정규직도. 이런 분들이 법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고 말도 할 수 있지 않겠나. 누구는 차별을 받아야 하고, 누구는 차별을 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 따로 없다. 다 같이 살아야 하는데.

투쟁할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동지'라는 말하고 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런 세상을, 다 같이 잘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갈 때 거기에 차별금지법도 같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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