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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신자유주의' 극복 없는 개혁은 별무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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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신자유주의' 극복 없는 개혁은 별무소용

[민미연 포럼] 개혁 없이 정권의 뿌리는 깊어지지 않는다

'헬조선'이니 '3포 세대'니 하는 말이 떠돈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사람들의 마음에 잠재했던 막연한 좌절들이 이런 신조어로 정착하자,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촛불을 경험한 우리는 정치인 문재인을 촛불혁명의 완수자로 선택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 정책을 둘러보면, 현재 우리가 처한 모순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바꾸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무리 없이 굴러가는 사회에는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지 않다. 한국경제와 사회는 임기응변의 대처보다 본질적인 수술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제대로 된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직장인의 약 80퍼센트가 번아웃(burn-out)증후군을 앓는다고 한다. 회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지만, 회사는 개인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대신 불안감만을 준다. 중견기업, 아니 대기업에서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을 해도 막연한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미 신자유주의 체제에 안착한 한국 기업은 개인의 삶의 안정성을 주는 직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대응하면서, 한국 기업에서 직업적 안정성은 사라졌다. 국회예산정책처가 낸 '고령화가 근속 및 연공 임금체계에 미치는 영향과 정책 시사점'이란 보고서는 2010년 기준 우리나라 노동자가 한 직장에 다니는 기간을 뜻하는 평균 근속연수가 5.0년(경제활동인구조사 기준)으로 유럽 선진국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탈리아(11.9년), 프랑스(11.7년), 독일(11.2년) 등은 평균 근속연수가 11년이 넘었고, 네덜란드(10.6년), 스웨덴(10.6년), 스페인(10.0) 등은 10년이 넘었다. 반면 우리나라 노동자 가운데 근속연수가 '1년 미만'인 경우는 전체의 37.1%나 됐고, '10년 이상'은 17.4%에 그쳤다. 일본의 경우 '1년 미만' 근속연수 노동자는 전체의 7.3%에 불과했고, '10년 이상' 근속자의 비중은 44.5%에 달했다.

직업 안정성이 사라지자 개별 노동자가 살아남기 위한 거친 생존본능만 꿈틀거리게 됐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미생> 같은 드라마를 통해 확인한다. 미생처럼 살아가면서 번아웃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강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경쟁에 지친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잠재적인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각박하게 된 데에 더욱 가혹해진 생존조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이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붕괴할 수 있다. 국가는 강하지만 사회는 무너지는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미국의 저명한 진보 논객인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가 진보 매체 <트루스디그(Truthdig)>에 기고한 '남자들은 구속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쫓아내라(Lock Up the Men, Evict the Women and Children)'는 제목의 칼럼에서 밝힌 2016년 미국 빈곤층 삶의 적나라한 단면은 다음과 같다. "미국 내 4가구 중 1가구는 소득의 70%이상을 월세에 사용한다. 이 월세를 낼 수 없는 순간 가족 모두 노숙자 센터나 버려진 건물로 들어가게 된다. 우발적인 병원비, 급여 감소, 경조사, 자동차 고장 등 사소한 지출이 쌓여 빈곤층은 노숙자가 된다." 미국의 대안언론 <데모크라시 나우(Democracy Now)>는 지난 13일자 기사 '매 일분마다 네 사람이 집에서 강제퇴거 당하다(Nearly 4 People Are Evicted Every Minute)'에서 사회가 붕괴한 미국의 현실을 전달했다. 미국 하층 사회에서 강제퇴거는 21세기형 흑사병처럼 돌아다닌다. 미국의 거대 금융회사와 IT기업이 엄청난 흑자를 내는 현실과는 상관이 없다. 국가는 굴러가도 사회는 망가질 수 있는 사례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와 그 나라를 가장 성공적으로 따라한 또 다른 나라, 두 나라의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상황이 일어날까? 미국과 한국의 성공과 실패 뒤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자리하고 있다. 세계화는 본질적으로 시장과 시장 사이의 장벽을 없앤다. 장벽을 없애고 큰 시장을 추구해서 규모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어느 국가에서건 소수의 경쟁력 있는 대기업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동참한 국가에서 소수 대기업과 중상층은 더 나은 삶을 보장받았지만, 다수의 삶은 절대적 평가 면에서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헬조선을 말하는 사람들과 멕시코의 국경선을 넘는 사람들의 처지는 이런 의미에서 동일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때문에 한국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말은 한편으로 진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시장의 장애물을 없애기에 기업의 성장을 가속화한다. 핵심은 기업의 고속 성장과 더불어 발생하는 이윤을 어떻게 사회에 골고루 흘러가도록 설계하느냐에 있다. 세계화 시대에도 사회 합의주의 정책을 채택한 유럽 정부는 세계화의 이익과 위험이 고루 분산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정책과는 어긋나게 상위 10퍼센트만 이익을 얻는 길로 걸어갔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세계 상위 소득 데이터베이스와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2년 기준 우리나라의 상위 10% 소득집중도는 44.9%로 나타났다. 아시아 주요국가 중 가장 크며, 범위를 전 세계 주요국으로 넓혀 봐도 미국(47.8%) 다음으로 큰 수준이다. 우리나라 소득집중도는 외환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커지기 시작해 2000년 35.8%, 2008년 43.4%에 이어 2012년 44.9%까지 치솟았다.

2017년 10월 박주현 바른미래당 의원이 국세청으로부터 제출받은 '2008∼2015년 통합소득(연간 노동소득과 종합소득 총합) 100분위 자료'에 따르면 2015년 통합소득 기준 상위 10%의 평균 소득은 1억1974만 원으로 하위 10%(166만 원)의 71.9배에 달했다.

많은 국가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급류에 휩쓸려 들어갔으나, 한국은 상위 1%만이 아니라 상위 10%의 소득이 급속히 증가한 독특한 국가다. 한국 기업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축적한 부를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만 분배했다. 여기에 공공부문이 덧붙여졌다. 대기업과 대기업 내부자, 그리고 여기에 둥지를 튼 공공부문 종사자들만이 세계화의 혜택을 받았다. 이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분노하고 좌절했다.

이런 사실은 대기업 노동자 현실을 보면 쉽게 드러난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대기업 내부에서 외부 노동시장으로 갈수록 비례적으로 줄어든다. 2015년에 기아차 정규직은 연간 1억 원, 사내 하청노동자는 5000만 원, 1차 협력사 노동자는 4700만 원, 그 사내 하청노동자는 3000만 원, 2차 협력사 노동자는 2800만 원, 그 협력사의 사내 하청노동자는 2200만 원을 받았다. 기아차 정규직과 2차 사내 하청노동자의 임금격차는 약 5배에 달한다. 대기업에 직접 포섭되는,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수혜를 받는 본사 정규직 외에는 대부분 노동자가 저임금에 시달린다. 이런 통계로부터 한국식 신자유주의는 내부의 저임금 체제를 고착화하는 경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올라탄 한국 소수 대기업의 고속 성장은 많은 노동자의 저임금과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이런 보호주의적 흐름은 세계무역을 더욱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가혹한 국제 환경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 대중이 충분히 공감하고 박수칠만한 수준의 근본적인 개혁이 진행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의 잠재력은 뿌리째 뽑혀나갈지도 모른다. 개혁만이 한국 사회의 뿌리를 더욱 든든히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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