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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적 페미니즘이 세상을 바꾼다

[민미연 포럼] 서지현 검사 뒤에 숨은 '폭력 자본주의'

몇 달 전, 박사급연구원으로 있다가 학내 비리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온 젊은 여성에게 학내 문화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정치적 민주화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럴 줄 몰랐다.

지도교수는 여러 기업이나 단체로부터 프로젝트를 따왔는데, 그를 포함한 대학원생들은 그때마다 삼촌이나 아버지뻘되는 사람들의 술 시중을 들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아침마다 지도교수에게 자신의 몸무게를 말했다고도 했다. 프로젝트 원청인 갑에게 잘보이기 위해 교수가 제자들의 몸무게를 확인한 것이었다.

서지현 검사 역시 윗사람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연구원이 해준 이야기와 서 검사의 상황이 겹쳤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이들은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성적 폭력을 행사한 것일까. 이는 성적 폭력이 '성'적 폭력이기 이전에 성적 '폭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 중 상당수가 이런 폭력을 경험했거나 상시로 벌어지는 공간에 노출되어있다. 가장 안정된 직종으로 손꼽히는 교사도 여교사의 경우 70%가 성추행을 경험했다고 보고 된다. 학교 같은 공적 기관도 이런 상황이니, 일반적인 여성 노동자가 감내해야 하는 성희롱/성폭력의 강도는 어떤 수준일지.

한국 사회에서 성적 가해 행위는 주로 조직 내부에서 발생하며, 이때 피해자가 갑의 위치에 있는 가해자를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주변 모든 권력 관계가 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 가해 행위가 조직의 문화로 뿌리내리고 있기에 더욱 심각하다.

누군가를 이를 직장 내 여성 차별의 문제로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만연한 성희롱/성폭력 문제는 성의 문제이기 전에 폭력의 문제다. 폭력은 가혹한 민중 통제 전략과 맞물려 있다. 민중에 대한 통제는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의 폭력을 통해 남성 개개인의 폭력을 순치시킨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아이가 커서 가정 폭력 가해자가 되는 일이 흔하듯 폭력은 붕괴된 공동체성에 허무해하는 개인에게 힘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보통 남성들은 폭력화된 남성으로 군대를 통해 거듭 난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한국인은 사회화가 높은 국민이라고 말한다. 높은 사회화를 내면에서 성취한 개인들, 즉 개인과 개인 간에 더할 나위 없이 선한 사람들이 조직에 들어가면 급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직은 목표를 정하고 개개인을 통제한다.

한국에 있는 조직의 대표는 기업이며, 기업의 목표는 이익의 확대에 있다. 그리고 기업의 이익은 지난 수십 년간 독재정권에 아래에서 결코 의심받아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목표였다. 폭력의 최종 근거는 독재정권이었다. 또한 정권의 최종목표는 순응하는 노동력의 확보에 있었다.

성희롱/성폭력은 위계관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려는 부정적 의미의 정서 교류(스트로크)다. 언제가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 군대에서 후임병을 강제 성추행한 사실이 알려져 문제가 됐다. 성적 가해 행위는 이처럼 관계 속 폭력성의 한 면다. 가장 약한 고리가 이성이면 성폭력으로, 동성이면 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사무직 회사원 사이 '원산폭격'과 '줄빳다'는 흔한 일이었다.

모든 차별은 노동력과 관련 있다. 차별이 있기 전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있다.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을 우대하기보다는 비하하고 조롱하고 학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가 자리해있다. 인간적 대우를 받고자 하는 노동자의 자존감을 밑바닥부터 뽑아버려야 '폭력 자본주의'가 유지된다.

백인 강제노동 계약노동자(indentured servant)들이 지나친 노동 강도를 견디다 못해 거부하자 미국의 노예무역이 활기를 띠었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농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많은 도시 노동자를 공급했던 전라도 지역은 한국적 인종 차별의 피해자가 되었다.

모든 기득권은 피지배층을 향해 분할 지배(divide & rule)전략을 행사한다. 기득권층은 언제나 소수이기 때문에 하위 동맹군을 가지지 못하면 항시적으로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기득권은 늘 다중적인 차별 망을 친다. 피지배층은 여러 차별로 분할돼 동일하지 않다 생각하며 단결을 주저하게 된다.

차별은 어떻게 사회적 구조로 지속될까. 차별받는 피지배층이 위계적으로 배치되어야만 차별구조가 유지될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등하고, 남성과 여성이 갈등해야만 차별구조는 존속된다. 이 중에서도 남성은 정규직일 수도 비정규직일 수도 있지만, 여성은 대다수가 비정규직이거나 정규직이더라도 가사와 육아에 내몰리는 순간 불안정노동자 신분이 된다.

결국 '폭력 자본주의'는 여성이란 희생 제물을 통해 영위된다. 사회의 위계는 그대로 폭력의 위계로 이어진다. 군대를 거치며 폭력을 내면화한 남성들은 조직 안의 여성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상대가 이성, 즉 여성이기에 성희롱/성폭력으로 나타난다.

한국 자본주의는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하는 가장 쉬운 길로 성취됐다. 선진 공업국이 된 후로는 정규직 남성의 고임금을 벌충하기 위한 도구로 저임금 비정규직이 확대되었고, 다수가 여성이었다. 한국 남녀 근로자 임금 격차는 십수 년째 2016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OECD 임금 격차(Decile ratios of gross earnings)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는 2016년 기준 36.67포인트였다. 남성 근로자 소득을 100이라고 했을 때 여성 근로자 소득은 36.67 적은 63.33이라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장지연 연구위원의 논문 '다양한 층위의 소득 정의와 구성요소에 따른 불평등수준'에 따르면, 한국의 개인별 소득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혹독한 격차 사회에서 한국의 하위계층은 어떻게 생존하고 있을까. 장지연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에서 가구별 시장소득의 분포가 비교적 평등한 이유는 가구주의 근로소득이 낮은 가구에서 2차 소득자의 경제 활동 참여가 활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가정과 일을 병행하는 한국 여성의 초인적 노력으로 완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가장 낮은 쪽의 노동력은 사회적으로 조롱받는다. 과거 '니그로'나 '전라도 깽깽이'는 그렇게 또 '맘충'이라고 불린다.

19세기 고통받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을 조직했고, 21세기 고통받는 여성들은 '미투(#metoo)' 운동을 벌이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숨죽여 있던 노동자들이 드디어 말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딸을 가진 아버지로 미투 운동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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