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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직접정치, 일터와 삶터로 확장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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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직접정치, 일터와 삶터로 확장돼야 한다

[왜 촛불인가 ⑤] 헬조선, 막연한 고통의 공간 아니다

처음 시작은 작았다. 10월 말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경찰들이 덤빌 때 병원을 지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민들의 지원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쌀값 제대로 보장 안 해주는 정부에 항의하러 올라온 농민을 물대포로 살인한 정부에 분노하지만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컵라면과 휴지를 보내는 이 시민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JTBC에서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첫 번째 열린 촛불시민행동에는 3만 명이 모였다. 그런데 이 3만은 10만이 되고, 100만이 되었으며, 1000만이 되었다. 시민들은 직접행동을 시작했다. 국정농단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 이미 시민들은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광장에 모이는 것은 중요한 정치 행동

정치를 바꾸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실천이었다. 우리는 외로이 투쟁하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지원물품을 보내거나 응원하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가 직접 광장에 모일 때 엄청난 힘이 발휘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싸우는 이들에게 그토록 억압적이었던 경찰이 행진 공간을 내어주고, 국회를 움직여 박근혜'탄핵'에까지 이르게 하는 이 힘을 우리 모두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매주 토요일의 촛불시민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정치에 개입하는 매우 구체적인 실천행동이었다. 그렇게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2016년 말에 1000만을 넘어섰고 아직도 주말의 촛불범국민행동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선거' 외에는 정치적 행동의 공간을 거의 마련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행동은 내가 원하는 정책을 추진할 사람을 뽑는 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선거는 대부분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었을 뿐이며 정치인들은 제대로 국민들의 견해를 대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농민들은, 노동자들은, 장애인들은, 철거민들은 '집회'를 해야 했다. 권력도 없고 힘도 없으며 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거나 정부 정책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목소리는 언론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만이 자기 의견을 밝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하지만 이 조차도 경찰에 의해 탄압받았다. 백남기 농민이 물 대포에 의해 쓰러진 것처럼 우리 사회에 고통 받는 이들은 집회조차도 탄압받았다.

이제 그 집회의 공간이 열렸다. 모두가 모인 광장에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울렸고 언론은 촛불의 민심을 살폈고 정치인들도 눈치를 보았다. 경찰이 지금도 행진을 제한하거나 차벽을 설치하는 등 소소하게 집회를 방해하고 있으나 백남기 농민에게 했던 것처럼 폭력적 태도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그만큼 촛불광장의 힘은 강했다. 물론 이 행동은 최종적인 승리에는 이르지 못했다. 박근혜는 아직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민들이 계속 행동한다면 박근혜는 결국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1000만 명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퇴진'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향해 모였고 이것은 매우 큰 정치적 압박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우리의 삶을 정치인들에게 의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집회'를 통한 시민들의 승리가 시민주권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벌써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주문하는 언론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여전히 시민들이 행사하게 된 정치적 권리가 '광장'으로만 제한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단지 박근혜와 공범자들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아직 박근혜는 퇴진하지 않았는데 벌써 대선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유력한 대선후보들은 여러 공약들을 내놓는다. 이 모든 것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며 시민들은 자신을 지지하면 된다고 말한다. 시민들의 힘으로 함께 이 일을 이뤄보자고 이야기하는 대전주자들은 없다. 시민들은 정치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삶을 정치인들에게만 의탁하기에는 우리는 사회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은 단지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다. 대학도 정유라를 부정입학 시키는 등 평등하지 않았고, 박근혜-최순실은 재벌대기업과 뇌물을 주고받으며 노동개악을 관철시켜서 비정규직을 늘렸다. 단돈 24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17년간 일한 버스기사를 해고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법원은 삼성 이재용의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일방적으로 일본에게 돈을 받고 위안부 합의를 하고, 세월호 유가족을 감시했고 진실을 왜곡했으며 예술가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정권 비판자들을 찍어냈다. 언론을 자기 입맛에 맞게 길들이고 역사왜곡 국정교과서를 만들었다. 특정 누군가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끌고 가고 있는 모든 정치인들의 공범자이거나 침묵의 동조자들이었다.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헬조선은 그저 막연한 고통의 공간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니다. 우리는 늘 정치는 원래 그렇다고 생각했고, 언론에서 말하는 것은 진실이라고 믿어왔으며, 내 일자리가 없는 것은 경제가 위기이기 때문이며, 내가 비정규직이 된 것은 내 노력이 부족해서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금의 헬조선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가 눈감고 있는 동안 정치인들과 재벌들이 동맹을 이루고 반대자들을 억압하면서 만들어낸 정책의 결과물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 우리는 촛불 시민행동을 통해 그 동맹체제의 핵심 한두 명을 교체할 것이다. 그러나 헬조선 전체를 바꾸려면 촛불 시민행동은 더 넓어지고 깊어져야 한다.

광장의 주인 됨을 일상의 주인 됨으로 확장하는 시민들
촛불광장에 나와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롭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온갖 풍성한 나눔이 있으며,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가슴 벅차다. 이 순간 우리는 정치의 주체로 온전하게 서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불안정한 일자리 때문에 미래의 희망을 꿈꾸지 못하며, 때로는 일터에서 지루한 노동을 감내해야 하며, 회사의 압박에 숨이 막힌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몰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고, 차별로 고통당한다. 우리의 일터와 삶터에서 주체가 아니다. 갈등과 경쟁, 불안과 혐오의 세상에 고군분투하며 버텨야 한다. 정권이 교체되어도 이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없다.

그러나 정치권이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시민들은 달라졌다. 정치권이 탄핵을 미룰 때 국회를 압박하여 탄핵에 이르도록 만든 것도 시민들이었고, 국정교과서를 관철시키려고 할 때 반대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여 후퇴하게 만든 것도 시민들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서 정치권이 불분명한 태도를 취할 때 이것을 탄핵 사유에 포함하도록 만든 것도 시민들이었다.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며, 정치권에 정치를 의탁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두 달이면 촛불이 사그라질 것이라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국회에서 탄핵을 의결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추측도 뛰어넘어 지속적으로 촛불을 들면서 주권자의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변화의 가능성은 여기에서 생기고 있다. 정치의 주체는 국민이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문서상'의 권리로가 아니라 현실의 권리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광장에서 자유발언을 하는 많은 이들은 이제 광장의 정치는 현실의 정치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비정규직 문제, 청년실업의 문제, 보육과 교육의 문제,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들을 풀어보자고, 그 현실을 바꿔보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촛불광장에서 한껏 채운 힘을 이제는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로 나아가 보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광장에서 주인이 되었던 우리가 일상에서도 주인이 되어보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이다.

집회의 자유를 넘어 헬조선을 바꾸는 '결사의 자유'를 누려보자

광장의 촛불을 일상의 촛불로 확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장에서 민주주의의 주인이었던 우리가 일터와 삶터에서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헬조선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다.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책과 제도와 법안이 무엇인지 토론하고, 그것을 현실화하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고, 기업과 정부의 여러 정책을 감시하고 평가하며, 때로는 우리 힘으로 직접 제도를 만드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일터와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사회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지, 지자체의 여러 행정은 민주적으로 이루어지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지 감시하고 개입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더 많은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광장에서 우리가 천만 명 중 하나로 힘을 보탰듯이, 일상에서 정치의 주체이자 여러 의제를 제기하고 감시하고 행동하는 '시민'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 힘은 같은 의제를 제기하고 함께 행동하는 '모임'으로부터 나온다. 그 모임은 정치적 결사인 '정당'도 있고, 동일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권리향상을 위해서 모이는 노동조합도 있다. 생협이나 시민단체처럼 관심이 있는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모임도 있고, 그냥 작은 마을모임도 있다. 이런 다양한 모임을 구성하거나 혹은 그 모임의 회원이 되어 집단적인 힘을 통해 일상에서 사회를 바꾸는 노력을 기울여보자. 촛불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은 정치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시민사회'의 저변이 넓어지는 것이다. '집회의 자유'와 더불어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헌법적 권리인 '결사의 자유'를 누려보자.

그런데 이 모임이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바탕 위에 서 있지 않다면, 지금의 헬조선을 바꾸는 힘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촛불광장 건너편에서 약자에게 억압적이고 혐오의 표현을 쏟아내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범과 공범을 비호하는 또 다른 모임을 목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시민사회의 다양한 모임들은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연대를 자신의 과제로 하기를 원한다. 천만 촛불의 광장을 열기까지 억압받고 쫓겨나면서도 더 나은 사회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세월호 유가족과 사드에 반대한 성주군민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철거민들과 장애인들과 밀양의 할매 할배들과 더불어 가는 모임이 더 많이 만들어지기를 원한다.

그것이 촛불의 확장이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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