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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같은 박근혜…정신 승리에 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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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두환 같은 박근혜…정신 승리에 도취"

[정세현의 정세토크] "한일 위안부 합의는 제 2의 을사늑약"

북한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안 2270호가 통과된 지 100일이 머지 않았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셈법을 바꾸겠다며 대북 압박 정책을 강화해왔다.

박근혜 정부 외교의 목적도 '북한 일촌 끊기'에 맞춰져 있다. 박 대통령의 우간다 방문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쿠바 방문은 북한과 친한 국가들을 북한으로부터 떼어 내서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들 나라와 북한이 멀어지면 정말 북한은 고통스러울까?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의 이러한 외교 행태가 "마치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절의 외교를 보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정 전 장관은 "당시만 해도 남북한 공히 유엔 가입 국가가 아니었고 유엔에서 남북 외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기여서 한 표라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프리카 국가 원수들을 한국으로 많이 초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러한 방식으로 외교를 펼치는 것이 통하겠나"라고 되물었다.

그는 "설사 이들 나라들이 북한과 멀어지면 북한이 정말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고통을 느껴서 비핵화의 길로 나설 수 있을까"라며 "실체적인 진실과 냉정한 평가로부터 외교 정책이 나와야 하는데 희망적 관측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한심한 상황"이라고 일갈했다.

다른 한편으로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군사 교류를 긴밀히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미국이 대중국 압박 차원에서 군사 전략을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일본이 중간 보스 역할을 해주고 있고 한국은 그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라며 "한일 간 군사 회담을 거듭할수록 미국 밑에 일본이 있고 일본 밑에 우리가 있는 이 구도는 더욱 고착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러한 박근혜 정부의 외교 행태를 보며 기시감이 든다고 말했다. 140년 전 이른바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이 야금야금 조선으로 진출했고 결국 국권까지 강탈당했는데, 그때의 조선왕조 행태와 박근혜 정부의 외교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다.

정 전 장관은 "조선은 당시 일본의 힘이나 야망에 대해 전혀 감이 없었다. 일본이 러일전쟁마저 승리하고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했을 때는 이미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진 뒤였다. 이것이 5년 뒤 국권 강탈로 이어졌지만 이것도 모르고 그저 일본의 힘에 빨려 들어간 것"이라며 "그런데 지금 한국 외교가 이때와 비슷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인터뷰는 지난 7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는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의 핵을 포기시키겠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 말 아프리카의 우간다를 방문한 이후 우간다가 북한과 군사‧경찰 부문의 교류를 끊기로 했다는 점을 성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정세현 : 우간다를 북한에서 떼어 내서 우리 편으로 만든답시고 코리아 에이드도 제공하고 여러 가지 수를 쓰는 것 같은데 꼭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절에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하던 외교 같습니다.

당시만해도 남북한 공히 유엔 가입 국가가 아니었고 유엔에서 남북 외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기여서 한 표라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프리카 국가 원수들을 한국으로 많이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러한 방식으로 외교를 펼치는 것이 통할까요? 우간다는 우리가 도와줘야만 움직이는 곳입니다. 우간다에서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위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가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국가입니다.

우간다가 북한과 군사‧경찰 부문 교류를 끊겠다고 했던 것을 두고 우간다 정부 부대변인과 외교장관 간에 다른 입장을 말하는 해프닝도 있었는데, 이것 역시 경제적 지원과 관련된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간다 쪽에서 쓴 노림수였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한테 경제적인 지원을 좀 더 받아내기 위해서 몸값을 높이기 위한 행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으로부터 받았던 것보다 우리가 좀 더 지원해 준다는 것에 혹했을 수 있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서 이런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간다가 바보도 아니고 이 정도 실리 계산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우간다에 공을 들여서 북한과 우간다 사이를 멀어지게 하면 북한이 정말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실제 북한과 우간다 사이를 이렇게 떼어 내면 북한이 고통을 느끼고 비핵화의 길로 나설 수 있을까요?

실체적인 진실과 냉철한 평가로부터 외교를 해야 하는데 희망적 관측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한심한 상황입니다.

▲ 지난 5월 29일 오전(현지 시각) 박근혜 대통령과 요웨리 무세베니(오른쪽) 우간다 대통령이 대통령궁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 참석했다. ⓒAP=연합뉴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는 북한과 가까한 국가들을 잇따라 방문하면서 북한을 고립시킨다는 전략을 밀어 붙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쿠바를 방문해서 최초로 쿠바 외교장관과 만남을 갖기도 했습니다.

정세현 : 쿠바가 미국과 관계 정상화 과정에 돌입한 것에 고무돼서 이번에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성사시킨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쿠바를 북한으로부터 떼어내겠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떼어 냈다고 칩시다. 이게 북한한테 얼마나 고통을 줄 수 있을까요? 이걸로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습니까?

쿠바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수교입니다. 쿠바가 북한과 단교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쿠바의 지도자가 바뀌면 모르겠지만, 쿠바가 우리와 손을 잡기 위해 북한과 단교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쿠바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또 미국과 관계정상화는 쿠바가 미국에 굴복했다기 보다는, 미국이 세계전략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쿠바 같은 나라와 적대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 쿠바를 달래는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어쨌든 북한과 수교했던 나라들을 북한과 떼어 놓으면서 북한을 압박하겠다는 구상 같은데요. 미국이 북한을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북한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정세현 : 미국의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 지정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국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이번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중국의 여러 가지 양보를 이끌어 내기 위한 행보로 보입니다.

미국의 지난해 대(對)중국 무역 적자액은 3800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미국이 무역 경쟁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중국은 계속 치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해 미국이 취한 조치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중국의 군사력 확충을 막기 위한 조치로도 보입니다.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안보 경쟁이 벌어졌는데 중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려면 미국에서 벌어가는 돈을 좀 줄여야 할 것 아닙니까? 미국은 중국이 자국에서 번 돈으로 군사력을 키워서 자국을 압박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북 제재 효과를 전혀 노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대북제재와 중국 압박을 동시에 추진하기 위한 카드였을 겁니다. 다만 대북제재보다는 중국 압박 쪽에 더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입니다.

▲ 5일(현지시간) 컨벤션 궁에서 만남을 가진 윤병세(왼쪽) 외교부 장관과 브루노 로드리게즈 쿠바 외교 장관. ⓒ외교부공동취재단

프레시안 : 그런가 하면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이란 핵 문제를 모범으로 삼아 북핵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정세현 : 이걸 두고 박근혜 정부는 이란처럼 전방위적으로 북한을 압박하면 결국 북한도 손 들고 나오지 않겠느냐고 해석할지 모르지만, 사실 미국의 본심은 이란 핵문제 해결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려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이란 핵 문제의 경우, 이란이 핵을 개발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협상으로 문제를 풀겠다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성과를 만들어 낸 케이스입니다. 이란이 핵을 가지면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등 이슬람 무장세력으로 핵이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절박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이란이 가지고 있는 중동에서의 위상과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 때문에 미국은 어느 정도 양보하더라도 이란 핵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북한 핵은 미국에게 이른바 '꽃놀이패' 입니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8년째 6자회담을 안 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통해 끌어내야 할 결과를 북한의 '선(先)행동'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반대급부로 줘야 할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 경제 지원 등은 확실히 언급하지 않고 중국에 "너네가 압력을 좀 넣어서 북한을 회담 테이블에 끌고 나오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중국과 같은 배후 국가가 없습니다. 그저 이란과 협상하면 끝날 일입니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상황이 다릅니다.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고 나서는 마당에 북핵 문제가 해결돼서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가 되면 미국의 대(對)중국 압박 카드가 없어집니다. 이런 측면이 이란 핵에 비해 북한 핵에 대해서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신 승리'에 빠져버린 박근혜 정부

프레시안 : 한국과 미국이 이러는 동안 한쪽에서는 북한의 리수용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북중 관계가 개선되는 신호탄으로 봐야 할까요?

정세현 : 사전에 양국 간 조율됐던 만남이라고 보입니다. 북한은 이번 7차 당 대회 사업총화를 통해 '경제개발 5개년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방향만 있고 숫자 등 구체적인 계획은 없더군요. 결국 이를 위해서 자본이 투입돼야 한다는 건데, 이 자금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곳은 중국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외교부장 보다는 예전 당 비서급인 부위원장을 보내서 총서기를 만나게 하고 이를 통해 경제발전에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을 겁니다.

일부에서는 리수용 부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의 면담이 겨우 20분에 그쳤다면서 그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귀띔이 돼있는 상황에서 양측 만남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라면, 20분 아니라 15분만 만났어도 의견은 충분히 나눌 수 있었을 겁니다.

시 주석은 이날 만남에서 양국의 우호 관계를 고도로 중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북한이 원하는 지원을 해주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북한도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어렵게 하면 안 된다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2270호와 같은 국제적인 약속이 있음에도 눈치껏 잘 지원을 해줄 테니 북한도 여기에 맞춰서 알아서 잘하라는 뜻이 담긴 겁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까지 자국으로 가까이 끌어들였기 때문에 중국이 북한을 버릴 수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 그나마 대미 협상에서 카드가 될 수 있는 북한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 지난 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리수용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만남을 가졌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프레시안 :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박근혜 정부는 나홀로 압박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미국이 북한을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해주기까지 했으니 결국 북한이 손 들고 나오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기보다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실현되고 있다는 일종의 '정신 승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북한은 6자회담에 나갈 뜻이 없습니다. 네 번이나 핵실험을 진행한 뒤 스스로를 책임있는 핵 보유국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들은 핵 전파와 확산을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핵 보유국에 이를 인정하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핵이 없는 한국과 일본은 대화 상대로 쳐주지도 않는 상황입니다.

북한은 자국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전제 하에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도 비확산 정도에서 북핵을 정리하고 싶을 수 있다는 겁니다. 북한의 비핵화는 자칫하면 한반도의 비핵화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곧 핵무기를 탑재한 미군의 한반도 진입 자체가 가로막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한반도 핵 문제에 대해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비롯해 핵무기를 싣고 다니는 어떠한 전략 무기도 한반도나 중국 주변에 나타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명분으로 삼아 한반도 비핵화까지 실현하고 싶은 겁니다.

미국은 국력과 군사력이 커진 중국을 계속 견제하려면 한반도 비핵화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 북한이 비핵화되면 한국이 미국 무기를 사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무기 시장도 유지하고 향후 대중정책과 대한반도 정책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계속 칼자루를 쥐기 위해 비확산 수준에서 북핵 문제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중국을 압박하거나 사드를 배치하는 데 명분이 서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비핵화만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한국은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러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아닙니까?

정세현 : 미국의 국익은 엄청 키워줬지만 우리 국익은 챙길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겁니다. 한국은 대북 압박을 강화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됐습니다. 이대로 남은 정권 임기를 마칠 가능성이 높은데, 다음 정부가 이를 원상 회복시키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입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 제2의 을사늑약

프레시안 : 남북관계가 대결 일변도로 치닫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특히 군사관계가 계속 긴밀해지고 있는데요. 2015년 이후 지금까지 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3번이나 열렸고 올해 3월에는 일본 해상자위대 막료장(참모총장)이 방한했고, 4월에는 장진규 육군참모총장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군사 교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세현 : 미국이 대중국 압박 차원에서 군사 전략을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일본이 중간 보스 역할을 해주고 있고 한국은 그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 있는 형국입니다. 한일 간 군사 회담을 거듭할수록 미국 밑에 일본이 있고 일본 밑에 우리가 있는 이 구도는 더욱 고착화될 겁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일본은 미국이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 구축해놨던 헤게모니 아래에 들어가 있지만, 미국의 힘이 빠지면 다시 아시아의 주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와중에 미국은 일본을 자국의 아시아 대리인으로 만들어줬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이때가 바로 전범국가에서 정상국가로 갈 수 있는 호기를 만난 것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게다가 미국이 한국을 밑에 붙여주기까지 했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완전히 물 만난 겁니다.

지난해 4월 27일(현지 시각) 미국과 일본은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했습니다. 이 조치를 통해 일본 자위대는 '미군의 후방 지원'이라는 명분만 있다면 세계 어디든지 출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 이 조치는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미국이 길을 열어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위대가 북한에 진출하려면 우리와 협의해야 한다고 했지만 일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너희 헌법상에는 북한이 너희 영토라고 돼있을지 모르지만 북한도 유엔 가입 국가고, 어차피 휴전선 이북의 관할권을 행사하지도 못하는 너희와 왜 우리가 상의를 해야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더구나 일본은 자위대가 북한에 진출할지 여부는 미국과 협의할 거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한 군대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협의해서 'OK' 사인이 떨어지면 한국의 승인 여부와는 관계 없이 북한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상이 지난해 10월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한국의 유효한 지배가 미치는 지역은 휴전선 이남이라는 발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지난해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한일 '위안부' 문제를 급하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얼른 해결하고 넘어가라는 미국의 압력에 박근혜 대통령이 특유의 버티기로 세게 치고 나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움직임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일 관계에서 마지막 걸림돌이 제거되면서 미국은 한일 양국의 협력 속도를 높였습니다. 한국이 군사적으로 일본 아래로 들어가면서 자위대의 한반도 출병을 비롯해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미국 대신 일본이 주도하는 상황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결국 박근혜 정부의 외교가 일본 군사력의 현실적 부상을 불러온 것 아닌가요?

정세현 :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 소위 '메인 액터'(Main Actor)가 되도록 상황을 끌고 온 셈이 돼버렸습니다. 게다가 작전지휘권을 미국으로부터 되돌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일본이 이 작전권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외교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일본이 미국의 대리인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일본이 미국을 대행하는 수준까지 와버린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난해 연말 갑작스럽게 이뤄진 위안부 합의는 1905년 체결했던 을사늑약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보호권으로 들어가 버린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당사자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를 겁니다.

140여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1875년 운양호 사건 이후 그 다음해인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을 체결해서 일본이 조선에 손을 댈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이 야금야금 조선으로 진출했는데, 이를 보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열강 국가들이 끼어들려고 하면 조선은 청나라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때만 해도 청나라가 이길 줄 알았겠죠. 일본의 힘이나 야망에 대해 전혀 감이 없었으니까요. 이후 일본이 러일전쟁마저 승리하고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했을 때는 이미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진 뒤였습니다. 이것이 5년 뒤 국권 강탈로 이어졌지만 이것도 모르고 그저 일본의 힘에 빨려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외교가 이때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외교를 펼치고 있습니다. 기시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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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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