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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핵심협약 비준도 않고 '협약 무력화법'부터 밀어붙인 정부·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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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핵심협약 비준도 않고 '협약 무력화법'부터 밀어붙인 정부·여당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노동개악 들여다보기 ① ILO 협약 이유로 밀어붙인 노동조합법

지난 12월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동관계 법안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좌표를 잃어버릴 정도로 어지러운 개악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 그렇게 삐딱하게 보지 말라며 많은 독자 분이 충고해 주시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래서 다시 키보드를 잡는다.

할 얘기가 너무나 많지만 독자들도 그렇도 나도 그렇고 긴 글을 쓰고 읽을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이 법안들은 대통령 사인만 거치면 곧바로 효력을 발휘하게 될 테고, 연초만 되어도 이제 '대응방안' 논의가 줄을 이을 테니.

그래서 본회의를 통과한 무려 8개의 노동관계 법안 모두를 꼼꼼이 살피긴 어렵고, 그 중 가장 도드라진 노동조합법과 근로기준법 개악 내용을 각각 한 편의 글로 다뤄보기로 한다. 고용보험법 관련 내용도 다룰 만한 얘기가 상당히 있어서, 해당 내용은 시간이 허락한다면 추가 글을 써볼 생각이다.

대표적인 독소조항 : 단협 유효기간 연장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ILO 3법'이라며 통과시킨 노동조합법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기존 2년이던 단체협약 유효기간 최장 한도를 3년으로 늘린 것이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모두 목소리 높여 반대한 조항으로, 이걸 해야 한다고 주장한 건 오직 경총을 비롯한 사용자단체뿐이었다. 다시말해 정부가 사용자를 위해 입법을 밀어붙인 조항이다.

"아니, 최장 한도가 늘어난 것일 뿐 기존 2년으로 합의된 단체협약 유효기간이 자동으로 늘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노조가 버티기만 하면 기존 2년으로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고, 노사 합의만 이뤄지면 1년이나 더 짧은 기간으로 단축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건 노동조합 안해보신 분들이나 하는 얘기다. 한국 사회에 노사간 힘의 균형 같은 게 있다고 착각하는 분들, 또는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들이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얘기다. 그런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대체 뭐라고 답변을 하실지 궁금해진다.

한국의 노동조합들 모두가 왜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2년으로 하고 있을까? 노사 합의에 따라서는 1년도 가능하고 1개월도 가능한데 말이다. 왜 하필 기존 법률의 '최장 한도'(2년)를 단체협약 유효기간으로 정하고 있는 걸까?

답변은 간단하다. "자본가들이 원하니까. 그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니까 그렇게 된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으로 둔갑하는 것처럼, 사업장에서 자본가들의 차고 넘치는 힘은 단협 유효기간 '최장한도'를 '최단한도'로 둔갑시켜 버린다.

물론 자본가들이 지금 당장 모든 사업장의 단체협약을 3년으로 연장하는 일을 한방에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우선 노조가 신규 조직되는 사업장에서 단협 유효기간을 3년으로 하지 않으면 노조 인정도 할 수 없고 단체협약 합의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며 단협 유효기간 3년을 관철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쪽은 신규 노조 사업장이다.

다음 목표는 자본잠식이나 기업매각 등으로 구조조정을 걱정하고 있는 사업장들이다. 정리해고나 희망퇴직, 임금삭감을 밀어붙이면서 단협 유효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면 조금 덜 짜르겠다고 협박하며 관철해 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기업을 원청으로 두고 있는 하청 납품업체, 용역업체들의 처지는 훨씬 더할 것이다.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쪽은 신규노조와 구조조정 사업장들이지만,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쪽은 복수노조 사업장의 소수노조들이다. 자본가들이 어용노조 만들어서 교섭대표노조로 인정하고 그들과 3년짜리 단체협약 체결해 버리면?

소수노조가 조직사업을 제아무리 열심히 하고 결국 다수노조 지위를 얻게 되더라도 기존 어용노조가 체결한 3년짜리 단협 때문에 3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그 3년 동안 교섭권도, 파업권도 없는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고치라는 조항은 하나도 손대지 않고

만에 하나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되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조항은 삭제하자는 제안을 해왔다면 진지하게 검토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사간 힘의 균형까진 아니어도 소수노조에게 최소한의 노조 할 권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창구단일화 조항이 삭제된다면 많은 노동자들이 무노조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엄두를 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악법은 그대로 둔 채 유효기간만 3년으로 바꾸는 것은, 자본가들만 쌍수 들어 환영할 조항임에 틀림없다.

창구단일화 조항만이 아니다. 파업에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형사처벌하는 조항, 교사·공무원에게 파업권과 정치활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조항 등 그동안 노동조합만이 아니라 국제 노사정기구인 ILO로부터 끊임없이 독소조항으로 지적되어온 조항 대부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 내용들 전체를 열거하려면 책 한 권은 써야 할 테니 이곳에 담아내는 건 무리이다. 대신 최근 유럽연합(EU)과의 통상마찰 과정에 EU가 한국의 노동조합법 중 국제노동기준에 미달한다고 콕 집어서 지적한 4가지 조항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했는지만 표로 정리해 보았다.

▲ EU가 지적한 국제노동기준 미달 사항과 12월 9일 국회가 개정한 노조법.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U가 '전문가 패널' 설치까지 요구하며 통상마찰 수준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EU가 지적한 국제노동기준 미달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하나도 제대로 고치지 않은 꼴이다. 특히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전태일 3법'의 하나로 10만 명의 청원을 받아 제출한 노조법 2조 개정안을 환노위 법안소위에서는 아예 다루지도 않았다는 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래도 개선되는 거 한두 개는 있지 않겠어?

굼벵이에게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12월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동조합법의 '구르는 재주'는 뭘까? 딱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실업자, 해고자도 기업별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 같은 취지에서 퇴직한 교사도 교원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실 이건 구르는 재주라기보다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깝다. 실업자, 해고자가 기존에 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을까? 아니다. 이미 대법원 판례로 모두 산별노조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번에 개정된 내용은 그들이 '기업별 노조'에도 가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연 것뿐이다.

그런데 이미 양 노총 소속 노동조합 상당수가 산별노조로 전환한 상태다. 그래서 해고자나 실업자 중 노조에 가입하고 싶어하는 노동자 대부분은 산별노조에 가입을 완료한 상태이기도 하다. 물론 기업별노조에 가입하고 싶어하는 실업자, 해고자도 있을 수 있으니 '개선'이라는 점은 분명하나 이게 뭐 그리 큰 개선책이라고 떠들 만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보수 언론들은 마치 해고자, 실업자가 현장을 맘대로 누비고 교섭과 투쟁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열린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이분들은 1970년대에 타임머신을 타고 이제 막 2020년에 도착하신 분들 같다. 민주노총 첫 직선제로 당선된 한상균 전 위원장을 비롯해 수많은 해고자, 실업자들이 산별노조와 총연맹 위원장을 지냈다.

그들 모두 산하 사업장 현장을 누비고 교섭과 투쟁에 대한 전략·전술 논의를 주도했다. 해고자, 실업자들은 오래 전부터 산별노조에 가입해 열정적으로 활동해 왔는데, 왜 지금까지는 난리가 났다고 떠들지 않다가 이제 와서 겨우 기업별노조 가입 건으로 떠들어대는 걸까? 모두 국민의 눈을 속이는 사기에 불과하다.

ILO 협약과 충돌하는 개악안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아주 조금의 개선책도 온전하게 실현하지 않는다. 해고자, 실업자에게 기업별노조 가입의 문을 열어주는 대신, 그들은 절대로 기업별노조의 임원 또는 대의원으로 출마할 수 없도록 권리를 제한해버렸다. (노조법 17조, 23조 개악)

그뿐이 아니다. 해고자, 실업자의 경우 근로시간면제한도(타임오프)를 산정하거나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서 조합원 수를 산정할 때에도, 쟁의찬반투표를 할 때에도 제외되는 '유령' 조합원 취급을 받도록 법을 바꿔버렸다. (노조법 24조, 41조 개악)

문제는 이러한 조항들이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ILO 협약을 해석하는 내용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겨우 10여개 조항으로 이뤄진 본 협약, 그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제2조 및 제3조와 충돌한다. 1948년에 만들어진 ILO 제87호 협약(결사의 자유 협약) 중 해당 조항을 읽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제2조) 노동자 및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제3조) 1.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그들의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하며, 관리 및 활동을 조직하고,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

2. 공공기관은 이 권리를 제한하거나 이 권리의 합법적인 행사를 방해하는 어떠한 간섭도 삼가하여야 한다.

즉, 누구를 조합원으로 받을 것인지 그리고 일부 조합원에게 권리에 제한 또는 차별을 줄 것인지 여부는 오직 '규약'에 따라서 정해야 한다는 것이 ILO 결사의 자유 협약 내용이다. 이걸 법률이나 정부 지침 따위로 제한해선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2월 9일 국회는 바로 이 조항들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입법을 해버린 것이다.

위 협약 내용을 자세히 보면 주어가 '노동자 및 사용자는',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으로 되어 있다. 즉, 결사의 자유는 노동조합에게만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라 경총 등 사용자단체에도 보장되는 권리이다. 경총·전경련 임원 중 부회장은 모두 CEO 출신이 아닌 자들로 뽑고 있지만 아무도 문제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유독 노동조합만 해고자, 실업자를 임원이나 대의원으로 선출해선 안 된다고 제한해버린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들도 하지 않았던 치졸한 짓을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소위 'ILO 3법'이라며 통과시킨 법안들을 요약하면, 국제사회와 노동·시민단체가 하라고 요구한 것(노조법 2조 개정으로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보장 등)은 하지 않고 해선 안 된다고 한 것(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나마 개선한 내용(실업자, 해고자 기업별노조 가입 허용)도 실업자, 해고자의 권리를 제한해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태양의 신 아폴론이 한눈에 반해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선물하며 구애작전을 폈지만,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가 끝내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 그러자 아폴론은 누구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도록 만들었다. 능력을 주었지만 곧바로 그 능력을 무력화할 저주를 걸어버린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ILO 협약이 명시한 결사의 자유와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국제사회와 노동·시민단체 요구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ILO 협약 비준을 위해 필요하다는 핑계로 협약과 충돌되는 노동법 개악을 강행했다. 협약을 무력화할 법안을 협약 비준과 함께 추진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노동정책 대부분이 이런 꼴이다. 최저임금 올린다더니 곧이어 산입범위를 무한 확대해 최저임금 제도 자체를 무력화해 버렸다. 노동시간을 주당 52시간으로 제한한다더니 근로감독과 형사처벌을 면제하고 특별연장근로라는 뒷구멍을 열어준데 이어 탄력근로제 확대로 노동시간 단축을 무력화해 버렸다.

그래도 앞선 정책에선 그나마 개혁적 요소를 먼저 시행하고 이를 무력화할 정책이 뒤따라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혁적 요소보다 무력화 정책을 먼저 집행했다. 무슨 소리냐고?

ILO 협약 비준을 본회의에 상정할 책임이 있는 상임위는 환노위가 아니라 외통위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외통위는 ILO 협약 비준 건을 제대로 된 논의도 하지 않고 '보류' 상태로 둬버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외통위는 ILO 협약 비준을 위한 회의 일정을 잡지 않고 있다. ILO 협약을 비준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ILO 협약을 무력화할 노동법 개악을 강행한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치졸한 짓은 죄다 신들이 벌인다. 그나마 아폴론은 예언 능력을 먼저 주고서 구애를 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저주부터 걸어놓고 권리 보장은 내팽개쳤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멸망을 미리 알았지만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 고국의 몰락을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이따위 치졸한 짓을 벌인 정권과 여당에게 어떤 비극적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지만, 180석 거대 여당의 힘을 가진 이들이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기에 그 결말이 무엇인지는 미리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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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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